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Who Sees Through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165)
천재, 세상을 읽다 천재 세상을 읽다-165화(165/200)
#165화. Peace. 1
-…….
핸드폰에서 이혜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아직 망설이는 것 같았다.
우진은 가만히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우진아.
“허허. 이거 참. 된통 걸려 버렸어.”
바둑판을 보며 말하는 이 회장의 목소리에 이혜림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지금 할아버지랑 같이 있어?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우진아. 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 그렇게까진 못하겠어.
이혜림의 목소리는 떨렸고, 점점 흐느끼는 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네가 여태까지…. 그렇게까지, 나 도와줘서 정말 고마운데,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그런데 미안해. 그렇게까진 정말…. 정말 못하겠어. 나 참 못났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 우진아.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담담하게 통화를 마친 우진은 다시 핸드폰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때,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사업 이야기가 잘되지 않아?”
“파트너가 생각을 바꾼 모양입니다.”
“그 생각 돌리게 해. 사업이란 뭐든 그렇지. 자네의 생각이 맞다고 판단되면 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생각만 많아지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되기 마련이거든. 모름지기 밀어붙여야 할 땐 불도저처럼 굴어야 해.”
‘신화그룹을 혜림이의 손에 쥐여 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절대로 이 회장님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진은 짧게 판단을 내렸다.
지인이나 친구를 도와준다는 의미는 곧, 그들이 원하는 것이나 어려워하는 문제점들을 조언이나 행동으로 실천해 주어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혜림이가 원하는 것은 여기까지.
여기서 손을 뗀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신은 금전적인 것을 원하는 이상만큼 얻었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사실 원하는 것은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혜림이를 돕는 과정에서 재벌 총수를 만나보고 싶었고, 또 그의 자식들, 또 환경을 경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멈춘다고 해서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우진은 바둑판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이 회장에게 이내 말을 꺼냈다.
“바로 옆 좌측에 두시면 길이 열릴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런 길이 있었구만.”
“이 회장님께서 전에 두신 수이기도 합니다.”
이 회장이 무슨 말이냐는 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내가 뒀던 수라고?”
“네. 지금 이 형국도 몇 번이나 만들어진 싸움이었습니다.”
이 회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렇겐 처음 두는 것 같은데?”
“그러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회장님께 병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우진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그 병을 흔히 치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회장의 얼굴이 불신으로 물들어갔다.
“뭐야”
“매일 아침 사유지에서 등산을 하셨는데, 오늘은 하지 않으셨네요. 소화가 잘 안 되셨는지 죽을 드셨구요. 서재에서 약 세 시간 정도를 머무르신 것 같은데. 결재를 많이 하셨네요. 사인하실 때 버릇이 있으시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듯이 펜으로 툭툭 치시는.”
이 회장의 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렇게 놀란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완전 CCTV를 들여다보듯 오늘 자신의 일과를 훤히 꿰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몇 초간 석상이 된 듯 우진을 쳐다보고 있던 이 회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와서 집에 도청장치나 소형 카메라 설치되어 있나 확인해 봐.”
수화기를 뚝 내려놓은 이 회장이 소파에 몸을 깊게 묻으며 말했다.
“그래서 서재를 보여 달라고 한 게야? 토끼인 줄 알았더니 여우였어. 자네 같은 여우가 호랑이 굴로 들어오면 최후가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우진의 입장에서는 얻은 게 많았다.
경험을 얻고, 이혜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까.
우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 우려하시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혜림 아가씨가 시키지도 않았구요. 다만 회장님과 이렇게 마주 앉게 되어 바둑을 둘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연이 아니다?”
이 회장의 몸과 얼굴은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지만 눈빛만은 심상치 않았다.
먹이사슬의 끝자락에 위치한 포식자의 위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혜림 아가씨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부탁은 없었다.
우진은 손을 떼기 전 이혜림의 배경을 깔아주기 위함이었다.
이 회장이 이혜림을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 저는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살기 위해 사람을 잘 보게 됐습니다. 차에 깔린 손주를 구하기 위해 할머니가 차를 들어 올린 것처럼, 저도 비슷한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어 어떠한 부분이 개화(開化)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회장님의 자택에서 도청장치나 카메라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회장님은 바깥출입을 한 번 하시게 되실 겁니다.”
이 회장님은 오늘 스케줄이 없을 것이다.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 있었다.
바로 벽시계를 무의식적으로, 주기적으로 눈짓으로 살핀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스케줄이 없어도 오늘은 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 회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신이라도 내렸다는 말로 들리는구만.”
