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31)
이게 가능하다고? (6)
우유갑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본체만체하고 가계부(혹은 외상부일지도) 정리에 여념이 없던 주인 할머니가 안경을 바꿔 끼며 묻는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그래 보여요? 다행이네.”
다행이고말고.
형제 살해라는 무거운 죄명을 이고 변호사와 마주하는 날이 오늘인데.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것도 이상하잖아.
뭐, 이미 주인 할머니에겐 내가 이상한 놈처럼 보이는 듯싶지만···.
빙그레 웃으며 계산대로 다가갔다.
“아, 저 드라마 들어갔어요.”
“그래?”
그게 끝이었다.
무미건조한 반응으로 우윳값을 받은 그녀가 거스름돈을 주섬주섬 꺼내어 건넸다.
멋쩍게 콧잔등을 긁으며 우유를 챙기는데, 손에 우유 말고도 다른 게 쥐어졌다.
얇고 널따란······.
달력. 은행에서 발행한 탁상 달력이었다.
“언제야.”
“네?”
“드라마 언제 하냐고. 날짜랑 시간이랑 그기 적어놓고 가.”
작게 웃으며 펜을 잡았다.
해당하는 날짜에 표시를 하고 시간까지 적어 건네자 주인 할머니가 눈을 끔뻑였다.
“금요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 밖에 안 하는 겨? 감질나게···.”
투덜거리는 주인 할머니를 웃으며 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또 올게요.”
“그 소리 하고 몇 주 만에 온 줄 알어?”
오늘 주인 할머니가 유독 더 냉랭해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지.
내심 안도하며 빙긋이 웃었다.
“이번엔 진짜로요.”
“오지마. 얼른 일이나 열심히혀.”
손사래 치는 주인 할머니에게 공 떠넘기듯 얼른 또 오겠다 말하고서 슈퍼를 나왔다.
‘그러든가.’라는 대답이 뒤에서 들려와 입꼬리가 홱 올라갔다.
그 길로 골목길을 벗어나자 동네에 어울리지 않은 밴 한 대가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멈춘 밴에 올라타자 김성운이 내 손에 들린 우유갑을 보곤 말했다.
“왜 여기에서 타겠다고 했나 했더니. 말하지 그랬어. 내가 사 왔을 텐데.”
“가게 사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의아해하는 김성운에게 슈퍼에서 있었던 얘길 하자, 그가 ‘하다 하다 동네 할머니까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자꾸 뭘 가진다고, 욕심이 많다고 한 것 같은데?
갸우뚱하며 대본을 꺼내 드는데, 그가 물었다.
“오늘이지? 고하윤하고 촬영하는 게?”
“네.”
“기대되네. 포텐셜 넘치는 조합이라.”
그의 기대가 이해간다.
2팀의 판을 짤 때, 회사 내부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된 배우가 바로 고하윤이라고 했었지.
대박을 넘어 초대박으로 향하는 신예를 소속사가 놔줄 리 없어 포기했다고.
“어떤 사람이에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얼굴이야 당장이라도 사진처럼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뿐이다. 내 기억력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부가 옵션은 없으니까.
“고하윤? 뭐, 외모가 뛰어나고, 연기력도 탄탄하고, 미래가 기대되고. 이런 거야 길가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들을 수 있는 얘기고. 그 이면에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더라고. 큐 사인 떨어지기 전까진 아무랑도 얘기 안 하고 대기실에 틀어박혀 대본만 주구장창 보고, 연기가 끝나면 스스로 점수까지 매긴다던데. 뭐, 그렇게 독하게 했으니 화장품 CF 스타라는 프레임을 깨고 연기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
“···대단하네요.”
“그렇다고 기죽진 말고. 옆에서 지켜보니 네가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거든.”
“기죽기보단, 기대돼요.”
진심이었다.
연기라는 게 언뜻 혼자만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결국 호흡이란 걸 알기에.
늘 다른 배우들을 보며 기대한다.
뭘 배울 수 있을까?
이태관 배우와의 첫 만남이 대표적인 예였다.
현대적인 곳에서, 현대적인 옷을 입고 흥선대원군을 연기하던 그의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지.
무엇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모든 게 바뀐 듯한.
몰입(沒入).
