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47)
가장 큰 운석이 되어줄 배우 (3)
이틀 후, 광화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곳곳에 한국적인 요소들이 스며든 라운지에 유명 배우들이 하나둘 모였다.
일찍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난 마치 이 모임의 주최자인양 그들을 맞이했다.
내 역할을 했어야 했던 마커스필름 대표는 초조함을 못 이기고 복도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미팅 시간이 다가올수록 어째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지.
“백승결 배우 출연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태관 선배한테 얘기 정말 많이 들어서 너무 궁금했는데, 하하.”
주인공 임훈의 코치 역할을 맡은 중년 남자 배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대작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얼굴이라서.
하긴, ‘악의 링’의 출연진들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선 주인공이 아니면 아쉬운 배우들 아닌가.
그나저나, 이태관 배우가 내 얘길 했다고? 그것도 정말 많이?
무슨 얘길 했는지 물으려는데, 뷰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온 여배우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는 박 대표님한테 들었는데.”
“박 대표님이요? 혹시 굿픽쳐스···.”
“맞아요. 박윤석 대표님이요.”
그쪽에선 대체 또 무슨 얘기가···.
“어? 난 안원상 감독님한테 들었는데. 함께 연기할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해보라고. 그게 이번이네요?”
얼씨구. 주머니에 구멍이 뚫린 듯, 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줄줄 새고 있었다.
전부 좋은 얘기라 다행이지, 아니었어봐···.
이 바닥 좁다는 게 확실히 체감된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다.
그렇게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새삼 체감하는 사이, 빈자리가 대부분 채워졌다.
배우들 중에선 신승찬 배우를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그나저나, 우리 주인공은 언제 오시나.”
“주인공이잖아. 원래 다른 배우들 다 오고 오는 게 요즘 말로 국룰이라고.”
“아직도 그런 기 싸움을 하나?”
“요즘은 그런 거 기 싸움으로도 안 쳐요, 선배님. 뭐랄까··· 위트?”
“위트는 얼어 죽을.”
이미 친분이 있는 배우들끼리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데, 라운지로 박혜정 작가와 조규필 감독, 그리고.
“안녕하세요.”
초면이지만, 익숙한 얼굴.
조각이라는 말이 전혀 오글거리지 않는 신승찬 배우가 짧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배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인가 싶어 자연스레 흥미가 동했다.
잠시 지켜보니 말수가 적어서 그런가, 첫인상은 꽤나 시크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특유의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신비로울 지경이다.
“처음으로 이렇게 모두 모였네요?”
박혜정 작가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릴 훑으며 감격 어린 미소를 보였다.
덕분에 살짝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도 금세 풀어졌다.
그녀가 대략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멀티온에서 온 직원분들은 6시쯤에 올라올 거예요. 그분들이 오늘 이 자릴 만든 이유에 대해 짧게 얘길 하자면······.”
오늘 이 자리의 목적부터, 멀티온 직원들의 간략한 정보까지.
시원시원한 성격의 박혜정 작가가 저렇게까지 꼼꼼히 얘기하는 거 보면, 거대 투자자인 그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생각에 쐐기를 박듯, 어느새 돌아온 마커스필름 대표가 덧붙였다.
“가장 중요한 얘길 빼먹었잖아.”
“뭔데요?”
“우리가 투자금 올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아직 결재가 안 떨어졌어.”
배우들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묻는다.
“그럼, 오늘 만나보고 결정하겠다는······.”
대표가 마른 침을 삼키며 끄덕이던 그때.
입구 쪽이 버터 바른 듯한 외국어로 시끄러워졌다.
그의 초조한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간다.
“왔다, 왔어.”
멀티온 본사 직원들이 라운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
빈자리가 모두 채워졌다.
영어가 유창한 조규필 감독의 주도로 간단한 인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대화.
박혜정 작가가 사전에 설명한 대로 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인 댄은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조금 어눌하지만, 의사소통엔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한국어 실력이 출중했다.
