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70)
70화 미제 (3)
내가 김성운에게 대본을 건네기 며칠 전.
나는 한이연 감독에게 대본을 받아 이태관 배우에게로 향했다.
‘제가 최근 3년간 소속사가 없이 배우 일을 했었거든요. 회사 눈치 안 보고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찍었죠.’
대원군 제작발표회 때 그가 했던 말이 나를 이끌었다.
그는 흘러가듯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술자리에선 이런 이야기도 했었던 걸 나는 기억한다.
‘결국,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그가 소속사 없이 3년을 지냈던 이유였다.
그 끝에 하람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고.
그러니 내가 조언을 구하는데 이만한 사람이 없지 않나.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게 끝이 없다.
‘······아예 그가 도와준다면?’
그는 하람에 들어올 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유명세를 키우고, 배우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는 나와는 달리, 그는 이미 완성된 배우니까.
하람 입장에서도 그가 회사에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작품을 하던 문제 될 게 없는 거다.
그렇다면 조언보다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적어도 나와 한이연 감독에겐 그렇겠지.
이 영화에 나 하나 뛰어들면 회사는 회사의 입장이 있으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겠지만.
그와 함께 뛰어들면 얘기가 달라질 테니까.
문제는 어떻게 그가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게 만드냐인데······.
“좀 더 봐야겠다만, 시작은 꽤 괜찮아 보인다.”
앞부분을 살펴본 이태관 배우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얼떨결에 그의 집까지 방문하게 된 나는, 말로만 듣던 한강뷰를 바라보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태관 배우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 생각났는지 굉장히 호의적인 표정이었다.
“근데 이게 하고 싶다라······ 여러모로 넘어야 할 산이 많겠네.”
나라면 그래야겠지.
근데, 선배님은 아니잖아요?
오면서도, 그리고 와서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내가 아무리 머릴 굴려도 이 양반의 관록을 뚫고서 자연스레 작품에 합류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미 나는 그의 앞에 앉아 있고, 대본을 넘겼지.
‘안돼, 이러다 고민만 하다가 가겠네!’
그러니 아닌 척 연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솔직하게 말하자.
이런 일로 소속사까지 나왔다면, 누구보다 나를 이해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이태관 배우를 바라보았다.
과거 대원군 촬영 끝나고 회식 자리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지.
‘아무튼, 아쉽네. 고작 한 씬이라. 더 많은 씬을 맞춰보고 싶은데, 이번엔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것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저와 더 많은 씬을 맞춰보고 싶다 하셨던 거, 아직 유효하나요?”
그럴 기회가 왔다고.
#
이태관 배우가 백승결을 빤히 보았다.
누구보다 백승결을 잘 이해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소 냉담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이걸 할 수 있게 내가 도와라?”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잠시 당황하는 눈빛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빠르게 사과하는 백승결.
그 모습을 보며 이태관 배우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대원군 때와 고작 1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백승결이 꽤나 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디가 달라졌는고 하니······.
그저 어떻게 연기를 잘할까만 고민하던 그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걸 쟁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사과를 하는 와중에도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럴 시간이 없다고, 설득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건, 자신감의 반증이기도 했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어쩌면 백승결에게 배우로서 가장 필요했던 면이기도 했다.
그러니 녀석은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배우로서도, 그리고 그 외의 면에서도.
그런 푸근한 생각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대본을 톡톡 두드렸다.
“무엇보다 내가 이걸 다 읽어 본 후에도, 안 하고 싶을 수 있지 않나?”
“그럼 어쩔 수 없죠···.”
말끝을 흐리며 주억이다가 다시 이태관 배우를 바라보는 백승결.
그가 말했다.
“근데 지난번에 선배님께서 그러셨잖아요.”
“···?”
“결국,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라고.”
순간, 이태관 배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처음엔 그걸 기억하는 것에 놀랐고.
“그러니 선배님, 전 지금 전혀 다른 문젭니다.”
다음은 그 말을 한 이유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는 백승결의 눈빛에 감탄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태관 배우.
그는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백승결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녀석의 눈을 보며 놀람, 헛웃음, 감탄 따윈 모두 촛불처럼 꺼졌다.
‘심지에··· 불이 붙었구나.’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번이구나.
이번에 저 안에 있는 폭탄이 터지겠구나.
그렇다면, 대본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난 이걸 이 녀석과 함께해야겠다.
녀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
“매니지먼트 하람의 1팀장, 유진철입니다.”
“아, 예···.”
“이태관입니다.”
“알죠··· 알죠···.”
굿픽쳐스 대표실.
한이연 감독이 1팀장의 명함을 받아든 채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몸은 완전히 얼어 있어서 무슨 인사하는 기계 태엽 인형 같았다.
그녀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은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어딘가를 꼬집고 할 것도 없이 명색한 현실이었지만,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을 가지니, 자연스레 대본 하나를 더 달라던 백승결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이유를 물었다.
자신의 대본이 어디에 쓰일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는 이태관 배우에게 가려 한다고 말했다.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었다. 좋아서라기보단 황당해서.
그런 자신의 표정을 느꼈는지, 백승결이 웃으며 조언을 구하러 갈 생각이라고 덧붙였지.
