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wizard has finished closing the store RAW novel - Chapter (5)
천재 마법사가 폐관을 마침-5화(5/171)
5화 농부와 영주
다음날 아침.
일리안느는 눈을 뜨고도 한참을 멍하니 누워 있었다.
‘꿈이었나?’
하지만 몸이 욱씬거렸다.
밤늦게까지 요정들과 뛰어놀았던 그 기억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처럼.
“아······.”
그리고 향기.
팔을 들어올리자, 아직도 남아있는 요정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풋살구 냄새 같기도 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에 섞인 멜론 향기 같기도 한, 그 특유의 향기.
“진짜였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그 냄새를 깊이 들이키며, 일리안느는 이제야 현실을 직시했다.
“근데, 대체 어떻게?”
어제 갑자기 폐관을 깨고 나온 오빠. 대마법사의 수제자로 들어가서 이상한 인문사회학이나 잔뜩 익히다가 나왔다는 불쌍한 오빠.
근데 그의 마법이 이상했다.
룬문자를 다루는 엄청난 실력도 그랬지만, 단지 땅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운 것만으로 마법진의 공명 주파수를 조정한 건 더욱더 놀랄 일이었다.
‘그건 여러 마법사들이 온갖 장비와 의식을 동원해서 해도 정확히 맞추기가 어려운 건데······.’
그 뿐이라.
오빠는 묘한 말도 남겼다.
‘공명 주파수가 틀어졌다?’
그걸 무슨 수로 안다는 말인가?
설마 500년 동안 마법을 지탱해온 <알마게스트>를 부정하는 건가?
가장 위대한 책, <알마게스트>에 수록된 차원들의 좌표와 그 일주운동, 그리고 각 차원의 고유 주파수.
오빠는 마치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듯 했다.
‘아냐. 그럴 리는 없지.’
일리안느는 머리를 흔들었다.
마법은 <알마게스트>로 시작해서 <알마게스트>로 끝난다.
<알마게스트>는 모든 것이기에, 그것을 벗어난 마법이 존재할 리 없다.
단지 가능한 게 있다면, 시대에 맞게 그것을 변형하고 응용하는 것뿐.
‘그래! 그거다!’
일리안느는 마침내 깨달았다.
‘오빠는 사실 바르덴테님이 남긴 최후의 비전을 익혔던 거야!’
바르덴테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무려 8레벨의 응용 수식을 최초로 정립하고, 9레벨과 10레벨의 가능성을 탐구하던 선각자였으니까.
‘그 분이 <알마게스트>를 보완할 비전을 완성했고! 우리 오빠는 그걸 익히고 나오느라 그리 늦었던 거야!’
그 사실(오해)을 깨닫자, 일리안느는 발끝부터 솟구치는 짜릿함을 느꼈다.
요정계와 정확한 공명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라니!
“이걸 책으로 쓰면! <알마게스트> 이후 500년 내의 최대 성과가 될 거라고!”
합!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일리안느는 서둘러 자기 입을 가렸다.
‘입조심 해야지.’
이건 베리테 남작가가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결국엔 세상에 알려질 터였지만, 그 전에는 최대한 숨기며 남작가의 세력을 키우는 데 써야 할 그런 보물.
“그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일리안느는 어젯밤 오빠가 했던 말을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본 것은 다 잊고, 그냥 우연히 이렇게 된 걸로 하자고 했던 그 말.
보물을 지키고 남작가를 키우기 위한 사려깊은 마음에서 나온 제안일 터였다.
마침 핑계도 좋았다. 정말 가끔이지만, 이런 기적이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요정계와의 연결이 강화되는 사건들은 왕왕 있어왔다. 대륙 전체에서 10년에 1번 꼴?
그게 마침 우리 영지였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 입단속만 잘 하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밖이 시끄럽네?”
생각을 정리한 일리안느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밖이 자꾸 소란스러워서 생각하는 내내 방해를 받았다.
시끌시끌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어렴풋이, “즈바르트 도련님!” 하는 반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어? 오빠가?!”
반가움에 몸을 퍼뜩 일으킨 일리안느는 다리를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아오······. 쑤셔.”
요정의 향기, 그리고 근육통과 함께 시작하는 아침이었다.
**
아침 식사 자리.
요정과 밤새 놀았던 일리안느는 늦잠을 잤고, 플리안, 로오루아, 페르세타 이렇게 셋이 아침을 먹었다.
아버지 플리안은 감히 오빠와 첫 아침을 빼먹는다며 일리안느를 깨워 역정을 내려 했지만, 페르세타가 웃으며 말렸다.
