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차기작의 행선지 (4)
멀티온인가, 다른 플랫폼인가.
영화인가, 드라마인가.
미국에서 돌아와서도 그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이 없었기에 마치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으로 매일 같이 정민우 대리를 괴롭혔다.
대본을 받으면 읽었고, 읽고서 다시 대본이 들어온 게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이른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이고서 김성운의 차를 탔다.
목적지는 TBS 방송국.
내가 휴가를 보내는 사이 들어왔다던 드라마 관련 미팅이 있었다.
나름 인터넷에 TBS에서 준비 중인 드라마를 검색해 봤지만, 오늘 어떤 드라마를 제안받을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
“하아암······.”
아직 시차가 적응 안 돼서 하품이 계속 나온다. 아예 하룻밤을 지새워야 하나.
몰려오는 졸음의 해결책을 떠올리다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작품에 대해선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요?”
뭐니 뭐니 해도 잠 쫓는 덴 작품 얘기지.
“미팅 잡으려고 전화하면서 슬쩍 물어봤는데, 와서 얘기 나누자고 하더라. 아, 공모전 당선작이라던데?”
그래서 검색해도 나오는 게 없었구나.
그나저나, 공모전 당선작이라니.
그 깐깐한 PD들의 안목을 모두 거친 대본이라는 생각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윽고 도착한 TBS 방송국.
부장실로 안내받은 우리는 그곳에서 2, 30여 분을 더 기다렸다.
내가 웬만해선 잠투정을 안 부리는데, 이건 좀 억울하다. 20분 더 잘걸.
그때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섰다.
3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온다.
“늦어서 미안해요. 회의가 길어져서. TBS 드라마국 윤상희 부장이에요.”
그녀의 당찬 인사에 김성운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입을 열자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백 배우님이야 모르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얼른 앉으세요. 배우님 오래 서 계시게 하면 나 국장님한테 혼나요. 어딜 감히 쌍천만 배우를 세워두냐고.”
그녀가 다리를 꼬며 소파에 앉았다. 덩달아 우리도 자리에 착석했다.
“요새 작품 엄청 많이 들어오죠?”
“그 정돈 아닌 것 같아요.”
“에이, 그게 아니라 성에 차는 게 없는 거 아녜요?”
사실상 정곡이라 옅게 미소를 짓자, 그녀도 씩 웃으며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올려진 종이 뭉치들을 뒤적거렸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대본은 많이 들어오는데 쓸만한 건 몇 개 없어.”
그러더니 가장 얇은 대본을 집어 부채질을 시작한다.
“그래서 젊은 피들 수혈 좀 받으려고 공모전을 열었는데 이쪽이 은근 노다지더라고요. 신선한 맛이 있달까. 괜찮은 작품이 꽤 들어왔어. 그리고 그중에서도 다른 부장님들까지 탐내던 게 바로······ 이거.”
그가 대본이 잔뜩 쌓인··· 흡사 무덤을 연상케 하는 곳에서 쑥 빼낸 대본을 건넸다.
[나에게 기대>“제목부터 느낌이 오지 않아요? 여기서 기대라는 건 정말 기댄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게 바라는 그 기대를 의미하기도 해요. 대본을 보면 알겠지만 장르는 격정 멜로. 풋풋한 어린 애들의 사랑이 아닌, 진정한 어른들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죠. 어때요? 소재 괜찮죠?”
내가 얼떨결에 끄덕거리자, 그녀가 더욱 신이나 떠들었다.
“역시 백 배우가 감이 좋은 거 같아. 지금까지 연거푸 작품들이 성공하고 있잖아요? 그게 다 감이거든, 감. 이 바닥에선 ‘운’, 그리고 ‘감’ 좋은 놈 못 이긴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니까?”
갑자기 칭찬을 쏟아낸 그녀가 이어서 [나에게 기대>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쏟아냈다.
쭉 듣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고서 답했다.
“확실히, 재밌을 것 같네요.”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악의 링’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끌리기도 했고.