그건 자신이 보기에도 좋은 생각 같았다.
게다가 그런 대단한 배우에게 대본이 들어갈 기회가 결코 흔치 않기에 좋다고 대본을 하나 더 건넸는데······.
‘그 대본이 저깄네?’
이태관 배우가 테이블 위에 대본을 올려놓는다. 제목 없는 새하얀 대본을.
‘조언만 구한 게 아닌데?’
조력자를 구해왔다. 그것도 엄청난 배우로.
미치겠다. 백승결이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꿈인가 생신가 했었는데, 이태관 배우까지 찾아오니 정신이 더욱 혼미해지는 그녀였다.
다행히도 정신을 잃기 직전에 박 대표가 들어왔다.
“하하, 이 배우 오랜만이야.”
그의 넉살 좋은 인사에 이태관 배우도 입꼬릴 올린다.
“대표님은 독립영화 느낌 나는 영화 싫다고 노래를 부르시면서, 매번 독립영화 감독들 입봉을 돕네요? 이 정도면 독립영화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좋아하긴, 무슨. 그냥 내 팔자인가 봐. 재능 있는 애들이 빌빌거리고 질질 짜면 승질이 나서.”
질질 짠다는 대목에서 한이연 감독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전화를 받고 울먹였던 흑역사가 떠오른 것이다. 사실 역사라 할 것까지 없는 최근의 일이었지만.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괜스레 자세를 고쳤다.
박 대표가 그런 한이연 감독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그리고 들고온 제작 기획서를 테이블 위에 보기 좋게 깔았다.
“그럼 저희 얘길 시작해볼까요?”
“그러시죠.”
이태관 배우와 함께 온 하람의 1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단 이걸 주셨으니 묻는 건데, 아직 투자가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순식간에 비즈니스로 전환된 분위기.
그렇게 한이연 감독의 입봉을 지원 사격하기로 한 굿픽쳐스와, 매니지먼트 하람의 이태관 배우, 그리고 1팀장이 대화를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사이에서 한이연 감독은 작품 내적인 내용에 대해 말할 때 빼곤, 줄곧 멍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어떠셨어요?”
다음날 내 스케줄을 위해 온 김성운.
내가 차에 올라타 묻자, 그가 운전대를 잡으려다 멈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네가 왜 끌렸는진 알 것 같더라. 그래서 전작도 봤지.”
오, 그렇게까지?
“‘정적’ 말하는 거죠? 그것도 재밌죠.”
“그래. 오히려 그게 내 취향이었어. 작품 좋더라고. 대사도 좋고, 연출도 좋고. 문제는 다루는 주제들이 하나같이 마이너하다는 건데······.”
“주제야 ‘악의 링’도 만만치 않았죠.”
한국에서 격투기 소재라는 건 마이너 중에 마이너 아닌가?
씩 웃자, 김성운이 헛웃음을 머금고서 말을 잇는다.
“아무튼, 그 사이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도 변화가 좀 있었나 봐. 일단 굿픽쳐스가 제작에 나섰고, 1팀장님과 이태관 배우님이 감독 만나서 미팅도 했다네.”
거기도 그렇게까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이태관 배우가 결정만 하면 그의 출연은 확정이 되는 상황.
이제부턴 내가 중요했다.
그래서, 난 어떠냐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자 김성운이 풀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판에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긴 한데······.”
김성운이 중립 기어를 풀며 다시 핸들을 잡았다.
“아직 대표님 결정이 남았으니 기다려봐.”
그렇게 나는 이틀을 더 기다렸다.
과연 매니저 출신의 하람 대표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게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궁금했다.
대본을 볼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꾹 참고 기다렸다.
물론 매일 같이 김성운을 닦달하긴 했다.
아직 결정이 안 났냐고.
그때마다 이런저런 일들로 아직이라는 말만 반복하던 김성운이 오늘은 만나자마자 먼저 얘길 꺼냈다.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그가 이어서 말했다.
“배우 둘이나 하고 싶어 하는데, 어쩌겠어요. 두 사람 막느니 그 영활 띄우는 게 낫지··· 라고.”
나름 대표의 성대모사였을까? 모르겠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한 건 이제 대표의 결재까지도 모두 받았다는 것. 내가 원하는 작품에 비로소 합류하게 된 거다.
그런 날 보며 김성운이 물었다.
“원하는 걸 얻어낸 기분이 어때?”
웃음이 나왔다. 너무 좋다 말하고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이 한 게 뭘 있냐며 민망해하는 김성운.
믿고, 대본을 읽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말하며 대본을 꺼내 들었다.
이젠 진짜 내 차기작이 된 작품!
이전에 한이연 감독에게 받았던 것과는 달리 일종의 개정판이었다.
내용이 바뀌진 않았다.
대신 본격적인 캐스팅을 위해 오타나 설정 오류 몇 개가 바로잡혔고, 마지막으로······.
[눈속임]제목이 표지에 새겨졌다.
내가 이태관 배우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그런가, 이 제목을 보면 괜히 찔린단 말이지.
옅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이미 외우기까지 한 대본이지만 오늘은 더욱 설렌다.
나는 지금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냈을 때만큼이나 큰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