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Actor is Back RAW novel - Chapter (98)
98화 여긴 이기고 지는 게 없어 (1)
백승결의 브이로그를 통해 대중들이 그의 차기작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을 무렵.
댄의 손에도 김미옥 작가의 ‘악역’ 대본이 들어왔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대본들과 마주했다.
백승결과 어울리는 대본을 찾기 위해 모아둔 대본들이었다.
그러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그는 백승결이 대본 하나를 콕 집어 가져온 것에 허탈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악의 링으로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고, 이번엔 눈속임이라는 영화로 한국을 뒤흔들었던 배우.
그런 그의 선택이 궁금해서였다.
‘대본을 직접 구해서 대뜸 전화까지 할 줄이야. 그런 성격이었나?’
댄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이미지였던 백승결을 떠올렸다.
‘눈속임’마저도 백승결이 메이드해 끌어올린 작품이란 걸 모르는 댄으로선 의외였다.
그래서 더욱 이 대본이 궁금했고.
사락—.
자리에 앉은 댄이 곧장 ‘악역’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의 눈과 손은 단숨에 대본을 훑었다.
극의 분위기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듯했다.
한 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집어 삼켜질 것 같은 늪과도 같았다.
그리고.
“재밌네.”
이 말이 정말 이 작품에 어울리는가에 대해선 댄도 단정하기 어려웠다.
읽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 극이 과연 ‘재밌다’는 순진한 표현으로 해석 가능할까.
하지만 대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모두 걷어내고 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정말 재밌는 대본을 본 직후의 자신과 다를 게 없었다.
“다음이··· 보고 싶네.”
그가 전해 받은 건 3회분.
극의 느낌을 파악하기엔 충분했지만, 독자로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분량이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팀원들도 ‘악역’의 대본을 읽고 있었다. 몇몇은 자신처럼 다 읽고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거나.
그런 이들과 눈이 마주친 댄이 물었다.
“어때?”
“지극히··· 한국적이네요.”
그다지 좋은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 그들에게만 먹힐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한국 진출을 앞두고 ‘악의 링’을 메이드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의 테이스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지극히 그쪽이었다.
“우리야 좋아하는 느낌이지만······ 전세계를 겨냥하기엔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확실히 너무 무겁고 딥해요. 대사도 너무 적고···.”
“중간중간 웃긴 농담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것조차 찝찝할 정도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묘하네요.”
이어지는 직원들의 평가에 댄이 답했다.
“하늘을 날지도 않고, 차를 번쩍 들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겨서 세상을 구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
모두가 끄덕거린다.
거기에 댄이 덧붙여 물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나?”
위아래로 흔들리던 머리들이 멈칫했다.
그리고 댄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이번엔 좌우로 흔들렸다.
“아뇨. 재밌어요.”
“재미는 확실해요. 솔직히··· 울컥하는 부분도 꽤 많았고요.”
“작가의 특성인지 능력인진 모르겠지만, 뻔한 이야길 뻔하지 않게 풀어가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심지어 한국인이 아니라면 신선한 면도 꽤 많지 않을까 하는······.”
어디까지나 이번 프로젝트는 ‘악의 링’과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작가가 아닌 배우를 먼저 선정한 것도.
그리고 한국 시장만을 노리는 게 아닌, 애초에 전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것도.
“한국적인 게 신선할 수 있다?”
몇몇 직원들이 이에 동의하는지 끄덕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승결이 여기 주인공 역할을 하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해요.”
모든 얘기를 종합하면, 이 대본을 채택하면 안 되는 이유와 가능성이 반반이었다.
그리고 댄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문제는 오히려 의견이 한쪽에 치우쳤을 때 발생한다는 것을.
‘호불호는 성공에 꼭 필요한 양념이지.’
영국의 ‘체리콕’이 그랬고, 한국의 ‘악의 링’이 그랬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많은 작품들이 머리를 갸웃하게 하는 치명적인 단점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끄덕이게 하는 무언가가 항상 있었다.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 백승결에서 시작된 백승결에 의한 프로젝트잖나.
그런 백승결이 기대되는 역할이라면······.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 만하겠네.”
끄덕거린 댄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미팅 잡자. 이 작품을 가져온 우리의 첫 단추 얘기도 들어봐야지. 작품을 쓴 작가의 생각도 들어보고.”
#
오전이 지나가기 전, 나는 김미옥 작가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소유한 건물 가장 꼭대기 층에 만들어진 작업실은 일단 감탄부터 나왔다.
“너무 좋은데요?”
그리 크진 않았지만 탁 트인 전경 덕분인지 답답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글쓰기에 최적의 장소 같달까.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작업실을 구경하다가 시간 맞춰 테이블 앞에 앉았다.
화면에 댄의 얼굴이 떠올랐다.
갈색 소파에 앉아 우릴 바라보는 댄.
그는 사무실이 아닌 집이었다.
—반갑습니다.
그의 인사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이야길 시작했다.
다행히 김미옥 작가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어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다. 10년의 공백기 동안 2, 3년 정도를 미국에서 살았다지.
어쨌든,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들로 대화를 채웠다.
김미옥 작가의 큐레이션이랄까.
그렇게 ‘악역’에 대한 소개를 마친 그녀.
