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46)
가장 큰 운석이 되어줄 배우 (2)
한창 출연료 얘길 하던 김성운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을 몰라 잠자코 기다리자 그가 내게 물었다.
—또 동태눈으로 무덤덤한 표정 짓고 있지?
뻔히 그려진다는 듯 말하는 그.
거울을 봤다. 그 정돈 아닌데···.
—무려 드라마에서 이 정도면, 엄청나게 큰 금액인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죠.”
총 1억 2천이다. 이게 크지 않을 리가.
하지만 그 큰돈이 나에게 큰 기쁨까지 주진 못했다.
과거에 겪은 사건들로 돈을 좋아하기보단 경계하는 편이기 때문도 있고.
그 값이 오롯이 내 연기에 매겨진 가치가 아닌, 해외 거대 자본, 박혜정 작가의 기대작, 그런 드라마의 주연이란 타이틀이 훨씬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주변 환경이 아닌 오롯이 내 능력으로···.’
그렇게 더 큰 가치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며 김성운에게 물었다.
“대본은 언제쯤 받을 수 있어요?”
김성운의 ‘가장 중요한 얘기’가 끝나고, 이번엔 내게 가장 중요한 얘기였다.
어제 박혜정 작가가 거의 확정처럼 얘기하긴 했어도, 회사 차원의 얘기가 끝난 건 아니었기에 대본을 넘겨받을 수는 없었지.
참 곤욕이다. 선물 포장지를 뜯다 만 것 같이.
내 말에 김성운의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들려왔다. 참 한결같다며 혀를 내두른 그가 뒤이어 말했다.
—그 소리 할 줄 알았다. 지금 대본 들고 가는 중이야. 곧 도착하니까 기다려.
툭 던지듯 들려오는 말에 비로소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어제 내가 리딩한 건 고작 대사 몇 줄.
아직 드라마 ‘악의 링’과 내가 맡은 ‘서귀호’라는 역할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기에, 얼른 그 속을 들추고 싶었다.
그렇게 동태눈이 아닌 초롱초롱한 눈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김성운이 집에 도착했다.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꺼내어 가져오자, 겉옷을 정리하던 그가 의외라는 듯 묻는다.
“웬일로 집에 주스가 있대?”
“손님용이에요.”
“나 말고 여기 오는 손님이 또 있나?”
“······현태 형?”
“아, 예능국에 있었다는 그분? 내가 온리 원인 줄 알았는데, 아쉽구만.”
주스를 건네받은 김성운이 흐흐 웃으며 방바닥에 앉았다.
목을 축인 김성운이 좌식 테이블 위에 빈 잔을 내려놓다가, 올려져 있던 종이를 발견했다.
대본을 받아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적어둔 ‘악의 링’의 대사들이었다.
“이건 뭐······ 설마 악의 링 대사들이야?”
“그날 미팅룸에서 리딩했던 대사들이에요.”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둔 거구나?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하루를 못 참고.”
그러더니 무슨 재밌는 생각이 났는지 입 끝을 슬쩍 올리며 가져온 대본을 꺼내어 펼친다.
“어디 한 번 볼까? 기억력 좋다, 좋다 했지만 너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테스트해 본 적은 없을 거 아냐. 재밌겠네.”
나란히 놓고 비교할 생각인가 본데···.
“그나저나, 대사가 꽤 많은데? 어쩐지 미팅이 길어지더라니.”
중얼거리며 눈을 좌우로 굴리는 김성운.
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간다.
“오, 앞부분은 아예 외웠네? 다음 대사도······똑같고. 그다음은······.”
내가 연기한 장면이 다섯 개다. 대사는 스무 줄 가까이 되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교차 확인하던 김성운의 얼굴 주름들이 점점 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나에게로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뭐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똑같아.”
“팀장님도 아셨잖아요. 제 기억력이 좀 남다른 거.”
“이건 좀···이 아니잖아. 한두 줄도 아니고 어떻게 리딩한 걸 그 자리에서 전부 외워?”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어서?
이렇게 얘기하면 놀린다고 생각하겠지.
김성운이 한참 동안 혀를 내두른다. 이따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날리기도 하면서.
그러다 퍼뜩 나를 보며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묻는다.
“그럼 혹시······ 그 기억력이 몸 쓰는 쪽에도 도움이 되려나? 예를 들어 자세를 잘 기억한다던가, 운동 같은 거 말이야.”
“글쎄요. 운동이라곤 택배 나르는 거랑 달리는 것밖에 안 해봐서···.”
