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grandson of the loan shark king RAW novel - Chapter (275)
사채왕의 천재손자-275화(275/840)
<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
#275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대기업 회장들이 서로를 믿을 리 없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 혼인을 이용해 가족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그룹의 회사를 하나라도 더 가져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 재벌들이었다.
서용건 회장의 제안은 이상적일 뿐,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왕회장님의 혜안이라면 다들 믿을 수 있지요. 여기 계신 여러 회장님들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람 참. 괜히 금칠 하기는.”
너스레를 떤 송영주는 마주 보고 앉은 서용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용건은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서용건 회장의 제안도 좋지. 아주 이상적이야. 하지만 다들 솔직해지자고. 우리가 언제부터 다른 회장들을 믿었나?”
송영주의 솔직한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회장들이 숨을 들이켰다.
당장 외환 위기 당시, 줄도산하는 다른 재벌의 계열사를 하나라도 더 헐값에 인수하기 위해 서로를 저격했던 재벌이었다.
“믿을 수 있어? 자네들 핵심 계열사 지분을 다른 재벌 손에 맡겨 놓고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냐는 말이야.”
“······.”
회의실에 모인 모든 재벌 회장들 중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먼저 제안한 서용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그룹이라는 거대한 왕국을 만들기 위해 무너뜨린 기업이 몇 개인지, 빼앗은 기업이 몇 개인지 도저히 셀 수도 없었다.
“더 쉬운 방법이 있다네. 내가 알려 주는 방법을 쓰면 회사의 체질 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네. 이번 법안이 우리에게도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란 걸 자네들도 인지해야지.”
“대체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문성학 회장이 다른 회장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대표로 물었다.
너털웃음을 흘린 송영주 회장이 자리에 앉아 있는 회장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핀 뒤 입을 열었다.
“그 계열사 지분을 담보로 돈을 융통해 주겠네.”
“네? 그런 돈이 대현에 있습니까? 대현도 당장 자금줄이 막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운 송영주 회장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회장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김무혁 사장을 알겠지? 모를 리가 없지.”
김무혁의 이름이 송영주의 입에서 거론되었다. 그 순간, 서용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김무혁 사장이라면, 천태산 회장님의 후계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송영주 회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금융에서 자네들에게 자금을 융통해 줄 거야.”
“금융 당국의 감시 때문에 쉽사리 대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태산금융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들은 그저 돈을 빌리고, 그 돈으로 지배 구조 개편을 빠르게 진행하면 되네.”
“흐음······.”
송영주 회장에게 우호적이었던 문성학도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더 이상 대출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서용건의 제안을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자연스럽게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에 모인 다른 재벌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서용건 회장만 제외하고 말이다.
서용건이 헛기침하며 조항석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받은 조항석이 손을 들어 말했다.
“김무혁 사장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 사람이 지금 일성그룹에 하는 행동을 본다면 믿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재벌들도 김무혁과 서용건의 싸움을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재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김무혁의 사람인 몇몇 회장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용건은 어찌 됐든 같은 재벌 회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고작 사채업자 출신에게 흔들리는 것은 그들에게도 큰 이슈였다. 그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회장들에게는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여기 있는 중우그룹 김병우 회장한테 물어보면 되겠구먼. 자네 생각은 어때?”
재계 순위 30위 안에서 소유주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김병우뿐이었다.
송 회장은 그런 김병우에게 물음을 던졌다. 김병우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김무혁 사장님 말씀이십니까? 절대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 계신 많은 회장님도 그분이 들고 있는 각 계열사 지분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마음만 먹으면 일성보다 더 쉽게 회장님들의 회사를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무혁 사장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크흠······.”
김병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태산이 물려준 주식은 물론, 김무혁이 외환 위기와 IT버블의 하락장에서 우량 기업들의 지분을 대량으로 사들인 것은 이미 유명했다.
“저는 단 한 번도 회사 경영에 김무혁 사장님의 간섭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사주 입장에서 큰 인수 합병이나 몇 년간의 청사진을 그려주시긴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로만 해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장 일본의 일등 반도체 회사를 중우가 인수한 건 알고 계시지요? 앞에 계신 일성그룹 서 회장님이 사활을 거신 그 일을, 김무혁 사장님은 손쉽게 가져왔습니다.”
“이보게, 김 회장.”
서용건이 자신을 들먹이는 김병우를 불편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김병우는 그런 서용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게 사실이었다.
“그분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꼭 지키는 분입니다.”
“그런데 대체 일성그룹에는 왜 그런단 말이오. 아무리 자신의 주인이라고 해도 너무 칭찬 일색 아니오?”
조항석의 날이 선 질문에 김병우가 작게 웃었다.
“주인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면 조 회장님의 주인은 서용건 회장입니까? 일성그룹에서 월급 사장을 지냈던 분이 조 회장님의 부친 이었던 걸로 아는데요.”
“이 사람이!”
모욕을 받은 조항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효산그룹의 창업주는 일성물산 사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일성물산을 퇴사하고 서용건 회장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회사가 효산물산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성과 효산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회의장 분위기가 과열되자 송영주 회장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다들 그만하시게! 대책을 논의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
송영주 회장의 일갈에 김병우와 조항석이 말을 멈췄다.
회의장 분위기가 가라앉자 송영주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들 김 사장을 못 믿겠단 말이지. 그러면 나는 믿겠나?”