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충분히 좋은 작품인 거 알겠습니다. 사실 대본만으로도 그건 알 수 있었죠. 작품성도 뛰어나요. 만약 이게 영화고,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다면 좋은 반응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칭찬의 꼬리를 잡고 진짜 본론이 딸려 올라왔다.
—하지만, OTT 플랫폼의 드라마로서. 이 작품이 대중들에게 어떤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까요? 아시겠지만, 작품성과 흥행은 서로를 밀어내는 경우가 더 많잖아요.”
“······.”
작품에 관해선 청산유수였던 김미옥 작가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에게 ‘악역’은 흥행보다 인정을 위한 작품이기에.
아직 자신도 좋은 글을 쓸 능력이 된다는 반론이기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증명이기에.
세일즈적인 측면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이 작품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설득해야 했기에.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떨 땐 작품성이 흥행을 끌고 오는 경우도 있잖아요.”
—’악역’이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거든요.”
—이런 갱의 이야기가요? 아니면 내가 보지 못한 후반부에 멜로가 나오나요? 아니면, 슈퍼파워?
“아뇨.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사랑 이야기는 한 줄도 할애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초월적인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거예요.”
김미옥 작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에, 나는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듯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 뭐가 남았습니까?
“세상만큼, 어쩌면 세상보다 더 중요한 걸 구하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세상보다 더 중요한 걸 구한다?
되묻는 댄에게 내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이야기요.”
댄의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멈췄다.
“자기 구원. 그것만큼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게 있을까요?”
확신이 있었다.
멜로보다, 슈퍼파워보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건 스스로의 역사를 바로잡는 거라고.
그러니 많은 이들이 ‘회귀’라는 키워드에 열광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나조차도 그것을 원해서, 이곳에 돌아왔으니.
이것도 회귀라면 회귀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김미옥 작가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렇죠?”
내가 확인하듯 되물었고.
“작가보다 더 작가 같았어요, 방금.”
“제가 배우라 연기는 잘해서요.”
능청맞게 답하자 그녀가 크게 웃었다.
화면 너머 댄의 웃음소리도 넘어온다.
그리고 30여 분.
이제 다시 김미옥 작가의 차례였다.
그녀는 댄과 작품에 대한 이야길 한층 더 깊게 나눴다.
지금까진 ‘너네 어떻게 할래?’의 느낌이었다면, 이젠 ‘우리 어떻게 할까?’의 뉘앙스랄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는,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며칠 후, 한 번의 화상 통화가 더 있었고.
수많은 이메일이 오고갔다.
원래 계획이었던 16부작을 호흡을 위해 8부작으로 줄이고.
사전 제작으로 한 번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악역’의 제작이 확정되었다.
#
“원하는 대로 됐는데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러게. 고민 하나를 넘기니 또 다음 고민이 굴러들어왔다.
사실 심각한 정도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지금 하는 고민은 배우로서 당연한 거라 기껍기까지 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배우다운 고민이라고 할 수 있지.
“오태구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생각 중이에요.”
‘악역’의 주인공 오태구.
김미옥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표면적으론 ‘경박스러운 깡패’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당연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느낌의 캐릭터였고, 직업이었다.
“경박함이야 현태 형이라는 1타 강사가 있긴 한데···.”
내 말에 키득거리는 김성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성격에 대한 레퍼런스는 참고할 자료가 많았다.
그게 기존 드라마들에서든, 내 기억 속에서든.
하지만······.
“제가 깡패나 이런 쪽은 전혀 몰라서.”
이쪽은 조금 애매했다.
오태구가 평범한 깡패라기엔 거리가 있어서였다.
기존 미디어에 노출된 전형적인 깡패와는 다른 면이 많아 여러 궁금증들이 생겼다.
진짜 이런 일을 했었던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궁금증 말이다.
“인쇄소엔 그쪽 일했던 분 없나?”
“그분들 그런 분들 아녜요.”
“하긴. 내가 너무 편견에···.”
“더한 분들이지.”
성격만큼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분야가 완전 다르니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터.
설령 전직이 있다 해도 너무 과거 얘기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자, 김성운이 설마 하는 눈으로 물었다.
“너 막 조직에 들어가는 법 검색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
“맞네, 맞아. 격투기 소재로 드라마 찍을 땐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하질 않나. 아주 대통령 역할 맡으면 청와대 가겠어.”
“그건 가능해요?”
결국, 학을 뗀 김성운이 돌아앉았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팀장님은 혹시 아는 깡패 없으세요?”
“있겠냐.”
“팀장님에 대한 소문만 들으면 있을 법도 한데.”
소문 얘기가 나오자 다시 몸을 돌리는 김성운.
그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야, 내가 이걸로 유명했냐. 그냥 성격 지랄 맞은 거로 유명했지.”
제 입으로 소문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는 김성운을 보며 웃었다.
당했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김성운을 보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머리가 안 굴러가니 체육관에 가서 몸이라도 좀 굴릴까 해서.
“어떻게 해야 진짜 깡패가 될 수 있으려나.”
“거, 워딩이 참······.”
무슨 장래희망 말하듯 하는 나를 보며 김성운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대 섞인 눈을 빛냈다.
“그래도 이번 드라마, 다른 걸 다 떠나서 네 역할만으로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긴 해.”
“···?”
“경박스러운 깡패 백승결이라니, 이걸 어떻게 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