“아, 그랬다고 그랬었지.”
입맛을 다시며 끄덕거리는 김성운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질문한 이유를 풀어낸다.
“아니, 이제 운동도 슬슬 시작해야 하잖아. 액션 스쿨은 멀티온 본사에서 사람들 다녀가고부터 나가면 될 것 같고, 그전에 일단 헬스랑 격투기 체육관을 중점적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고로, 움직이는 분야에서도 이 기억력이 빛을 발할지··· 그게 궁금했던 거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자세나 동선은 확실히 잘 기억하는 편인 것 같다. 그건 촬영을 하며 익히 느꼈던 사실.
하지만 몸을 제대로 사용하는 운동에서까지 그럴 수 있을진 미지수였다.
어디까지나 피지컬이 따라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여기서 가깝고 시설 좋은 곳들로 알아보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김성운이 고대하던 대본을 건넸다.
기사 작위인 양 경건하게 받아들고서, 곧바로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중간에 회사로 가야 하는 김성운을 배웅하고, 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탐독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희끗하게 웃었다.
“재밌다.”
작가를 만나 시놉을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대본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고 나니 더욱 확실해진다.
소재만으로 이끌렸던 내 감이······.
“이거 잘 되겠다.”
이번에도 정확했다는 게.
#
한편, 주인공 다음으로 큰 산이었던 ‘서귀호’의 캐스팅을 확정 지은 마커스필름.
책상 앞에 앉은 대표가 계약서를 날려버릴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이 프로젝트 꼭 성공시켜야 하는데 말이야······.”
멀티온의 국내 진출 소식이 퍼지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덩달아 ‘악의 링’을 제작하는 마커스필름에도 관심이 옮겨붙었다.
좋은 관심도, 나쁜 관심도 전부.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전폭적으로 밀어줬는데도 실패한다?
그건 제작사의 무능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꼴이니까.
게다가 지난 화상 회의에서 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인 본사 직원이 뭐라고 했던가.
넷플리스라는 공룡을 잡을 운석이 바로 ‘악의 링’이라고 했었지.
양쪽에서 부담감 잔뜩 실린 원투 펀치를 얻어맞은 그에게, 이젠 선택 하나하나가 묵직했다.
그때 소파에 앉아 직원들이 보내온 콘티를 훑던 조규필 감독이 목을 꺾어 대표를 보았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전.”
“뭘?”
“지금 대표님이 한숨 쉬는 이유요. 백승결 캐스팅. 제가 어제저녁부터 백승결의 리딩을 계속 곱씹어봤거든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연기력에는 토를 달 수가 없겠더라고요. 대표님도 촬영해온 영상으로 보셨으니 아시잖아요. 우리가 그동안 그렸던 서귀호가 딱 거기 있는 거.”
이에 대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계약서를 두드렸다.
“그거까지 아니었으면 내가 칼 물고 반대했지.”
“그랬어도 어차피 작가님 뜻대로 됐을······.”
미래를 예견하던 조규필 감독이 대표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역할이 어지간해야지. 까놓고 말해서 주인공보다 더 임팩트 있는 롤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믿어봐야죠. 도장까지 찍은 이상, 같이 작품 하나 완성시켜야 하는 팀인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지금 다리를 너무 떠는데? 그거 너 불안할 때 나오는 습관이잖아.”
속내를 들킨 조규필 감독이 아하하 웃자,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척이야.”
“그럼 뭐, 같이 옆에서 손톱 뜯으면서 불안해 해드릴까요?”
“어쭈. 박혜정 작가한텐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한텐 막 덤빈다?”
“대표님도 작가님한텐 아무 말도 못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며 얼른 소파에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피하는 조규필 감독.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낸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뭐. 연기력만큼은 내 두 눈으로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쳐. 근데 신승찬 매니저가 와서 그랬다며. 격투기라는 소재가 매력적인 만큼, 그걸 얼마나 리얼리티하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고. 우리 드라마가 사실상 스릴러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론 액션 이잖아. 육체미! 강함!”
“그렇긴 하죠.”
동의하는 조규필 감독을 보며, 대표가 가장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꺼내 들었다.
“연출가로서 어떻게 생각해? 그 친구가 그것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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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팀을 맡으면서부터 시간이 무척이나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김성운이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씹어보자니 우선 일이 많아진 것도 한몫하리라.
그냥 실장 달고 일할 땐 아무리 바빠도 맡은 배우 몇 명에 집중하면 됐는데, 팀 단위를 움직이다 보니 보고 받고 처리할 게 산더미였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라고 하기엔 최근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승결이 때문이겠지.’
