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차기작의 행선지 (6)
어느새 상다리 부러지게 가득 찬 음식들을 앞에 두고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술 마실 사람들은 가벼운 샴페인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물로 잔을 부딪쳤다.
“작가님, 다시 한번 작업실 오픈 축하드립니다!”
“야, 이강현. 작업실이 무슨 음식점이냐?”
음식이 들어가고, 어느 정도 허기가 달아나자 수다가 찾아왔다.
늘 그렇듯 이강현과 최지연이 투덕거렸고.
두 배우의 시트콤(?)을 보며 웃다 보니 어색했던 분위기도 풀어졌다.
점차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그러는 과정에서 서은영 작가의 동료 작가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길 주고 받았다.
이어서 김미옥 작가와도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오늘 너무 반가워요. 정말 팬이에요.”
그녀의 가벼운 인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이도 나이지만, 어렸을 적 좋아했던 드라마들의 작가라는 점이 더욱 컸다.
10대 후반부터 20대 때까지 박혜정 작가의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10대 초, 중반.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엔 김미옥 작가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도리어 그녀가 내게 말했다.
“배우님 나온 거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봤어요.”
“저돕니다.”
얼른 대답하자 그녀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내껄··· 봤어요? 백승결 배우 나이가 몇 살이에요?”
“스물 일곱입니다.”
“그러면 내가 마지막으로 한 드라마도 15살 때 본 건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보다 드라마를 좋아했거든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게다가 공백기도 중간 중간 텀이 길어서 전전작부턴 기억도 안 나겠어요.”
“아녜요. 다 기억합니다. 제가 기억력도 좀 좋거든요.”
눈을 끔뻑이는 김미옥 작가.
그러자 옆에서 최지연이 끄덕거렸다.
“진짜 좋긴하지.”
이강현도 끼어들었다.
“맞아요. 미쳤어요. 얼마 전에 형이 저랑 같은 동네로 이사 오셨는데, 2년도 더 전에 대리 부르면서 말했던 집 주소를 기억하더라니까요?”
“맞네. 룸 6에서 백승결 배우 기억력, 무지 화제였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랬지!”
덧붙여지는 작가의 말들.
이에 서은영 작가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한 번 검증의 시간 갈까요? 당시 선생님 작품에 조금이나마 일조했던 제가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 ‘기억하나요’의 주인공! 의 동생! 의 남자친구의 직업은!”
“소설가요. 그리고 밤에는 룸싸롱 웨이터였죠.”
고민할 것도 없이 간단히 맞혀버렸다.
어느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미옥 작가.
“작가님 작품엔 꼭 소설가가 나오잖아요.”
“마, 맞아요.”
“그래서 그땐 제 꿈도 소설가였거든요. 바로 다음 해에 해별이네를 찍으면서 배우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학교에서 장래희망에 뭐라고 적었는 줄 아세요?”
“설마. 안 돼, 이거 너무 클리셰야···.”
김미옥 작가가 애타는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하지만 클리셰가 왜 클리셰인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 이만 말을 줄였다.
그러자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때 혹시 나이가···.”
“그땐 아홉 살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가 아홉 살짜리 애한테 무슨 짓을···.”
그녀가 좌절했고, 모두가 빵 터졌다.
그밖에도 여러 작품들 이야기가 이어졌다.
김미옥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 공간의 주인인 서은영 작가와 그 밖의 작가들의 작품까지도.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농담 섞인 말들도 오갔다.
하지만 이들이 누군가.
작품을 내 새끼라고 말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가들 아닌가.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쳐지고, 쳐지다 보니 깊어지며···.
작가들이 하나둘 고충을 토로했다.
그런 와중에도 김미옥 작가는 그저 듣는 위치에 있었다.
모든 말들을 자신의 얘기인 양 진지하게 듣고, 아주 조심스럽게 조언한다.
저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같은 작가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고민은 꺼내지 못하는 걸까?
잠자코 지켜보다가 나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가님은 새로 작품 안 내세요?”
“나 말이에요?”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간 김미옥 작가가 이내 픽 하고 웃는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누가 바란다고.”
분명 장난처럼 웃고 있는데, 내가 TBS에서 본 사전 지식이 있어서일까.
당혹스러울 정도로 서글픈 마음이 전해져 말문이 턱 막혔다.
이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아따맘마보다 ‘기억하나요’, ‘포화의 시대’가 더 좋았던 9살짜리 꼬마라면, 바랄 수도 있잖아요.”
“그 꼬마가 혹시 쌍천만배우면 영광이긴 하겠네요.”
“방금 제가 그 영광을 드렸으니, 차기작 소식 좀 알려주세요.”
곧바로 받아치자 그녀가 천천히 입꼬릴 올렸다.
“백승결 배우, 배우가 아니라 소설가 해도 잘했겠어요. 말맛이 있네.”
그러더니 어느새 주목하고 있는 좌중을 훑으며 말했다.
“마침 쓰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떤 내용인지 여쭤봐도 돼요?”
“그럼요. 뭘 대단한 거라고 꽁꽁 숨기겠어요. 관 가지고 들어갈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
잔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서은영 작가가 얼른 샴페인을 채웠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며 김미옥 작가가 말했다.
“제목은 ‘악역’이에요. 제목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밝힌 것처럼 주인공은 깡패에 경박하기까지 한 인사예요. 사람들이 ‘악역’으로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그리고 난, 그가 왜 그런 길을 자처했는지 풀어냈어요. 물론 옹호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그냥 그의 사연을 푸는 거예요. 그의 역할은 정말 그를 대변하는 것일지.”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샴페인을 마시며 미소지었다.
“너무 무겁죠?”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이야길 들은 내 몸이 그대로 쑥 딸려갈 것만 같았다.