일리안느가 늦잠을 자는 건 사실 그의 탓이었고, 어제 일리안느가 보여준 엄청난 열광을 생각하면 지금쯤 몸이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셋이 도란도란 아침을 먹는데, 문득 문 밖이 소란스럽더니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이 활짝 열리고,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옆구리에 칼을 찬 채 성큼성큼 식당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형이 돌아왔다고요?!”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플리안 남작이 흐뭇하게 웃으며 페르세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 아이가 바로 네 동생 즈바르트다. 둘이 인사 나누거라.”
페르세타는 식기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자기보다 머리 반 개쯤은 큰 동생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아······. 아, 그, 형······?”
즈바르트는 기운차게 박차고 들어온 것에 비해, 막상 페르세타를 앞에 두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반가워요. 내 동생 즈바르트. 처음 보네요. 페르세타 베리테예요.”
그런 와중에 페르세타가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이자, 즈바르트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 식구끼리 어색하게!”
그리곤 페르세타를 꽉! 끌어안았다.
“잘 돌아왔어. 형! 정말 고생 많았어. 이제 아무 걱정 하지마. 그간 많이 힘들었지? 앞으론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보고 살자! 우리도 나름 남작가 집안이잖아! 형도 이제 누릴 거 누리고 살자고!”
페르세타는 즈바르트에게 안긴 채 어색하게 그의 등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어째서인지 즈바르트가 자신을 굉장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나······?’
아무튼, 로오루아나, 일리안느가 안아줄 때와는 또 다른, 힘이 꽉찬 그 느낌도 꽤 나쁘진 않았다.
이게 내 동생이구나. 하는 자랑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허허······. 즈바르트. 사실 이미 가문 사정을 다 말해주었다.”
아버지 플리안이 이제 맘껏 누리라며, 큰소리를 뻥뻥 쳐대는 즈바르트에게 사실을 고했다.
“아······. 그걸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됐다······. 우리 가족인데 마냥 숨길 일도 아니고.”
“하긴······.”
즈바르트는 조금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가 다시 활기차게 목소리를 냈다.
일리안느도 그렇고 즈바르트도 그렇고, 뭔가 활달한 것이 서로 닮아 있었다.
“형! 그래도 걱정 마! 내가 방법을 찾아 보고 있어! 머지 않아서 가문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거라고! 형까지 왔으니까! 이제 더 걱정할 거 없지!”
“안녕 둘째 오빠.”
즈바르트가 와하하 웃는 틈에, 어느새 식당으로 내려온 일리안느는 조용히 그 옆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 플리안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지만, 일리안느의 머릿속은 지금 다른 생각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요정 농장 얘기를 해줘야 하지 않나? 마침 즈바르트 오빠도 돌아왔으니까 딱 타이밍도 좋은데······.’
하루 사이에 요정계와 연결이 다시 멀어졌으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도 없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에 기대어 기우를 떨칠 수 있었다.
대체 주파수의 기준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렇지, 일단 한 번 주파수가 맞기만 하면 길면 몇 년, 최소로 쳐도 한 달은 끄떡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요정이 없어서 문제지, 요정만 돌아오면 농장의 작물은 금세 열리게 된다. 그 말도 안 되는 요정의 숫자를 생각하면 한 달의 수확으로 빚을 충당하고도 남을 터.
기쁜 소식이었다.
얼른 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일리안느는 페르세타의 눈치를 살폈다.
‘끄응. 이런 건 오빠가 직접 말해야 하는 건데······.’
하지만 페르세타는 뭔가를 말할 정신이 없어보였다.
과도하게 활달한 즈바르트 때문에 탈탈 흔들리고 있을 뿐.
일리안느는 초조해졌다.
‘그냥 내가 말해······? 이제 곧 있으면 마나의 낮이 찾아올 시간인데······.’
마나의 낮. 차원 저 너머에 존재하는 마나의 태양이 온 세계에 본격적인 축복을 흩뿌리는 시간.
마나의 밤과 비교하면 10배는 더 많은 마나가 쏟아졌기에, 신비세계와의 연결도 그 시간엔 더욱 공고해졌다.
간밤에 스르르 자취를 감췄던 요정들도 곧 마나의 낮이 찾아오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어쩐다······.’
그렇게 그녀가 페르세타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가장 처음 기쁜 소식을 알리는 영광을 놓치고 만다.
“여, 영주님!”
황급히 식당 문을 두드린 병사가 소리를 쳤다.
“지, 지금 요정 농장으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요정 농장의 농부 길리안은 61세의 나이로도 아직 정정하게 일을 했다.
사실, 그래야만 했다.
한때 10명이 넘어가던 베리테 남작가의 요정 농장에는 이제 그 혼자밖에는 남지 않았으니까.
밭을 갈고 대대적으로 수확할 때를 빼면, 모든 일을 그가 혼자서 했다.
‘이제 내가 죽으면 이 남작가에서 요정 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남겠네. 그나마 남작님? 하지만 남작님이 매일 같이 농사일을 보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익힌 기술이 허망했다.