“그런 건 아닙니다. 더 말을 덧붙이 말씀드리자면 이혜림 아가씨는 회장님께서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가끔씩 나오는 손에 떨림이나 말투의 어눌함 그리고 기억력.”
우진은 혜림이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주입시키듯 살짝 힘주어 말했다.
미디어나 광고에서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보여주고, 노래의 후크 송같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최면을 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익한 내용이라면 위력은 더욱 증폭된다.
우진은 이런 것들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회적 위치가 어떠한들, 다 똑같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이혜림 아가씨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의 주치의도 건강하다 주장하고. 자신의 눈에는 보이는데 가족들이 언급을 안 한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걱정된다고, 봐달라는 부탁을 하셔서 이 자리에 제가 있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주치의를 포섭해 이 사실을 숨긴 것이라면, 가족들이 사실을 숨기고 이용하려는 것이라면……. 이혜림 아가씨는 정말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물론 아주 미세하고 주치의까지 놓칠 정도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내가 치매에 걸렸다?”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다른 의사에게 치매가 의심된다고 검사를 한 번 받아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고 귀를 막기 마련이니까요.”
이 회장의 팔짱을 꼈다.
팔짱을 꼈다는 건 대부분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언어였다.
“좋아. 네 말에 신빙성이 있는지 어디 보자꾸나.”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이 회장의 자택을 샅샅이 조사하던 사내들 중에,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회장님, 발견된 것은 없었습니다.”
“확실한 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발견되면 재미없어.”
“예. 확실합니다.”
이 회장이 앉아 있는 우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가서 일들 봐.”
그들이 발소리까지 조심해 가며 자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거실은 잠시간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바둑 말고도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숨겨둔 장치들이 없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내용이 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빠른 시일 내에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진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인 우진은 현관으로 움직였다.
이 회장은 잡지 않았고 우진이 했던 말을 상기하고 있었다.
‘만약, 주치의를 포섭해 이 사실을 숨긴 것이라면, 가족들이 사실을 숨기고 이용하려는 것이라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자식새끼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현실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온다.
또 자신을 생각해주는 건 손녀뿐이라는 말이다.
이 회장은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다른 의사 알아봐. 비밀리에, 바로 출발할 거야.”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은 헛웃음을 지었다.
치매가 왔다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신경을 건드리는 이 불안감을 해소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이 회장은 다시 한번 실소를 머금었다.
‘오늘 회장님은 바깥출입을 한 번 하시게 되실 겁니다.’
우진, 녀석의 말이 딱 들어맞고 있으니 말이다.
이 회장은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몇 번을 똑같이 이 같은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라…….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우진은 이혜림과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신화그룹 다 잡아먹을 것처럼 가면 쓰고 변신한다고 했다가, 또 포기한다고 하고. 나한테 실망 많이 했지?”
우진의 도움이 절대적이어서, 혜림이는 고개를 잘 들 수가 없었다.
반면 우진의 표정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전 달동네에서 혜림이와 보라가 처음 만났을 때, 그때 혜림이는 선을 넘으면서 많이 변했다.
호르몬의 작용인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말이다.
“민망해서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네.”
카라멜 마끼야또를 훌쩍 마시던 우진이 말했다.
“혜림아,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내 시간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한텐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어.”
유익하다라는 말에 이혜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자아냈다.
역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을 배려해주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보다 혜림아. 어제…….”
우진은 어제 이 회장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혜림의 눈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내가, 내가 이야기한 걸로 됐다고?”
우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회장님을 이용하는 걸 바라지 않았잖아. 검사도 빨리 받으실 테고, 네 입지도 다질 수 있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네가 말한 걸로 했어.”
그때, 이혜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아가씨, 최 실장입니다. 회장님이 지금 조용히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혜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네. 의사에게 확답을 들었습니다.
“……알겠어요.”
통화를 마친 그녀의 입에서 파르르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번에도 우진의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진이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고 생각해. 현재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어서 가 봐. 손 많이 잡아 드리는 거 잊지 말고.”
“우진아. 나중에 아니 앞으로. 다 갚을게. 네가 도와준 거. 다 갚을게.”
“그럼, 조각 케이크 하나만 계산해주고 갈 수 있어?”
혜림이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하나면 돼?”
“응.”
그렇게 조각 케이크를 계산한 이혜림은 우진의 말에 자리를 떠났고, 우진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굳이 하나, 둘에서. 셋까지 갈 필욘 없지. 혜림이 네가 원한다면.”
이윽고 케이크를 받아 온 우진은, 케이크 한 점을 포크로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진은 세상 이런 맛이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형 서점을 찾아 복습하듯 책을 뒤져 보기 시작했다.
형법, 형소법, 행정법, 경찰학, 경찰학 개론, 형사법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