문성학이 그 질문에 얼른 답했다.
“당연히 왕회장님은 믿습니다. 재계의 큰 어른이신데요.”
“허허, 고맙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그렇다면 내가 보증하지. 주식은 고작 담보로 내는 것뿐이네. 그것들을 사겠다는 말이 아닐세. 자네들 주머니에 넣어 주겠다는 소리야.”
“그게 사실입니까?”
“그래. 담보는 잡히겠지만 말이야. 설마 명동의 돈을 떼먹을 미친놈은 여기 없겠지? 천 회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 하지는 않은 놈이야. 앞에 있는 서 회장을 보면 알지 않아?”
순간 서용건의 얼굴에 서늘함이 비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을 멈췄겠지만, 송영주 회장은 멈추지 않았다.
“자네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 내 앞에 있는 서 회장이 김 사장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김 사장이 왜 일성을 그렇게 압박하는지 사정을 알게 된다면 다들 이해할 거야.”
“송 회장님!”
서늘함도 잠시, 송영주 회장의 말에 서용건이 당황하며 그를 불렀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재계 사람들 모아놓고 저와 싸우겠다고 선전 포고라도 하시는 겁니까? 대현과 일성은 서로의 영역은 존중해왔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글쎄. 내가 죽고 난 이후에도 자네가 그 협정을 지킬지는 미지수구먼.”
“송 회장님!”
“아직 귀 안 먹었네. 살살 말해도 돼.”
송영주 회장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에 서용건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송영주라고 해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치 때문에 회의장에 있는 다른 회장들은 그저 숨을 죽이며 지켜볼 뿐이었다.
“모든 게 자네의 업보일세. 그 죗값을 받으면 끝날 일을, 아집 때문에 일성이라는 대기업이 휘청거리는 것 아닌가. 그럴 거면 욕심부려서 형의 자리를 빼앗지 말았어야지.”
“······.”
“자네는 지금 화를 낼 처지가 아닐세. 지금이라도 김 사장한테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지. 아니면 나중에 죽어서도 자네 부친에게 면목이 서지 않을걸세.”
서용건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으나, 송영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섰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그가 말을 이었다.
“다들 결정하게. 이대로 일성과 함께 침몰할 생각이라면 나도 말리지 않겠네.”
송영주 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그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도 잊게 만들 정도로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보증하지. 김무혁 사장이 내미는 손을 잡는다면 꽉 막힌 대출이 풀릴걸세. 만약 약속을 못 지킨다면 내 사비라도 털어서 빌려주겠네.”
“그게 사실입니까?”
“김무혁 사장에게 확답을 받았네. 이번 법안은 시대의 흐름이라고, 이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경영권을 흔들 수 있는 순환 출자 구조에서 탈피하라고 하더군. 조건은 단 하나, 일성과의 관계를 모두 끊으시게.”
회의실 안에 커다란 폭탄이 던져졌다. 송영주 회장과 서용건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경악이 어렸다.
“마지막 기회일세. 나는 선택했네. 일성과 적이 되더라도 김무혁 사장과 함께 갈 거라고. 그러니 자네들도 선택하게.”
그 말을 남긴 송영주는 회의장을 벗어났다. 회의실 안에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오랜만에 제대로 웃음이 터졌다.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다가, 겨우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송 회장님이 거기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네, 사장님.”
한경련 모임이 끝나자마자 달려온 김병우 회장이 오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며 웃었다.
“역시 송 회장님입니다. 말을 돌리는 법이 없어요. 그걸 그대로 대놓고 선택지를 던지실 줄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오늘 큰일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긴장하긴 했지만, 송영주 회장님이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영주 회장은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나도 그에 부합해야겠지.
“그나저나 송영주 회장님, 정말로 아프신 것 맞습니까? 정정하시던데요.”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시는 분이라 더 무리하셨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약육강식의 세계인 대한민국 재계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숨통이 끊어지기 마련이니, 송영주 회장은 아마 무리를 해서라도 더 강하게 나갔을 터였다.
“서용건의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땠습니까? 그렇게나 자존심 넘치는 사람이 그 많은 회장 앞에서 창피를 당했는데요.”
상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런 수모를 당해 본 적이 없겠지.
“보셨으면 흡족하셨을 겁니다. 송영주 회장이라서 제대로 화도 못 내는 모습이 더 웃겼거든요. 다른 사람이 했다면 아마 쌍욕을 내뱉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화를 냈습니다.”
“하하. 아쉽네. 카메라라도 하나 설치해 놓을 걸 그랬네요.”
내가 연신 웃음을 터트리자, 김병우도 따라 작게 웃었다.
“그래서 다른 회장들 분위기는 어때요? 일성과의 관계를 모두 끊겠답니까?”
“거기서는 아무도 확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송영주 회장님은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 먼저 자리를 비우셨고요. 저도 곧 뒤따라서 나왔습니다. 거기에 있어봤자 쓸데없는 질문이나 받지 않겠습니까?”
좋은 선택이었다. 중우가 나와 연결되어 있으니 필시 회장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터였다.
“잘하셨습니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니까요. 이번에 확실하게 길들여야겠습니다.”
“네, 사장님. 아마 다들 찾아오지 않을까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지배 구조 개편에 들어가는 그 많은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김병우의 말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성이 무너지길 원한다. 그걸 막는 자는 같이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송영주 회장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