이렇듯, 매 촬영마다 배우는 게 있으니 기대될 수밖에.
심지어 그렇게나 연기에 진심이라면 더더욱······.
어제 대본 연습을 하며 임수영 변호사를 그렸다면.
오늘은 배우, 고하윤을 떠올린다.
‘어떤 배우일까?’
입 끝이 설렘을 삼키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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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우일까?”
고하윤의 매니저가 핸들을 돌리며 말꼬릴 올렸다.
뜬금없는 관심은 아니었다. 그녀도 촬영 현장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이런저런 얘길 귀동냥하니까.
이진태 PD가 백승결 캐스팅을 위해 이고초려를 했고, CP한테까지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부터.
그 깐깐한 윤지수 작가가 여기저기서 백승결에 대해 엄지를 치켜들고 홍보대사를 자처한다는 소문까지.
게다가 첫 촬영에서 스태프들이 그의 연기에 푹 빠졌다는 건,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은 오피셜이었다.
물론 오피셜이고 뇌피셜이고 우리의 고하윤 배우님께서는 안물안궁이시지.
“아니, 궁금하지 않아? 어떤 연기였을지?”
“궁금해.”
응, 그래. 역시 안 궁금하구나.
일말의 호기심도 보이지 않는 말투에 매니저가 다시 운전에 집중한다.
“근데 그보다 지금 내 연기가 훨씬 중요해서.”
“그치, 알지. 어제 네가 그랬잖아. 이번 에피소드에서 감정이 너무 변화무쌍해서 이걸 어떻게 물 흐르듯 연결할지 고민이라고.”
“응. 화내다, 웃고. 울다가, 행복해야 하는데··· 어려워, 그게.”
“어후, 야. 롤러코스터도 그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진 않겠다.”
조울증 환자를 연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은 흐름에 매니저가 혀를 찼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배우가 그걸 어떻게 해낼지 기대감도 생긴다.
고하윤이다.
외모가 너무 뛰어나 문제라면, 연기력을 더 뛰어나게 만들면 된다는 걸 몸소 입증한 신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아마 몇 년 후면 충무로 최고의 배우가 되어 있을 거란 즐거운 상상을 하며 촬영장에 도착했다.
주차를 마치고 내리자 고하윤이 다가왔다.
“언니, 피곤할 텐데 여기서 눈 좀 붙여.”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네 연기가 궁금해서 그렇겐 못 하겠다. 얼른 드가자~.”
매니저가 고하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복잡하고 번잡한 촬영장의 풍경이 그들을 반겼다.
한바탕 인사 순례를 돌고서 촬영준비까지 마친 고하윤.
오피스룩을 입은 그녀가 어울리지 않은 공간에 들어섰다.
형광등 몇 개에 기대어 내부를 밝힌 스산한 취조실.
자리에 앉아 대본을 한 번 더 훑었다.
장면은 간단했지만, 연기는 간단치가 않다.
피의자인 최우진을 거북해하면서도, 약간의 동정도 묻어나야 하며, 시작은 단순히 일로서 이 사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야 하니까.
그때 옆에서 네일아트 받은 손을 만지작거리던 매니저가 복도 쪽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잘생기긴 잘생겼다.”
고개를 돌리니 오늘 자신과 독대할 최우진.
백승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
고하윤이 대본을 덮어 매니저에게 건넸고, 그녀는 밖으로 나가면서도 백승결의 얼굴에 감탄했다.
카메라부터 오디오까지. 모든 체크를 마친 이진태 PD가 무전기를 말아쥐었다.
그사이 다가온 백승결이 고하윤의 앞에 앉는다.
두 사람은 고갤 작게 끄덕여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떨어진 큐 사인.
언제 멋쩍게 인사했냐는 듯, 임수영으로 돌변한 고하윤이 차가운 시선으로 백승결을 바라본다.
그녀가 손에 들린 수첩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최우진 씨를 담당하신 장 변호사님은 개인적인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같이 안 왔어요. 저는 장 변호사님과 함께 일하는 임수영이라고 합니다.”
따로 명함을 건네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무미건조하게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진술로만 보자면, 우선 오후 2시경. 최규진 씨에게 발작이 찾아왔어요. 그날, 그 시간에, 최우진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요. 그리고 방문을 열어 최규진 씨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임수영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감정을 억누르듯이.