백승결이 ‘악의 링’에 투입되고부터.
시간의 유속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만큼, 녀석의 변화는 하루하루 놀라웠다.
‘변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변신이라 해도 될 것처럼.’
‘악의 링’ 캐스팅이 확정되고 이제 고작 몇 주가 지났을 뿐인데 몸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루에 반나절을 오롯이 운동에 투자한 결과였다.
그동안 꾸준히 달리기했던 체력 덕분인지 지치지도 않았고, 요즘엔 반나절을 넘기는 일도 허다했다.
거기에 트레이너들조차 고개를 내저을 만큼 극단적인 식단까지.
그렇다고 몸을 키우는 데만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운동일 뿐, 백승결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곳은 격투기 체육관이다.
‘독한 녀석······.’
이게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스케줄이 맞나 의문이 든다.
그만큼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 이번 작품에선 어떤 연기를 보여주려고 저러나.
이래서 연기력만으론 안 된다.
사람이 욕심이 있어야지. 욕심이.
그렇게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다시 한번 만끽하며 시간의 흐름에 휩쓸렸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마침내, 그가 가진 기대감의 뚜껑을 열 순간이 다가왔다.
이번 주말.
멀티온 본사에서 사람들이 온다.
말이 기대감의 뚜껑이지, 사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판도라다.
이미 ‘서귀호’ 역으로 확정이 되었다곤 하지만 본사에서 갸우뚱하는 순간 교체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지. 아냐, 뭘 걱정하고 있냐. 내 배우를 믿어야지. 옆에서 계속 봤잖아. 얼마나 괴물 같은 녀석인지······.’
김성운이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며 차를 멈췄다.
도착한 곳은 백승결이 다니는 격투기 체육관 앞.
곧 결전의 날이니 소고기라도 사 먹일까 싶어 퇴근하자마자 달려왔다.
이윽고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후드를 뒤집어쓴 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백승결이 분명했다. 좀 커지긴 했지만, 실루엣부터가 잘생긴 건 여전하거든.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수고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고생 많았······.”
조수석에 올라탄 백승결의 어깨를 두드리던 김성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눈동자가 백승결의 얼굴을 향한 채로 굳었다.
그리고 벌컥 소리쳤다.
“너, 너 얼굴이 왜 그래!”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낯선 상처가 생겨있다.
늘 차분함을 유지하던 그로서도 펄쩍 뛸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맑은 눈의 광인은 웃으며 자랑한다.
“오늘 처음으로 스파링 했거든요.”
“스파링? 그걸 네가 왜 해?”
“하하.”
“하하? 너 격투기 선수 할 거야? 어디 대회 나가? 그냥 그거 뭐야··· 혼자 하는 거.”
“쉐도우요?”
“그래, 쉐도우! 그거만 하라니까!”
“그래도 격투기 선수를 연기하는데, 스파링 한 번 안 해봤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네가 제일 이상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톤을 낮추며 물었다.
“너 모레가 멀티온 본사 미팅인 거 몰라? ”
“알아요.”
“아는데 스파링을 했다고? 이 체육관 미쳤네. 딱 봐도 영화 록키에 나올 것 같이 낡은 게, 융통성이라곤 제로일 것 같더라니···.”
“체육관 탓 아녜요. 제가 끈질기게 조르고 졸랐거든요. 관장님이 절대 안 된다는 거 겨우 설득했어요.”
백승결의 말에 김성운이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가 작정하고 설득하면 누구든 설득됐겠다 싶어서였다.
원하는 건 뭐든 얻어내는 녀석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잖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본을 연습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그린 서귀호는 늘 링 위에 있는데, 나 뭐 하는 거지?”
“······.”
“그래서 올라가야 했어요. 그 위에 선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고 싶었거든요.”
김성운은 백승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냥 녀석의 말이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느낌. 끈적하고, 서늘한 감각이 올라온다.
어둑한 차 안으로 비친 가로등 빛이 백승결의 두 눈에 드리웠다.
······광기였다.
정확히는 백승결이 아닌, 서귀호의 광기.
대본에서 보던 그 미친놈이 조수석에 올라탄 것만 같다.
“그래서··· 알게 됐어?”
“아뇨, 모르겠어요.”
백승결이 고개를 젓는다.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대답과는 달리, 녀석은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못 배길 정도로, 아주 짙고 섬뜩한 웃음이었다.
“서귀호라면··· 그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