장르 자체가 그동안 내가 하지 않았던 장르다 보니 호기심이 생긴달까.
자연스레 얼른 대본이 보고 싶어진다.
보통 소재만 들었는데도 끌리는 건, 대본을 보면 더 빠져들더라고.
그게 윤상희 부장이 말하는 감이라는 건지, 운이라고 불리는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재만 좋은 게 아녜요. 이거 지금 우리 쪽에서 여주인공으로 염두에 둔 배우가······ 아, 잠시만요?”
갑자기 요란스레 울리는 벨소리에 그녀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작가님. 네. 네. 아······ 대본이요?”
꽤 놀란 듯 말꼬릴 확 올린 윤상희 부장이 이내 팍 식어버린 말투로 답했다.
“뭐, 한 번 보내보세요. 네. 지금 미팅 중이라 읽고 연락드릴게요.”
미적지근하게 전화를 끊고서,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다.
“갑자기? 이 양반이 돈이 떨어졌나. 아닌데. 건물도 샀다고 들었는데···.”
홀로 의아해하던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느끼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 하하. 아는 작가님한테 연락이 와서. 아 김 팀장님은 나이가 좀 있으시니 알겠네요. 김미옥 작가라고. “
그 작가는 나도 안다. 나이는 적지만 기억하는 게 많아서.
어쨌든, 김성운에게 콕 집어 말했으니 끼어들기도 뭐해서 그냥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알죠. 옛날에 엄청나셨잖아요.”
“그쵸. 옛날에. 다른 말로 왕년이라고도 하죠. 호호.”
끄덕거린 윤상희 부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제가 PD할 때 작가님 드라마 세 개 정도 연출했었거든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몰랐네.
“오, 팀장님 역시 센스가 있으신 분이네. 보통은 모르거든요. 피디가 누군지 따윈. 드라마가 원래 작가놀음이라고, 고생은 다 같이 했는데, 공은 다 작가님이 가져가셔. 씁쓸하다, 씁쓸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윤상희 부장의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다 나이가 드시니까 확실히 글빨이 떨어지더라고. 장사 없지. 머리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 머리가 삐그덕 거리니까. 근데 이제 와서 뭘 또 쓰셨다네? 그렇게 연거푸 망하고 10년 정도 아무것도 안 쓰셨으면 그냥 편히 사실만도 한데. 돈도 많으신 양반이.”
이야기가 뒤로 돌다 못해 뒷담을 타고 넘어가자, 김성운의 반응이 고장 났다.
“아니, 솔직히 언제적 김미옥이에요. 그쵸? 이제 와서 내가 글을 좀 써봤는데··· 하면 내가 뭐 넙죽 받아줄 줄 알았나?”
날 아직도 쫄병으로 보는 거야 뭐야.
날카롭게 중얼거린 그녀가 씁쓸한 마음을 다 쏟아냈는지, 어느새 상쾌한 얼굴로 우릴 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튼, 어디까지 했죠?”
#
“나야말로 씁쓸하네.”
방송국을 나서는데 김성운이 중얼거렸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정답 맞히듯 물었다.
“김미옥 작가님이요?”
“응. 옛날에 그분 작품들 정말 재밌게 봤거든. 작품이 그렇게 많은데도 거의 다 인생 드라마라고 부를 만큼 좋았는데 말이지.”
“저도요. 어렸을 때 재밌게 봤었어요.”
“이야, 그게 기억이······ 나겠지.”
“네, 아주 잘요.”
씩 웃으며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이 보이지 않게 된 작가였다.
아까 윤상희 부장이 말했듯 여러 작품이 망하고, 10년이나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하니 안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그럼 그것도 봤어? ‘포화의 시대’?”
“봤어요. 그땐 정말 어렸었는데도 애니매이션보다 그걸 더 기다리며 봤었는데.”
“그게 어린애가 볼만한 드라마였나?”
음.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이름부터가 ‘포화의 시대’인데 노는 게 제일 좋을 나이의 어린애가 흥미로워할 스토리는 아니었지.
