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30)
이게 가능하다고? (5)
유리문을 통해 세트장 안을 보았다.
짜여진 동선대로 움직이는 보조 출연자들.
큐 소리와 함께 세트장 전체가 한 명의 연기자인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옆에 서서 패딩을 껴입고 오들오들 떨던 스태프가 날 보며 눈짓한다.
들어가라는 신호.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고, 나는 최우진으로서 문을 넘었다.
내 앞을 스치는 이들은 피곤에 쩔은 경찰들이었고, 잡혀들어온 범법자들이었으며, 문제를 안고 온 피해자들이었다.
······그들 중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나는, 천천히 가로질러 한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이곳에서 일을 하기보단, 일이 생겨 이곳으로 끌려왔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중년 남자.
그의 정체는 대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담당한 형사였다.]대본 연습을 하며 상상했던 모습을 눈앞의 배우로 바꿨다.
그렇게 나는 이 상황 속으로 한 발 더 몰입했다.
묵직한 돌이 나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온몸에 힘을 쭉 빼고서.
가라앉고, 가라앉아 텅 빈 눈으로 경찰을 바라본다.
“제가··· 제가 죽였어요.”
마치 오늘은 수요일이에요, 라고 말하듯 덤덤한 목소리로.
대뜸, 나의 말이 내던져졌다.
“뭐, 뭐라고요?”
이른 아침부터 미끄러지듯 굴러들어온 자백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담당 형사.
“최규진이요. 제 동생. 그 앨, 제가 죽였다고요.”
“그게 무슨······ 그러니까, 고인을 최우진 씨가 살해했다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담당 형사의 고개는 삐딱하게 기운다.
“나 참, 갑자기 이게 뭔······.”
그가 이마를 짚으며 나를 훑어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갑자기 본인이 살해했다는 게 기억 난 겁니까?”
“그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거든요.”
“하, 마음의 준비요? 동생을 죽였다고 말하기 위해서? 오늘 아침부터 여러 번 신선하네.”
황당한 눈으로 날 보던 그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일단 기다려봐요.”
담당 형사가 복잡한 얼굴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등받이에 기대며 시선을 돌렸다.
창밖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 밑에 숨기고 있는 진실이 뭔지 알 수 없도록. 소복하고 하얗게.
‘다행이지.’
마치 소수처럼 딱 나눠지지 않는, 모호한 표정으로.
짧게 안도하고, 아주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
······촬영은 밤낮으로 이어졌다.
씬이 바뀌며 배우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스태프들은 한결같이 촬영장을 지켜야 했다.
춥고, 배고프고.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한 장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돌릴 때면 ‘이 짓을 언제까지 하냐’ 투덜거리며 난로 앞으로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얘기부터 뒷담, 가정사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난로 위에서 주전자처럼 끓었다.
오늘의 주제는 아침부터 줄곧 백승결이었다.
“하핫, 아직도 생생하네. 끝내주지 않았어요?”
촬영부 퍼스트의 질문은 두서가 없었지만, 촬영감독은 대번에 그가 뭘 말하는지 캐치했다.
“백승결? 끝내줬지. 표정이 카메라를 뚫고 나오더라.”
뒤이어 조명 감독과 음향 감독도 다가와 난로에 손을 쬐기 시작했다.
“종갓집 막내딸에서의 모습하고 갭차이가 엄청나던데요?”
“대원군하고도 달랐죠. 거기선 역할이 왕이라서 그런가 귀티가 좔좔 흐르더니, 여기선 완전 부랑자가 따로 없었잖아요.”
“아 참. 이건 조연출한테 들은 건데, 백승결 그 친구가 첫 씬 찍기 직전에 갑자기 눈 쌓인 곳으로 내려가더니 거기서 발도 얼리고, 슬리퍼에 눈을 잔뜩 묻혔다더라고.”
“으으, 생각만 해도 시리네. 왜 그랬대요?”
“경찰서까지 터덜터덜 걸어왔을 텐데 너무 깨끗해서래. 발도, 슬리퍼도.”
촬영감독과 퍼스트가 아, 하고 입을 벌리며 주억였다.
그때 음향 감독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근데, 그뿐만은 아닌 거 같더라고. 촬영 끝나자마자 나한테 와서 소리를 한번 들어볼 수 있겠냐고 하던데?”
“소리요?”
