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58)
멀티온 (5)
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된 일정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행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그중 대부분이 ‘악의 링’ 부스에 관심을 보였다.
대놓고 이번 행사의 주인공임을 알려주는 위치와 규모였으니 그럴 수밖에.
행사가 끝난 뒤에 확인해보니 확실히 SNS나 커뮤니티에 오늘 행사와 ‘악의 링’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다음날은 무려 세계챔피언의 체육관까지 가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 모습을 모두 카메라에 담은 댄과 기자들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로베노가 유독 나에게 관심을 보여서인지, 최영기 실장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신승찬의 얼굴도 그리 편해 보이진 않았다.
그날 오후에도 행사가 이어졌다.
어제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방문했고, 이번엔 시작부터 ‘악의 링’ 부스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녁엔 라디오, 다음날 오전엔 지역 방송에까지 출연하며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3일간의 정신없는 일정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우리에게 짧은 자유가 주어졌다.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3, 4시간 정도의 텀이 남은 것.
우리는 아울렛파와 관광파로 나뉘었다.
나는 처음으로 해외에 나온 만큼 후자였다.
LA 시내를 관광하기로 했지.
아내의 옷을 사고 싶어 하던 김성운이 나 때문에 관광 쪽으로 노선을 바꾸려 하길래 얼른 아울렛파 버스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혼자 한참 동안 LA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 블럭을 사이에 두고 콘크리트 잿빛 도시에서 세련된 거리로 바뀌는 이중적인 모습을 눈에 담다가.
눈에 띄는 가게에 들어가 선물할만한 것들을 하나씩 샀다.
“홍보팀 직원분들 것도 샀고, 현태 형 회사분들 것도 됐고. 그리고 팀장님이랑······.”
의사소통이 어렵진 않았다.
살면서 들었던 영어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있어 원하는 것 정도는 더듬더듬 말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게 원활할 순 없었나 보다.
“그러니까···음···.”
평소 현태 형이 갖고 싶어 했던 카메라 가방을 찾는 중이었다.
비슷하지만 이쪽에 주머니가 위아래로 하나씩 더 있었고, 크기도 더 컸으며, 재질은 이런 패브릭이 아니라 가죽이었다.
“······.”
이 모든 걸 눈앞의 외국인에게 납득시킬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도와줘요?”
내가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고갤 돌리니, 역시나.
신승찬이 거기에 서 있었다.
#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어요. 그냥 지나치려다가 뭔가 난감해하는 표정이길래 들어갔고요.”
신승찬이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으며 툭 말했다.
보답으로 음료를 사겠다며 끌고 온 백승결이 덕분에 살았다며 웃는다.
“뭐 먹을지 얘기해요. 내가 갔다 올게요. 해외는 자리에 짐 놓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눈치를 보며 덧붙이는 말에 신승찬이 끄덕였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티가 나네.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고, 카운터로 가는 백승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속이 좋은 건가?’
그런 생각이 뒤를 잇는다.
촬영 기간 동안은 물론이고, 여기 와서까지.
노골적으로 거리를 뒀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잠시 후, 음료와 함께 돌아온 백승결은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팜플렛을 보더니 물어왔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거 미술 전시 팜플렛이에요. 벨 켈린이라고 현대 미술계의 신예인데······.”
저도 모르게 줄줄이 설명하려던 신승찬이 경청하는 백승결을 보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괜히 옆 의자에 올려둔 불룩한 가방과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그, 뭐 많이 샀네요?”
“아, 지인들 줄 선물이에요. 가방엔 그냥 대본이고요.”
“여기서까지 대본을 읽으려고요?”
비행기에서도 대본 읽던 모습이 떠올라 한 말이었다.
최영기 실장은 척하는 게 꼴 보기 싫다며 투덜거렸는데, 아무래도 그가 틀린 것 같지.
이것까지 척일 리는 없으니까.
“돌아다니다가 다리 아프면 괜찮은 카페 들어가서 읽으려고 가져 나왔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백승결.
신승찬의 머릿속에 질문하나가 떠오른 건 그때쯤부터였다.
이후로 짧은 이야기가 오갔다.
짧다고는 하지만, 아마 촬영 때 대화한 걸 전부 합친 것만큼 떠든 것 같다.
그런데도 머릿속에 남은 질문은 떠날 생각을 않는다.
결국, 신승찬은 생각을 끄집어냈다.
“······이번에 서귀호라는 캐릭터, 어떻게 분석했어요?”
처음 멀티온 본사 직원들과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이후로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백승결은 서귀호 그 자체였다.
혼자서 그를 몇 번이고 따라 해봤지만 도무지 그런 느낌이 나질 않았다.
‘준비해온 역할이 아니니까 당연한 걸까?’
그렇다기엔 자신이 지금까지 맡은 모든 역할이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 맡은 임훈도 마찬가지.
수많은 자료를 찾아 몰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저기서 빌려온 감정들은 완벽한 임훈이 될 수 없었다.
그와 비슷한 흉내를 낸다는 느낌.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피했다. 몰입은 핑계고,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백승결은 서귀호가 되었는데, 자신은 임훈인 척을 한다는 게···.
한마디로 거지 같았다.
서귀호가 진짜 주인공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때마다 속이 뒤집히기도 했다.
최영기 실장은 이게 다 하람이 백승결만 밀어줘서라고 말했지만.
촬영장에서 그의 연기를 볼수록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건 온전히 그의 능력이었고, 재능이었다.
‘아역 때도, 그리고 커서도······ 나는 못 이기는구나.’
담아뒀던 질문을 꺼내니, 그동안의 기억과 감정이 함께 딸려 나왔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것을 쓰게 곱씹는데, 백승결이 말했다.