“그대로 방문을 닫았죠. 저대로 두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약을 먹이긴커녕, 신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다음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죠. 맞나요?”
“네.”
“후우···.”
작은 한숨. 임수영은 거북한 속내를 숨기며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꼭 칼로 찔러야 살해가 아녜요. 방조가 때론 그보다 더 직접적인 살인이 되기도 하죠. 최우진 씨의 경우처럼요.”
“······.”
“형제간의 살인은 존속이나 비속이 아닌 방계혈족에 해당하여 보통살인죄로 형량을 가리게 돼요. 그리고 최우진 씨의 경우엔 고의성이 분명해서 자백을 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정상참작에 기댈 요소들이 별로 없어 보여요. 그래도 그동안 피해자의 병원비로 수천만 원이 나간 내역과 피해자가 희귀병이라 국가적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없었던 점 등을 어필할 생각입니다.”
“······.”
“그리고 최우진 씨가 자필로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그렇게 써서 기자들한테···.”
“저기, 변호사님.”
그녀의 말을 막은 최우진이 느릿하게 말했다.
“저 조금 피곤한데.”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로.
임수영의 얼굴에 황당함이 물든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곱씹었다. 제대로 들었다. 그러니까, 피곤? 피곤하다고 지금?
“가족의 생명을 끊어놓고서······지금 그런 소리가 어떻게 나오죠?”
“그러니까요. 가족의 생명을 끊었는데. 그게 명확한데 뭘 더 합니까.”
뻔뻔한 모습에 두통이 지끈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감정을 눌렀다.
“일이니까요. 이건 그냥 제 일이에요.”
“이번엔 쉬세요. 전 그냥 제 죗값 그대로 받을게요.”
“하, 어떤 선고를 받게 될 줄 알고요? 남은 동생 생각은 안 해요?”
순간 취조실의 공기가 급변했다.
비스듬히 아래쪽만 바라보던 최우진의 시선이 떠올랐다.
“그 애 얘길 왜 합니까.”
“그야, 당신 동생······.”
“하아, 시발.”
“뭐라고요?”
거친 욕설에 임수영이 발끈해서 그를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움찔했다.
말라비틀어질 것처럼 무미건조하던 눈이 벌겋다.
감정이라곤 없는 것 같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요동친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난 부모도 없이 아픈 동생과 어린 동생만 있는데, 돈은 존나 없어서 죽어라 일했다. 그런데도 병원비는 또 존나게 많아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더라. 그래서 아픈 동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구한 사연이 있으니 동정 동냥 좀 해줘라. 뭐 이딴 소리 하라고? 어떻게, 거기다 계좌번호라도 쓸까?”
“아니, 지금 그런 소리가···.”
“규진이는 죽었는데.”
그리고 자신이 죽인 동생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마치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감정이 콸콸콸 쏟아져나오던 눈이 다시금 공허해졌다.
“이미 죽어버렸는데. 이제 와 동정받아서 뭐가 달라지는데.”
작은 음 이탈마저 그가 숨긴 감정이 삐져나온 것처럼 느껴진다.
그 작게 삐져나온 감정이 이번엔 임수영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숨을 골랐다. 폐가 만족하기도 전에 최우진이 말했다.
“변호사면 변호사답게 법으로만 보세요. 내가 죽였고, 빠져나갈 곳은 없어요. 그러니 그냥 법대로만 합시다.”
대체 왜···.
임수영의 거부감은 그와 대화를 할수록 의문으로 바뀌었다.
자신 따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얼른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라는 듯하지 않은가.
최우진에 대한 의아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는 순간.
—컷!
카메라가 멈췄다.
붉은빛이 꺼지고, 머리 위에 드리우던 조명과 붐 마이크도 사라졌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감탄사도 이어진다.
촬영이 끝났다. 연기가 끝난 거다.
“······.”
그런데 그녀의 의문 섞인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였다면 곧바로 돌아서서 냉정하게 점수를 매기고, 문제점을 짚고, 복기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뭐지.’
감정이 남아있다.
자신의 감정이 아닌, 임수영의 감정이.
그래서였다.
아직 연기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녀는 점수를 매길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몰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