혼혈인 다른 직원도 어느 정도는 한국어가 가능했고, 유일한 백인은 그의 통역을 도움받아 대화에 참여했다.
어느 정도 어색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댄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대뜸 말했다.
“솔직히 이 자리를 만든 이유에 여러분들을 평가하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곤 못 하겠네요. 수백억을 투자한 본사의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요.”
어눌한 발음이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그 말에 물을 들이켜던 대표는 사레가 들려 쿨럭거렸다.
다른 배우들도 ‘이게 아메리칸의 미팅인가, 살벌한데···’라는 표정으로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투자자가 아닌 제작사로서 여러분들과 즐겁게 얘길 해보고 싶습니다. 전 이 ‘악의 링’이란 각본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공통 관심사가 생긴 사람들끼리는 빨리 친해지는 법이죠. 그러니 어떻게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지 우리 편하게 얘기 해봐요. 물론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건 자본일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외국인 특유의 제스쳐로 대표의 표정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단번에 녹인 그가 대화를 이끌었다.
“제가 박혜정 작가님 작품을 처음 본 게 2년 전쯤이었는데, 그때가 막 멀티온이 영역을 전 세계로 넓히려고 계획 중일 때였거든요. 그래서······.”
차와 커피를 마시며 시작된 이야기가.
“박 작가님께서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주셨지만, 그걸 현실로 옮기면서 분명 여러 구멍들이 생길 겁니다. 저는 그걸 메우는 게 바로 연출과 배우분들의 연기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때론 농담 같고, 때론 진지한 이야기들을 거쳐, 비워진 접시와 와인병만큼 무르익었을 무렵.
얼굴이 벌게진 댄이 내 쪽을 돌아본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백··· 승결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눌한 발음으로 날 부른 그가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물었다.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운동하다가 생긴 건가요?”
자연스레 나도 내 이마로 손이 갔다. 상처를 가린 밴드가 만져졌다.
그 위에 머리카락으로 가리긴 했지만, 티가 아예 안 날 순 없었다.
“네. 체육관에서 조금 다쳤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격투길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꽤 좋아하거든요. 직접 하진 않지만 UFC부터 벨라토르, ONE FC까지 안 보는 게 없을 정도죠. 그런데 혹시, 스파링을 한 건가요?”
끄덕이자 그가 작게 감탄했다.
“열정이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그거 아시죠? 서귀호는 상처가 있어선 안 돼요. 희대의 천재니까. 원투. 게임 셋.”
양손으로 경기 중지 포즈를 취한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말을 들은 배우들이 동조했다.
“서귀호라면 정말 그렇겠네요.”
“상처 없는 격투기 선수라. 악인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멋지네.”
“승결 씨 부담되겠네. 다음 스파링에선 한 대도 안 맞아야겠어.”
물론 스파링에서 맞지 않을 만큼 실력을 키우라는 말은 당연히 아닐 터.
그가 미팅 내내 강조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주제가 선과 악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임훈을 비롯해, 각자의 생각과 신념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캐릭터를 얼마나 이해하고 잘 살리느냐가 육체미나 액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나도 그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지만······.
“승결 씨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눈치 빠른 박혜정 작가가 말꼬릴 올렸다.
그러자 댄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오, 새로운 생각은 늘 환영입니다.”
얼른 얘기해보라는 듯 말없이 끄덕이는 댄.
덕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멀티온 직원들과 배우들의 흥미로운 눈빛부터.
조규필 감독과 대표의 불안한 눈초리까지.
다양한 눈들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분석한 서귀호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요.”
“어떻게 말이죠?”
되묻는 댄의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자칭 영화광이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릴 정도로 정말 이런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건 나도 빠질 수 없는데 말이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대본 속 서귀호는 분명 인간 같지 않은 천재예요. 작가님이 그렇게 설정하셨죠. 하지만 동시에······.”