이건, 단순히 끌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혹시 대본 볼 수 있을까요?”
#
김미옥 작가가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서은영이 얼른 프린터를 켜더니 그녀의 대본을 인쇄했다.
그 사이, 술잔을 제외한 모든 음식들이 치워졌다.
순식간에 각자의 앞에 대본이 놓였다.
두 사람 다 자주 해본 솜씨였다.
“예전엔 이런 식으로 다른 작가님들이나 PD님들 모셔서 일종의 대본 시사회 같은 걸 했었거든요.”
서은영 작가가 새끼 작가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끄덕이며 대본을 집어 들었다.
1화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좋았다.
매번 얼른 들고 가서 읽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읽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악역>제목을 보며 표지를 넘겼다.
시락. 사락.
작업실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심지어 김미옥 작가마저도 자신이 쓴 대본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넘기는 것에 맞춰, 천천히.
“······.”
몇 장이 안 되는 터라 금세 다 읽어버렸다.
감질난다. 더 보고 싶었다.
빠르게 활자를 해독한 내 눈이 야속할 정도로.
동시에 의아해졌다.
내게 ‘감’과 ‘운’에 대해 말했던 TBS 윤상희 부장이 떠올랐다.
김미옥 작가의 험담을 늘어놓던 그녀는 이런 대작이 올 줄 알았을까?
지금은 읽었겠지? 그러면 당연히 덥석 물었을 거고.
그러면 공모전 당선작 말고 이거에 넣어달라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때 내 뒤를 이어 표지를 덮은 서은영 작가 말했다.
“선생님. 얼마 안 되는 분량이긴 하지만, 전 이거 좋아요. 선생님을 꽤 오랫동안 봐온 사람으로서. 솔직히 선생님의 작품들 중 최고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내 생각이 그거라니까?
“근데, 이거 방송국엔 보내셨어요?”
“응. TBS에. 10년 전까지 쭉 거기서 했으니까. 상희도 거기 있고.”
“그래서, 뭐래요?”
“힘들대.”
순간 왜요? 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뻔했다.
그만큼 이해가 안 갔다.
이게 왜? 이걸 왜?
반면 서은영 작가는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너무 좋다며 감탄을 하던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
“이거 앞으로 멜로는 있어요?”
“거의 없다시피 할 거야. 여러모로 지상파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지?”
“케이블로 보내는 건 어떠세요?”
“안 그래도 그 고민을 하고 있긴 한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걸 TBS가 거절했다니.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거 놓치기 싫다.
어디 케이블에 넣을지 물어봐야 하나?
“모르겠어. 이 나이 먹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이건 또 예상 밖의 전개인데.
“선생님, 저희가 이거 좋다고 하는 건 진심이에요.”
“알지. 알아. 근데···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꼭 대중들에게도 좋으리란 법은 없더라고.”
작가님, 그 대중 여깄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 간다.
그렇게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만 전화 통화 좀 하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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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겁고 멜로도 없는 누아르 물에 꽂혔다?
“꽂혔어요.”
—그리고 그걸 멀티온에 가져가고 싶고?
“그래 볼까 해요.”
—그래서 댄에게 전화를 해보겠다?
“국제전화 많이 비싼가요?”
마지막 질문에 김성운이 피식 웃었다.
일단 김성운 입장에선 나름 심각한 얘기가 될 것 같아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푸쉬를 하려는데, 그가 다시 방어구를 두른다.
—널 믿겠다고 했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김미옥 작가님은.
고민이 많아진 목소리였다.
그것도 솔직히 이해가 갔다.
김미옥 작가는 TBS 미팅이 끝나고 본인이 직접 복귀가 힘들 거라 말했던 작가였다.
그런 생각이 확고한 그에겐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닐 터.
김성운의 고민이 길어지자 내가 말했다.
“미국에서 제가 새로운 목표를 말했을 때, 팀장님이 그걸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 얘기해주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때 분명, 미국에서 만난 김성운과 일 얘기를 하다가 그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쉬는 동안 목표는 정했어? 해별이를 뛰어넘겠다···. 그 다음 목표 말이야.’
나는 정했다고 답했었고, 그게 뭐냐고 묻기에 말했지.
해별이를 뛰어넘었으니.
이젠 해별이가 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고 싶다고.
내가 날 믿는 것.
‘그게 제 다음 목표예요. 너무 뜬 구름 잡는 소리 같나요?’
‘전혀. 아, 잡기 어려워서 구름이란 비유를 든 거면 어느 정도 맞긴 하겠다. 자기 확신. 그거 연예인들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가장 없는 거기도 하잖아. 매일 일희일비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곳이니까. 스스로를 믿기가 힘들지. 그러니 내 생각은 이거야.’
자신의 생각을 쭉 늘어놓던 김성운이 말했다.
‘멋진 목표네.’
그 대답이 고마워 씩 웃었다. 그리고 덧붙여 물었었다.
‘근데, 그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요? 제가 몇 개의 작품을 연달아 성공시키고, 쌍천만 배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태관 선배님처럼 ‘눈속임’같은 작품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건 아직 어렵잖아요.’
‘음······ 아무래도 그렇지.’
‘왜일까요? 무슨 차이가 있어서.’
지금 나에겐 여전히 없지만.
이태관 배우에겐 있는 것.
그때, 그것에 대해 김성운은 지금처럼 답했었다.
—꾸준함.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근데, 그걸 보여주려면 더더욱 성공할 법한 작품만 해야 하는 거 아냐?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네, 그러려고요.”
지금 내 옆엔 이름값 높은 박혜정 작가도,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이태관 배우도 없다.
오로지 내 ‘감’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팀장님께 얘기하는 거예요.”
—···?
“성공할 작품,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