“그래, 눈이 묻어서 질퍽거리는 소리. 그거까지 다 계산을 한 거지. 들려줬더니, 아주 만족스러워하더라.”
음향 감독이 신선한 경험이었다며 웃었고, 다른 감독들도 독특한 캐릭터라며 동감한다.
그 사이에서 연신 고갤 끄덕이던 촬영부 퍼스트가 난로에 쬐던 손을 뒤집으며 말했다.
“이 드라마. 매 촬영마다 배우들 연기 때문에 놀라긴 했지만, 백승결은 유독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의 평가에 촬영감독이 툭 던지듯 덧붙였다.
“보통 우리가 그러면, 시청자들도 그렇더라고.”
#
한편, 각 부서 감독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필드 모니터 앞.
이진태 PD는 쉬는 시간에도 짬을 내서 촬영본을 돌려보는 중이었다.
편집은 촬영 따라, 촬영은 대본 따라.
계속 일정이 밀리고 있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했다.
“아까 보조 출연자들도 돌아가면서 계속 감탄하던데. 넋 놓고 보다가 동선 삐끗해서 NG나는 줄 알았다고.”
옆에 앉아 다른 감독들을 바라보던 조연출이 저 대화에 끼지 못해 안달 난 얼굴로 말했다.
촬영본을 되돌리던 이진태 PD가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해. 솔직히 나도 아까 컷 늦게 외친 거, 그거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놀라서지.”
그때 당시, 감정선을 이어가고 싶었다 변명했던 이진태 PD의 실토에 조연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셨어요. 미팅 때 이미 놀랄 거 다 놀라신 거 아니었어요?”
“미팅 때 잘했다고 현장에서도 잘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초심자의 행운처럼 대본을 딱 받았을 때의 느낌이 좋은 경우가 많잖아.”
“하긴, 아무래도 본 촬영 때까지 혼자서 벽보고 대본을 분석하다 보니까, 오히려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더러 있죠.”
“혹은 본인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거나.”
잘못된 예를 들던 이진태 PD의 눈이 또렷해졌다.
그의 시선 끝에 놓인 필드 모니터 화면엔 백승결의 연기가 담겨 있었다.
“근데, 명확해. 어디로 가야 할지가. 첫 촬영이면 조형이 완벽하지 않을 만도 한데, 거침이 없어. 심지어 쪽대본이라 감정선 잡기가 훨씬 어려웠을 텐데.”
윤지수 작가님이 잠자는 시간까지 갈아 대본을 뽑아내고 있었지만, 창작이란 게 어디 시간만 쏟아붓는다고 될 리가 있나.
덕분에 백승결은 계속 쪽대본을 받아야 했고, 최우진의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 그토록 명확한 캐릭터 조형을 보여준 것이다.
‘돌이켜보니 뭐 그런 괴물 같은 녀석이 다 있었나 싶어서요.’
유종원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그때 조연출이 말했다.
“그래서 더 궁금하네요.”
“뭐가?”
“재준이나 하윤이랑 한 씬에 담기면, 대체 어떤 그림이 나올지.”
박재준, 고하윤.
조연출의 입에서 ‘그림자 변호’를 이끄는 두 주인공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이진태 PD도 기대 어린 눈을 했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기에.
그때였다. 세트장으로 한꺼번에 꽤 많은 인원이 들어온다.
매니저들과 스타일리스트들···.
그 사이로 방금 전 조연출이 언급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PD님, 저희 왔습니다.”
고하윤과 박재준이 차례대로 다가와 인사 했다.
이진태 PD가 손을 휘적이며 물었다.
“인터뷰는 어땠어?”
“분위기 좋았어요. 리포터가 조사를 많이 해왔더라고요.”
“조사는 무슨. 우리가 이쁘게 정리해서 줬구만.”
“어쩐지······.”
박재준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끄덕였다.
‘너무 많이 알고 있더라니.’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불쑥 물었다.
“맞다, 백승결 배우 관련해서도 물어보던데요?”
“그건 안 줬는데.”
“저도 아직 만나본 적이 없어서 해줄 말이 없다고 했죠, 뭐. 오늘 첫 촬영이지 않았어요? 어, 여기 모니터에 띄워져 있네.”
박재준이 필드 모니터에 집중하자 조연출이 얼른 끼어들었다.
“방금까지 우리도 그 얘기 중이었어. 장난 아니었거든.”