동료들은 모두 다른 살길을 찾아 떠나갔고 젊은 이들은 더이상 요정 농술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 죽을 때까진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가능하려나.’
길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멀리 보이는 농장을 두 눈에 담았다.
찬란했던 마법의 시대는 노쇠해진 몸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베리테 남작가의 요정 농장도 사멸해가고 있었다.
오로지 길리안만이 그 쓸쓸한 유산에 기대 함께 가라앉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요정을 봤던 날.
빨강 머리, 초록 머리, 노란 머리를 한 요정 셋이 깔깔 대며 그의 머리채를 쥐고 놀았었다.
그때의 환상적인 체험이 아직도 그의 늙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때의 그는 아직 초보 농사꾼이었기에 쩔쩔매며 요정들을 상대해야 했다.
요정들은 그걸 더 재밌어 했던 것 같다.
뭐, 이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하면 ‘또 늙은이 나 때 얘기 한다.’라며 구박이나 듣겠지만.
그래도 그에겐 인생을 바칠 수도 있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아니, 단지 기억만은 아니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농장에 요정의 빛이 날아오르는 날이면, 꼭 창백한 빛덩이 3개가 자기 주변을 날아다녔으니까.
길리안은 그게 증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요정들을 잊지 않은 것처럼 요정들도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그만 둘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농장을 떠날 수 있을까?
후회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다시 한 번만 더 보고 싶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농장 앞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사아아-
마치 해가 뜨고 빛이 온 세상에 스며들 듯, 농장 위로 여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덧씌워진다.
“어······?”
작물들의 가지와 줄기로 새로운 가지와 줄기가 환상처럼 나타나 연결되었고, 그 위에서 요정들이 알파와 오메가를 그리며 날아올랐다.
“어어······?”
하나, 둘, 셋······. 요정의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없었다.
농장 가득 요정의 빛이 넘쳐 흐를 지경이었으니까.
“한스! 한스!”
길리안은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막 영주성으로 출근하던 영지병 한스가 멀리서 길리안을 돌아보았다.
“왜요 아저씨!”
“영주님! 당장 영주님께 알려!”
“네? 뭘요!”
“이거! 이거 보라고!”
그가 농장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자, 저 멀리서 한스가 펄쩍! 뛰는 게 보였다.
“흐아아아?”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한달음에 농장까지 뛰어오고는,
“으아아아아아?!”
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영주성을 향해 뛰쳐나갔다.
길리안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꿈인가? 아니면 기적인가······?’
멍청하게 앉아 있는 그는, 따끔!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빨강, 초록, 노랑.
평생 잊지 못했던 작은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다.
–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야~
– 보고 싶었어! 오늘도 놀자! 뭐할까?
– 근데 넌 왜 이렇게 못 생겨졌어?
재잘재잘 떠드는 요정들.
길리안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여서 한동안 말도 못하고 꺽꺽거리자 요정들은 바보냐며 그의 머리를 쥐어뜯고 옷을 들추며 장난을 쳐댔다.
길리안이 겨우 정신을 차린 건, 그를 부르며 달려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
그 익숙한 목소리에 길리안은 펄쩍 뛰듯 몸을 일으켰다.
요정들은 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리며 재밌다고 난리를 쳤다.
“여, 영주님!”
길리안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며 달려오는 베리테 남작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영주가, 그저 요정과 농사를 사랑하는 소년이었던 시절.
그 시절에 그는, 항상 길리안을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이걸 얼마 만에 들어보던가.
영주가 미친 사람처럼 요정 농장을 바라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농부와 마주쳤다.
둘은 뜨겁게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아저씨······. 아저씨. 요정이. 요정이······!”
“네······. 영주님. 요정이 돌아왔어요. 요정이······.”
어릴 때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요정의 향연 탓일까?
남작 플리안은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길리안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타박타박 자신을 뒤따라오는 첫째 아들 페르세타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어제 페르세타가 돌아왔고, 오늘 요정이 돌아왔다. 이게 우연일까?
플리안은 길리안을 안은 채 입만 벙긋거려 물었다.
‘너야? 페르세타?’
그러자 페르세타도 입만 벙긋거려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아버지.’
그리곤 씩 웃는 첫째 아들.
그제야 플리안은 알 수 있었다.
‘아무렴. 그렇지. 바르덴테님이 어떤 분인데! 아무 것도 안 가르치셨을 리가 없지!’
어젯밤. 홀로 술을 마시며, 바르덴테를 두고 노망난 늙은이라고 욕했던 기억은 저기 머나먼 망각의 심연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바르덴테는 세계 제일의 마법사요. 위대한 참 스승이 틀림 없었다.
‘내 아들이 엄청난 것을 배웠구나! 엄청난 것을 배웠어!’
여전히 길리안을 끌어안고서, 플리안은 광대뼈를 터뜨릴 듯, 웃음을 함뿍, 입 속 가득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