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68)
68화 미제 (1)
테이블 위에 잔이 하나 더 올라왔다.
천광윤이 웃으며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데이먼과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서, 한 모금 입에 넣는다.
매캐하면서도 달콤한 향을 음미하며 그가 물었다.
“어땠어, 한국의 촬영장은?”
그러자 데이먼이 테이블을 퉁 하고 치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정말 많이 발전했더군. 같이 온 후배 기자는 할리우드와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아쉬워했지만,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 지점이 가장 놀라웠어.”
“자네가 마지막으로 온 게 꽤 오래전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천광윤.
그의 시선이 이번엔 데이먼 앞에 놓인 노트북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던 거야?”
“방금 전 말한 후배 기자가 이번 인터뷰 초고를 보내와서. 한번 보겠나?”
안 그래도 인터뷰가 궁금했던 천광윤이 끄덕이자, 데이먼이 노트북 화면을 돌려 그에게 건넨다.
전 세계적으로 반응을 얻고 있는 ‘악의 링’에 대해 소개하는 서두.
이어지는 작감과의 인터뷰와 신승찬 배우.
그리고 백승결.
반가운 이름을 본 그가 씩 웃으며 마저 읽었다.
그리고 글에 대해 짧게 평가했다.
“즐거워 보이는군.”
데이먼이 끄덕였다. 자신이 느꼈던 것과 같았다.
이 글을 쓴 마크는 분명 즐거워하고 있었다.
“글에는 그런 것들이 묻어나니까. 즐거움. 정성. 열정··· 그리고 영감 같은 것들 말이야.”
“맞아. 대본을 보면서도 많이 느껴. 그런 건 연기가 끝난 후의 표정처럼 숨길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런 면에서 자네도 꽤 인상적인 인터뷰였던 모양이야.”
천광윤이 데이먼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짐작한 것이다.
이에 데이먼이 픽 하고 웃는다.
“인상적이었지. 자네도 겪어봤잖아. 아주 오래전이지만.”
과거, 해별이를 촬영하며 잔뜩 흥분해있던 천광윤을 떠올리는 데이먼.
천광윤도 따라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 아이, 돌아올 줄 알았어. 이후의 실패들로 ‘해별이네’에서의 연기가 마치 우연처럼 치부되었지만, 그런 건 우연으로 될 수 있는 연기가 아니거든.”
“아마 촬영장을 다녀오지 않았고, 악의 링을 보지 않았다면 자네 말에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게 말한 데이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본심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확실히 돌아올 수밖에 없겠더군. 연기력은 둘째치고 그 역할에 몰입하는 능력이 대단해 보였어. 그런 기분은 한 번 느끼면 중독될 수밖에 없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광윤이 빙그레 웃으며 동조했다.
그런 그를 보며 데이먼이 말꼬릴 올렸다.
“한 번 만나보지 그랬어? 그 아이가 연이은 실패로 사라졌을 때, 정말 많은 영감을 줬던 배우라면서 엄청 아쉬워했잖아.”
“돌아온 이상, 언젠가 보게 되겠지.”
덤덤하게 답한 천광윤이 덧붙여 말했다.
“그땐 알게 될 수도 있겠군.”
그리고 어느새 흥미로워하는 눈빛이었다.
“뭘 알게 돼?”
“왜 그렇게 연기를 했는지.”
“악의 링에서?”
“아니, ‘해별이네’ 이후의 영화들에서.”
그러자 데이먼이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갸우뚱했다.
“이유랄 게 뭐가 있겠어? 세상이 거는 기대에 무너지는 아역이 한두 명이었나. 어린아이의 멘탈은 유리나 마찬가지라 너무 누르면 깨져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그러나, 천광윤은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그 아인 유리가 아니었어.”
그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고작 10살짜리 아이가 연기를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이 감명받았던 건 놀라운 연기력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강렬했던 건 아이의 태도였다.
“오히려 너무 단단했지.”
그렇게 말한 천광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이먼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무슨 소릴 하나 싶을 거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고.
더는 설명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한 그가 분위기를 바꿔 데이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한국에 올 결심을 한 거야?”
