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61)
61화 악의 링 (3)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밀린 답장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잡고 시간을 들여 해야 할 정도로 수많은 연락들이 핸드폰에 꽉꽉 들어차 있었다.
‘다들 잘 지내는구나.’
일일이 답장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종갓집 막내딸 단톡방이 아주 오랜만에 활기를 띤다.
[이강현: 이젠 형 연기력이 부럽지도 않다. 내가 다른 세상 사람이랑 연기를 했구나 싶네···.] [최지연: 난 처음부터 알았어. 유 PD님이랑 같이 선배 대본을 봤는데, 무슨 수험생인 줄. 아니 수험생도 그렇겐 필기 안 하겠다.] [유종원 PD님: 내가 그림자 변호 이진태 PD한테도 말했었지. 괴물 같은 친구라고. 근데 진짜 괴물 같은 역할까지 맡아버리니 난리 났네.] [서은영 작가님: 그런 승결 씨를 복귀시킨 게 바로 접니다. 히히.]다들 각자의 일로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악의 링’을 모두 봤다고 한다.
본인들 말로는 의리 같은 게 아니라 재밌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는데, 뭐가 됐든 내겐 고마운 일이지.
한편, 현태 형은 벌써 5시간째 팀원들과 함께 흥분의 도가니였고, 그걸 보니 오늘도 퇴근은 그른 듯했다.
대원군을 함께 찍었던 김상억과 이준혁에게도 연락이 왔다.
[김상억 배우님: 진짜 내 올해 최고의 드라마였다. 지상파에서 했으면 시청률 40%도 넘었을걸? 특히 어느 부분이 좋았냐면······.] [이준혁 배우: 1화 딱 보고 이건 매주 기다리면 피 말리겠다 싶어서 꾹 참다가 오늘 한 번에 몰아봤어요. 방금 다 봤는데, 진짜······.]연기에 대한 칭찬으로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장문의 톡을 보내왔다.
한글자, 한글자 꼼꼼히 읽어내려가던 중에 상단에 새로운 연락이 떠올랐다.
이태관 배우였다.
[이태관 선배님: 통화 괜찮아?]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 정도 벨소리가 울리더니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박 대표님이랑 안 감독 만났다는 얘긴 들었는데. 촬영이 있어서 가진 못했지만.
“저도 들었어요. 오늘 안 오신 거에 다들 아쉬워하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 화도 좀 늦게 봤어. 내내 즐거웠고, 대단했다. 그거 말하고 싶어 전화했어.
불쑥 온 연락도, 갑작스러운 통화도 얼떨떨한데.
그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모든 칭찬이 기분이 좋지만, 확실히 이태관 배우의 칭찬엔 힘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몰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 일종의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준 배우라서인 것 같지.
살짝 들뜬 목소리로 감사하다 말하자, 그가 말을 이어간다.
—네가 얼마나 그 역할에 대해 고민했는지, 훤히 보였고. 그래서 더 인상 깊었다. 대원군을 찍을 때 느꼈던 고종의 이미지도, 그림자 변호에서의 분위기도. 8화 내내 전혀 보이지 않았어.
그의 말을 들으며 문득 시선이 내려갔다.
작은 테이블 위에 여행 가방에서 꺼내놓은 ‘악의 링’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을 서귀호만의 이야기가 큰 도움을 줬으리라.
—배우도 결국 사람이라 극과 극의 역할 사이에도 유사한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난 못 찾겠더라. 대원군을 찍을 때도 다음 작품이 뭘 지가 기대됐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궁금해졌어. 네 차기작이.
“제가 최근에 들었던 칭찬들 중에서도 최고의 칭찬이네요.”
감격하여 말했고.
—찬사다.
감격하여 연락한 이가 답했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들썩인다.
대중의 관심도 짜릿할 정도로 좋지만, 동료들의 응원과 칭찬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돌아서지 않을 사람들이 생기는 느낌이랄까.
······전화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야 가득히 티비가 들어온다.
잠시 울컥했던 마음이 괜스레 민망해져 툭 던졌다.
“봤어? 네 주인이 이 정도야.”
그리고 피식 웃는데,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린다.
“······.”
오늘 의외인 연락들이 많다. 이태관 배우는 전화 통화를 한 게 의외였는데, 이 사람은 개인적인 연락 자체가 신기하다.
[미국에서 승결 씨와 나눈 얘기들을 곱씹으며 마지막화를 봤는데··· 솔직히 너무 아쉽네요. 승결 씨처럼 임훈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했더라면 더 좋은 장면들이 나왔을 텐데. 그리고 연기 자체를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신승찬이었다.
[말을 두서없이 했는데, 아무튼. 미국에서 가방 사는 거 도와드리고, 그 보답으로 받은 이야기들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물끄러미 그가 보내온 톡을 보다가 진심으로 답장을 했고.
[서귀호의 눈엔 여지없는 임훈이었어요. 그러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런가요.] [다음 차기작, 기대하겠습니다.]내가 이태관 배우에게 받은 응원을 돌려주었다.
······이후로도 배우, 스태프, 홍보팀 등등 이런저런 연락들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작품이 끝나면서 모두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며 다음을 기약하고, 응원한다.
그렇게 모든 연락을 마치고서, 비로소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지만 편안했다.
그리고.
“졸리지 않네.”
말똥말똥한 눈을 굴리다가, 침대 아래 산처럼 쌓여있는 대본으로 고갤 돌렸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전부 기억난다. 하나하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오늘 본 한이연 감독의 시놉시스만큼 강렬한 느낌을 주진 못했다.