그때부터 난 배우가 될 운명이었을지도?
“어쨌든, 안타깝네. 여러번의 실패 이후로 아예 펜을 놓으신 분이 돌아온다는데, 저런 취급이라니.”
헛헛한 목소리로 말한 김성운이 이어서 덧붙였다.
“뭐, 근데 윤상희 부장이 말을 나쁘게 하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했어. 지금 그분 나이가 60대일 텐데. 10년을 쉬다가 이제 와서 드라마를 쓴다? 쉽지 않지.”
“그럴 것 같긴 해요.”
내가 동조하자 그는 괜히 센치해졌다며 풀풀 웃어 보였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래도 드라마를 워낙 재밌게 봐서 그런가. 아니면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어서 그런가. 복귀를 응원하고 싶네.”
그것도 동감이었다.
복귀라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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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자마자 대본부터 펼쳤다.
적응하기도 전에 미국을 다녀와 여전히 어색한 집이었지만, 대본을 펼치니 그런 기분마저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현태 형이 틈틈이 찍으라면서 두고 간 카메라는 여전히 거슬렸다.
20여 분 정도 찍다가 끄고서 읽었다.
다음날. 집으로 찾아온 김성운이 당연히 내가 대본을 다 읽었을 거라 생각하는지 툭 물었다.
“어떤 거 같아?”
물론 정답이었다. 다 읽었다. 단숨에.
“재밌어요.”
“그래?”
“네. 근데··· 소재에 비해 막상 대본은 좀 심심한 느낌이 있어요.”
“대본이 소재를 못 따라간다?”
“장면마다 편차가 심해요. 어떤 장면은 정말 감탄이 나오는데, 또 어떤 장면에선 이게 굳이 왜 있는지 모르겠고. 유치해지기도 하고. 어른의 멜로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글빨이란 게 계속 폼이 유지될 순 없지. 그러니 드라마작가들이 매번 용두사미라고 욕먹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그걸 납득하면서도 내가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짓자, 김성운이 팔짱을 끼며 고민에 동참했다.
“‘눈속임’이 10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건 몇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음··· 7정도요.”
“‘악의 링’은 몇이었어?”
“단순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9, 10은 됐던 것 같아요.”
“흐음, 그럼 애매하긴 하네.”
주억거리며 말끝을 늘리는 김성운.
내가 새삼스레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제 감을 믿으시는 거예요?”
“‘악의 링’이야 박혜정 작가라는 거물급 작가가 붙었으니 그렇다 쳐도, ‘눈속임’은 진짜로 네 감이었으니까.”
한이연 감독이 술에 취해 폭로한 덕분에 나는 김성운에게 많은 얘길 했어야 했다.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 이태관 배우에게 도움을 청한 것까지.
모든 설계를 듣고 어처구니 없어하던 김성운이었지만, 막상 ‘눈속임’이 천만을 훌쩍 넘긴 성적으로 마무리되자 내 감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로 했나 보다.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다음 목표.”
김성운이 으쓱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랬지. 해별이 뛰어넘기, 그다음 목표를 정했고.
그걸 김성운에게 말했었지.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내 말에 씩 웃은 김성운이 되물었다.
“그럼 일단 이번 것도 보류로?”
“네.”
결국,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대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온 거다.
“대본 들어오는 대로 전달할게.”
김성운의 말에 끄덕이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카메라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거 찍는 중이었어?”
“저도 방금 알았어요. 이거 은근 귀찮아 죽겠어요.”
“영상이란 게 언젠가 다 쓸모 있으니까 잘 찍어둬.”
“그래도 그 수영장 영상은 좀 지워주세요.”
“에이, 그건 안 되지. 팬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당한 몰카에 대해 항의하자, 김성운이 배 째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그거 내가 지우는 게 의미가 없어.”
“왜요?”
“이미 현태한테 넘겼어.”
“그새 거래처가 느셨네요.”
“그렇지. 사진은 홍보팀에, 영상은 현태한테.”
“······.”
역시 둘을 만나게 하는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