박혜정 작가를 슬쩍 보며 말을 잇는데, 댄이 정답을 맞추듯 얼른 내뱉었다.
“사이코패스.”
내가 입꼬릴 올리며 끄덕였다.
“그렇죠. 그래서 사이코패스인 서귀호는 임훈을 만나기 전까지 늘 무료해 합니다. 매번 살인의 목전에서 경기가 끝나버리니 지루해하고, 갈증을 느끼죠. 그런 서귀호는 이따금 경기에 흥미를 잃기도 했을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요?”
“서귀호는 나름의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냥 이기는 건 지루하니까······ 그리고 이다음부턴 제 상상입니다.”
“부탁하죠.”
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혜정 작가도 눈을 빛내며 턱을 괸다.
이따금 호응 정도만 하며 ‘잘생김’을 유지하던 신승찬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배우들도 경청한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조규필 감독과 대표도 한시름 내려놓고 관망 중이었다.
뭐, 그냥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만약에~’같은 얘기니까.
자유롭게 해도 상관없겠지.
“그래서······.”
내가 천천히 입을 뗐다.
······서귀호는, 상대의 주먹을 피하지 않는다.
그냥 맞아준다. 알량한 동정일까? 그럴 리가.
느낄 감정 자체가 없는 그에겐 이건 그저 놀이일 뿐이다.
그러면 상대는 신이 나겠지. 어떻게 풀지 막막하던 매듭이, 저절로 풀려가는 기분을 느낄 거다.
‘내 주먹이 닿기 시작했어! 이대로만 하자. 이대로만. 어쩌면···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렇게 최선을 다하도록.
상대가 악(惡)이 가득한 링 위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도록.
그렇게 만들겠지.
희망이 곤두박질칠 때의 좌절에 물든 그 표정이······.
“그나마 볼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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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을 비롯한 멀티온 직원들은 4일을 머물며 ‘악의 링’의 진행 상황과 계획, 마케팅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확인한 청사진은 생각보다 세세했고, 기대 이상으로 견고했다.
여기서 멀티온의 자본력이 더해진다면 시너지가 엄청날 것이란 생각이 모두에게 심어졌다.
물론 여러 걱정거리들을 모두 해결하고 돌아갈 순 없었다.
예를 들어 격투기란 소재의 특성상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릴 것이고, 호였던 사람조차 어설픔이 느껴지는 순간 불호로 갈아탈 확률 또한 높다는 등의 문제는 완벽한 해결 방안이 없었다.
그저 잘 만드는 수밖에.
“잘 부탁드립니다.”
공항을 밟은 댄이 배웅 나온 이들과 악수를 나눴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부쩍 친해진 박혜정 작가와 조규필 감독, 그리고 마커스필름 대표.
그들의 인사에 댄이 덧붙였다.
“돌아가서 얘기해줄 생각입니다. 악의 링은 그저 범람하는 OTT플랫폼들을 견제할 총알 따위가 아니라고.”
뒤이어 확신에 찬 목소리가 공항에 울렸다.
“운석이라고.”
그 말을 들은 대표는 그야말로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그에겐 운석처럼 거대한 자금이 통장에 꽂힐 거란 소리로 들리는 중이었다.
댄이 말을 이었다.
“정말 기대됩니다. 특히 백승결. 그 배우가요.”
그 이름만큼은 꽤나 유창한 발음으로 말하는 댄이었다.
그날, 굉장한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겠지.
이에 박혜정 작가가 웃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백승결이란 배우에 푹 빠진 그녀였지만, 그런 그가 영감까지 가져다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백승결이 던진 상상은 결국 대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일부분이 수정되었고, 그 결과가 퍽 만족스러웠지.
“저도 그래요.”
그러니 박혜정 작가도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백승결이 무조건 서귀호여야 한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 배우가, 가장 큰 운석이 되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