그러자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데이먼.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조금 열정이 식은 것 같아서. 그래서 오랜만에 자네를 보고 그 열정을 좀 받고 싶었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천광윤이 뒷말을 받았다.
“이미 받아버렸군. 거 봐, 한국이 이런 나라야.”
뿌듯한 얼굴로 으스대는 천광윤을 보며 데이먼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웃던 천광윤이 건배를 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그 열정을 어디에 쏟을 건데?”
#
다음 날 아침.
늦은 밤까지 천광윤과 회포를 푼 데이먼이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시간이 조금 남아 공항 안에 있는 카페에 들러 노트북을 펼쳤다.
어제에 이어 마크의 초고를 봐주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면은 텅 비어있었다.
백지(白紙).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그곳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데이먼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가 처음 적은 건 제목이었다.
이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
[천재(Genius)]거기까지 쓰고서, 그는 또다시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첫줄을 적었다.
[오래전, 친우에게 한 아역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역 배우는 결코 나이답지 않은 연기력으로 촬영장에 있는 모두를 감탄하게 했고,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던 그 아역 배우를, 최근에 드라마 속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드라마의 이름은 ‘악의 링’. 그곳에서 소름 돋을 정도로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 챔피언 역을 맡은 배우, 백승결이 바로 그 아이였다.]“그리고 나는 후배 기자인 마크와 함께 한국에서 그를 만났다. 무려 그의 일터인 촬영장에서. 우리는 운 좋게도 그의 연기를 코앞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보게 된 그의 연기는······.”
뒷 내용을 소리내어 읽던 홍보팀 커뮤니케이션 담당 직원, 안 대리가 하하 웃으며 통역을 마무리했다.
이를 경청하던 홍보팀 직원들이 잠시 날 보다가 이내 서로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마크와의 인터뷰 내용이 USA투데이의 일면을 장식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유명 기자인 데이먼이 칼럼을 쓴 것이다.
그다음부터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완벽한 지원 사격.
그의 칼럼은 기폭제가 되어 마크와의 인터뷰 영상에도 힘을 실었다.
순식간에 조회수 500만이라는 숫자를 달성했다.
아직 내 복귀 영상(—근황 마라톤) 800만인데, 저 정도 조회수를 고작 4일 만에 이뤄낸 성적이라는 점에서 비교가 불가했다.
아무튼, 그래서였다.
홍보팀 직원들이 당황해하는 건.
“요즘은 반찬도 셀프, 물도 셀프, 다 셀프니까. 홍보도 셀프로 하시는 거예요?”
이건 좀 억울하다.
정확히는 마크와 데이먼이 해준 거지. 난 인터뷰만 했고.
아, 데이먼은 연기하는 걸 보고 칼럼을 쓰기로 결심했다 말했으니 내가 한 게 어느 정돈 맞나?
“그냥 여기 자리 하나 만들어드리죠? 스케줄 없을 땐 홍보팀 하세요. 잘하실 것 같은데.”
“이러다 대본까지 직접 구해오시면 정말 매니지먼트가 필요 없으실지도? 그게 말 그대로 1인기업이지 뭐야.”
···저 말은 깜짝 놀랐다. 대본까지 직접 구해올 예정인 걸 어떻게 아시고.
찔려서 하하 웃는데, 홍보팀장이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자, 승결 배우 그만 놀리고 얼른 우리도 일하자. 얼른 칼럼 내용 기자들한테 뿌리고 전화 돌리자고.”
“옙!”
“드가자~!”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숨죽이고 김성운을 기다리는데.
바로 앞자리.
커뮤니케이션 담당 안 대리가 칼럼 내용을 긁어 기자들이 보기 좋도록 잘라내고 있었다.
‘저분은 참 힘들겠다고 생각했었지.’
김성운이 말했듯이 이해를 포기해야 하는 다른 홍보팀 직원들과는 달리, 굉장히 평범한 느낌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녀가 일하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해당 칼럼 댓글에 들어간다.
반응도 번역해서 기자들에게 보내주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오히려 댓글을 남긴다.
외국 사이트에, 한국어로.
[퍼가요~♡]역시 사람은 끼리끼리다.