소재만 듣고 왔어도 잠 못 들었을 것은데.
시놉까지 읽어버렸으니, 잠 다 잤지.
“재밌었는데.”
아마도 극 중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 같은 강렬한 소개글과.
다음 장부터 나오는 1인칭 시점의 독특한 시놉이.
······지금 당장 전부 써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 선명했다.
······.
『아버지는 화가(畫家)였지만, 스스로 화가라 불리는 것을 꺼렸다.
본인만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까.
유명한 명화들을 똑같이 그려 파는 일을 하셨다.
아주 오래된 그림만 그렸던 덕분에 법적인 문제는 없었고, 그렇게 아버지는 간신히 우리 가족을 부양했다.
하지만 동생이 크게 아프고 나서부터, 아버지는 더이상 집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작업할 곳을 얻었다고 말하며 어딘가로 향했고, 며칠이 지나서야 실핏줄 터진 눈으로 들어오길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동생 병원비를 내고도 남을 만큼 큰돈을 가져오셨다.
모두 현금다발로.
그땐 너무 어려서,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는 더이상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큰돈을 번 아버지가 우릴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아버지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평생토록 아버질 기다리던 어머니는 희망이 꺼진 사람처럼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셨다.
동생과 번갈아 가며 병간호를 하던 중에 받게 된 의문의 우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제보였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서도 아버질 찾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진실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내기로 했다.』
#
타닥, 타다닥, 탁. 타,탁.
키보드가 타악기처럼 두들겨진다.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리고······.
아직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 진기원이 외쳤다.
⌜그래서 누구야. 누가 죽였냐고! 넌 알고 있다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우편을 보내왔던 정유화가 흥분한 진기원을 보며 끄덕인다.
⌜맞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얼른 말하라고! 내가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뭘?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뭔데. 신고라도 하려고?⌟
⌜뭐···?⌟
⌜그러면 걔네들이 잡힐 것 같아? 놈들 뒤에 어떤 대단한 사람들이 있는 줄 알고? 만에 하나 설령 잡힌다 하더라도······.⌟
정유화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난 놈들이 편하게 감옥살이하다가 쉽게 나오는 꼴 못 봐. 아버지가 자길 버린 줄 알고 원망만 하던 너와는 다르게, 난 봐버렸거든.⌟
기억의 파편에 손을 베인 것처럼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며 파르르 떨었다.
⌜놈들이 우리 아빠를······ 잔인하게 죽이는 거.⌟
⌜······.⌟
그 말에 말문이 막힌 진기원이 결국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실제로 그 말을 내뱉고, 얼굴을 구기며 키보드를 두드린 한이연 감독.
그녀가 얼마만큼 참았는지도 모를 숨을 토해내며 몸을 뒤로 기댔다.
정신없이 썼다. 시간을 보니 벌써 세 시간째···.
“가만, 세 시간?”
의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한 대여섯 시간은 쓴 것 같았다. 실제로 쓴 분량도 그만치 될 것 같았고.
“하하, 진짜 영감이라도 얻어온 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정말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쭈욱 써 내려갔다.
술에 취해서는 아니었다. 술기운은 집에 오면서 진즉에 날아갔지.
옆에 있던 물을 한잔 마시고, 자신이 쓴 대본을 훑었다.
휠을 마지막까지 내리고 나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특히나 아직 어리숙한 주인공 진기원의 캐릭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기대된다. 누가 그 얼굴을 맡게 될진 모르겠지만······.”
그 순간, 문득 서귀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대본의 주인공인 진기원과 서귀호는 조금도 닮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그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 건, 아마 서귀호가 백승결의 연기로 탄생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악의 링’이라는 드라마에 완벽히 맞아떨어졌던 캐릭터.
그런 표정을, 몸짓을,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진기원이 되어준다면?’
그런 전제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잘 해낼 것이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어렵겠지. 아니, 불가능할 거야.”
자신은 아직 입봉도 하지 못한 독립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백승결은 이미 승승장구를 하다못해, 머지않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될지도 모르는 배우.
솔직히 ‘악의 링’을 보면 볼수록 욕심이나 술자리에서도 계속 그를 보며 말했지만.
그도 생각보다 후한 반응을 보이며 시놉까지 보여달라 말했지만.
“그래도 안 되겠지······.”
이건 로미오와 줄리엣도 정신 차리라고 고갤 내저을 관계였다.
백승결의 소속사인 하람으로 유명한 감독들의 작품들이 잔뜩 모여들 텐데, 왜 자신의 작품을 선택하겠나.
하더라도 하람에서 결사반대를 할 거다.
독립영화를 찍으며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지.
하람이 그런 것에 있어서 꽤나 배우 친화적이고 자유롭다곤 하지만, 이제 급속도로 커가는 배우에게 브레이크가 걸릴만한 리스크를 만들 리가 없었다.
“아오···.”
백승결의 얼굴을 지워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모니터 선반 위에 세워둔 로봇 캐릭터 인형의 표정이 마치 ‘급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휴먼?’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더욱 열이 뻗쳤다.
결국, 노트북을 덮은 그녀가 자조 섞인 말을 읊조렸다.
“괜히 만났나.”
다시 마음을 잡고 써보려는데, 그새 영감이 달아났는지 머릿속이 백지장이다.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몇 시간 딱 지나니까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네.
“끙······.”
미치겠다.
아무래도 저주에 걸린 것 같다.
백승결의 얼굴을 하지 않은 진기원이, 더는 상상이 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