“어땠는데요?”
“그게 말이지······.”
그가 이야기의 시동을 거는데,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고하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그럼. 먼저 준비하고 올게요.”
“어어, 그래.”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쌩하니 대기실로 향하는 고하윤.
조연출이 콧잔등을 긁적이며 그 모습을 보았다.
“쟨 궁금하지도 않나 봐.”
“남 연기엔 일절 관심 없는 애잖아요. 아니, 남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건가.”
“뭐, 암튼 그건 그렇고. 오늘 보다시피 눈이 많이 왔잖냐. 그래서······.”
신이 난 조연출이 박재준에게 썰을 푸는 동안.
이진태 PD는 고하윤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보다가, 이내 필드 모니터 속 백승결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그림체가 비슷하네.’
한 장면에 담기면 퍽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레 있을 두 사람의 촬영이 점점 더 기다려지는 이진태 PD였다.
#
“부럽다.”
찻잔을 내려놓는데 현태 형이 중얼거렸다.
한 스무 번 정도. 아니, 이제 스물한 번인가.
“부럽다고.”
음, 차향 좋다. 집 주변에도 이런 카페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는데. 이거야말로 부럽······.
“부럽다니까!?”
“아, 거 참.”
“뭐야. 지금 나한테 화낸 거냐? 너 변했다?”
“언젠 화 좀 내고 살라며.”
“그 대상이 나는 아니었지, 인마!”
피식 웃으며 다시 차에 코를 박았다.
서러운 표정으로 들썩이던 현태 형이 자작하게 남은 커피를 털어 넣고서 말했다.
“근데, 부럽다. 화를 먹어도 부럽네.”
난 돌겠다. 밥 먹으면서부터 한 얘기를 카페에서까지 반복이라니.
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이러다 내 매니저로 따라가겠다고 하겠어.”
“하지. 합니다. 내일 사표 쓰면 되냐? 김 팀장님한테 로드 하나 필요 없냐고 물어봐봐. 영상도 잘 찍고 편집도 잘한다고. 아, 밤도 잘 새.”
“팀장님? 둘이 진짜 안 맞을 거 같은데.”
김성운이 점잖은 어른의 느낌이라면, 현태 형은 그냥···.
‘점이 많지. 여기저기.’
그사이에 낀 나를 생각하니 아찔해져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 형은 여전히 고하윤한테 꽂혀 있다.
“고하윤이라니. 고하윤. 내가 ‘왕후령’ 진짜 재밌게 봤잖아. 거기서 한복까지 입으니 특유의 고혹적인 분위기가 극대화돼서 진짜··· 흠흠. 가서 전하라. 내가 많이 연모하였다고.”
누굴 따라 하는 거야, 대체.
한참 동안 고하윤 예찬가를 듣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휴, 어째 촬영 날보다 피곤한 것 같냐···.”
피식 웃으며 습관처럼 대본부터 집어든다. 펜과 함께.
하지만 잠시 표지를 내려다만 보다가, 도로 내려놨다.
더 분석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원래 적혀있던 것도, 추가로 적은 것도 모두 외웠고.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내일 있을 촬영을 미리 떠올려본다.
[씬 31]그래, 이 장면부터.
머릿속을 스치는 숫자 뒤로 다음 단어가 이어진다.
[취조실]언젠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에서 봤을 공간이 그려지고.
내 반대편엔 고하윤이 앉아 있다.
커다란 눈망울과 바로 밑에 눈물처럼 흐르는 점.
오똑한 코와 날렵하면서도 길지 않은 얼굴형.
다른 드라마로 몇 번 본 게 전부였지만, 눈을 감고도 그 얼굴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이것도 기억력 덕분일까? 아무튼······.
‘연예인은 연예인이네.’
고혹, 매혹··· 유혹?
혹이란 혹은 다 달고 있는 것 같은 외모였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것 같은.
아니, 안 먹어도 할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니 현태 형의 들뜬 모습이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내가 떠올린 얼굴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하윤이 아니었다.
주인공, 장훈 변호사의 시보.
임수영 변호사지.
······몰입(沒入)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를 바라본다.
형제 살해자.
그런 나를 바라보는 임 변호사의 눈빛은 거부감이 가득했고, 덕분에 나는 안도한다.
‘부디, 그렇게만 나를 바라보길.’
쭉, 그렇게.
진실 따윈 신경 쓰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