그러니 나는 여기 말고 2팀 사무실로 가야겠어.
#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반응들 때문에, 적어도 미국에선 찬찬히 멀티온 차트를 등반 중이던 ‘악의 링’이 누가 등 떠민 듯이 3위에 올라섰다.
기염을 토할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10위권 밖에서 주춤거리는 중이었으니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데이먼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던 걸까.
그가 쓴 칼럼 속에서 극찬 당한(?) ‘해별이네’가 일부 미국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15년이나 지나 빈사 상태이던 영화가 미국에서만큼은 신작?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멀티온이 움직인 것이다.
‘악의 링’이 3위에 올라선 차트 저 아래.
‘해별이네’가 들어갔다. 멀티온이 판권을 계약한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네.’
바다 건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떨어져 있어 체감은 크게 안 되지만, 드라마로서 완전히 끝난 ‘악의 링’이 상품으로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김성운은 이걸 두고 주식과 비슷하다며 웃었다.
물론 자신과는 결과가 반대라며 울적하게 말을 맺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사이 몇 차례 더 안원상 감독의 신작 촬영을 도왔다.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촬영이었다.
스륵—.
가운을 벗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와, 무슨 몸이···.”
“오히려 서귀호 때보다 더 좋아진 거 같아요. 그땐 뭐랄까······.”
“말랐었죠.”
내가 툭 말하자 스크립터가 끄덕였다.
“성나있는데 마른 느낌이었죠. 근데 지금은··· 그냥 성나셨네요.”
“그땐 막 굶기도 했는데, 이젠 마음껏 먹으니까 살도 붙어서요.”
“지금 이게 살이 붙은 거라고 하셨어요?”
기만자 소릴 듣고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촬영을 위해 사우나에 앉아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서 카메라의 붉은 빛을 보고 눈을 감았다.
액션—.
그 소리와 함께, 비좁은 사우나 안으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 이 실장으로서.
“다들 옷을 쳐 입고 왔어. 매너 없게.”
그렇게 말하며 차가운 눈으로 놈들을 훑는 순간.
놈들이 뿜는 살기만큼이나 흉흉한 흉기들이 번쩍였다.
달려드는 맨 앞 놈을 후려치고, 다음 놈의 손도끼를 손으로 받아냈다.
그 뒤에 놈의 칼이 복부를 찌른다. 그 상태로 순식간에 두 명이 더 달려들어 반대쪽까지 구멍을 냈다.
그다음부터는 처참한 난도질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남의 피가 아닌 내 피를 뒤집어썼다.
하하하···. 여러 구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웃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거기까지 말하는데, 힘이 쭉 빠진다.
“시발.”
그대로 쿵, 고꾸라져버렸다.
그리고 몇 초 뒤에 울리는 목소리.
······컷! 오케이!
연기가 끝났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 그럴 만하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일어났다. 좀비가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스태프들이 얼른 달려와 수습을 도왔다.
다행히 촬영장이 목욕탕인 만큼 몸을 닦아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서, 나는 개운한 모습으로 다시 촬영장에 돌아왔다.
다음 씬을 준비 중이던 안원상 감독이 웃으며 다가온다.
“그림 괜찮았나요?”
“상상 이상으로.”
격하게 끄덕거린 그가 덧붙여 말했다.
“내 영화 인생에서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캐스팅은 꽤 많거든. 근데 가장 적절했던 캐스팅을 고르라면 무조건 고종이었어.”
거기까지 말한 안원상 감독이 씩 웃는다.
“그런데 이번에 그 생각이 또 바뀌었네. 같은 배우한테.”
“감사합니다. 촬영이 없어도 계속 응원할게요.”
나도 빙긋 웃으며 인사하고서, 짐을 챙기러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겉옷을 입고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확인했다.
“······.”
입꼬리를 내린 내 표정은 꽤나 차가워 보였다. 여전히.
비참한 죽음을 겪은 극 중 배역, 이 실장의 기분이 아직도 끈덕지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심호흡으로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는데.
지이잉—.
자켓 주머니 속 핸드폰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별생각 없이 꺼내서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이연 감독님]그 이름을 보자마자, 겨우 진정되어가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본이 완성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