“우선 여러 자료를 찾아봐요. 비슷한 캐릭터나, 실제 사례나 뭐 그런 것들이요.”
예상했던 대로 다를 게 없다. 평범하다.
그럼에도 차이가 나는 건 역시 재능이겠지.
누구보다 재능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적어도 해별이를 만나기 전까진, 그도 또래들 사이에서 연기 천재라 불렸었으니까.
“근데, 대본을 받은 이후로는 다 치우고 대본만 봐요. 그리고 대본을 읽으며 빈칸을 채워요.”
이어진 백승결의 말에 고갤 기울였다.
“빈칸이요?”
“음······.”
뭔가를 생각하던 그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대본 하나를 꺼냈다.
“봐볼래요?”
“······이거 악의 링 대본이잖아요. 촬영 끝난 대본을 왜 가져왔어요? 뭐, 복습이라도 하려고요?”
“설마요. 비행기 안에서 대본 꺼내다가 알았어요. 같이 딸려왔나 봐요.”
씩 웃는 백승결을 보다가 그가 건넨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표정을 굳혔다.
중간중간 남는 공간에 추가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까지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전혀 달랐다.
연기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그곳엔 이야기가 있었다.
대본에선 알려주지 않았던 서귀호의 이야기들.
서귀호의 빈칸.
“이런 내용은 박혜정 작가님이 말해주신 거예요?”
“아뇨, 제 상상이에요.”
“······상상이 꽤 세세하네요.”
“아무리 복잡한 캐릭터더라도, 그걸 쉽게 푸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린 아이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요.”
멍하니 백승결의 이야길 듣던 신승찬이 다음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다음장도.
어디까지나 백승결의 상상만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
하지만 박혜정 작가가 코멘트를 달아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본을 훑던 신승찬이 불쑥 헛웃음을 터트렸다.
줄곧 왜 안될까 생각했다.
집에서 혼자 백승결의 연기를 따라한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그 느낌이 안나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는데······.
“애초에 따라할 수가 없었네.”
“네?”
신승찬이 멀뚱거리는 백승결을 보았다.
방향이 달랐다.
자신이 한 장면, 한 장면에서 보다 더 임훈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이 사람은 장면과 장면을 연결했다.
그 사이의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했다.
그렇게 ‘서귀호’라는 이름의 작품을 하나 더 써내려갔다.
그러니 어떻게 따라하겠나.
‘작가보다 더 서귀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
신승찬을 만난 이후로 가장 길었던 대화가 아닐까.
우리는 잔을 비우고 자리를 정리했다.
조금은 개운해진 것 같은 신승찬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도움이 된 건가.’
그가 날 피한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게 제작발표회에서 말했던 것처럼 몰입을 위해서만은 아닌 것도.
원래 다른 사람들한테도 시크한 성격이긴 하지만, 나와 연기를 할 때만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이 있었으니까.
마치 빗장을 치고 연기 하는 느낌이랄까.
내 머리론 해답이 나오지 않아 김성운에게 물어보니, 원인은 아무래도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다음부턴 그가 편하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었다.
뭐, 신승찬이 마음에 들어 그랬다기 보단 작품을 위해서였다.
촬영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나에겐 주인공 임훈이 필요했다.
“음료는 내가 살 걸 그랬어요.”
“···?”
“승결 씨만의 캐릭터 연구 방법까지 들었잖아요.”
“아··· 제 방법 아녜요.”
대본을 집어넣으며 쓴 웃음을 머금었다.
“아역 때, 어머니가 이렇게 해줬어요.”
그때도 단순히 외우는 건 잘했다.
하지만 말그대로 외우기만 했지, 해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솔직히 잘 몰랐다.
그냥 울었다니까 그런가 보다. 웃었다니까 그런가 보다.
그런 나에게 캐릭터를 이해시키기 위해, 엄마는 밤새 고민해서 새로운 이야길 만들었다.
대본엔 나오지 않는 해별이의 이야기였다.
“······슬슬 갈까요?”
가방을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한 얼굴로 보던 신승찬도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거리로 나온 우리가 숙소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순간.
“어, 신승찬?”
“엥? 어디, 어디. 어? 진짜다···.”
“미친. 옆엔 백승결, 백승결!”
우릴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딱봐도 한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
내심 반갑기도 해서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데, 그들 덕분에 이목이 끌렸는지 또 다른 곳에서 누군가 외쳤다.
“Ring of evil?”
근데, 영어···?
“진짜, 그 챔피언이야?”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선한 인상이잖아. 그 사람은 더 악랄해보였다고.”
“배우들 입금 전후 몰라? 저건 입금 전이잖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순 없지만, 한가진 확실했다.
저 외국인들이 우릴 알아봤다는 것.
“맞네. 옆사람 봐봐. 악의 링 주인공이잖아!”
“누군데? 유명한 사람들이야?”
“악의 링이 뭔데?”
순식간에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추가로 모여들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전부 관심을 가지며 우리쪽을 바라본다.
심지어 그 중 몇몇은 우릴 알아봤는지 앞쪽 대열에 합류했다.
“사진 찍어달라고 할까?”
“누군지 모른다며.”
“근데 유명한 것 같잖아!”
“잠시만, 검색 좀 해보자. 누구라고?”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돌아보니 신비로움의 대명사이던 신승찬 조차도 퍽 바보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지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다음순간.
“뭐지? 여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어?”
다른 관광파 배우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구경하다가 우릴 발견했고.
“어머, 김연지 배우도 있어!”
“대박, 이정환도!”
한국인 관광객들도 그들을 발견했다.
덕분에 그들까지도 몰려든 인파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그 다음부턴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명이 물꼬를 트는 순간 무수히 쏟아지는 사진 요청.
그렇게 우리들의 짧은 자유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