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기회 (3)
구체적으로 묻기도 전에 백 이사가 한쪽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빙고! 그 친구, 우리 회사로 영입해 주게.”
“하지만 실무 경험이 이제 겨우 6개월 된 사람인데요.”
그는 한예건을 좀 더 묵혀 놓고 싶었다.
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건림건축에 있는 편이 위너스에서 경력을 쌓는 것보다 좋았으며, 1년 미만의 잦은 이직은 경력 관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에.
하지만 그런 사정이야 상관없다는 듯 백정일 이사는 한예건을 채용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어필했다.
“그래, 겨우 6개월도 안 된 신입사원이지. 하지만 그 대단한 건림건축 김수훈 대표의 신임을 톡톡히 받는 데다가 입사와 동시에 팀을 만들어 줄 정도라면, 웬만한 경력자보다 실력이 출중한 거 아니겠어?”
“그래 봐야 신설 팀 아닙니까? 위너스에서 욕심낼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다른 이유라도…?”
백정일 이사가 눈을 좁히고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건림건축에서 최근 네오소프트 사옥 프로젝트를 수주했네. 자그마치 50억 원짜리 설계를 말이야.”
그 규모에 조소훈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사옥 하나 짓는데 쏟아붓는 설계비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 설계비와 맞먹는 수준이 아닌가?
“이야~ 설계비 50억이라. 대단하네요.”
백 이사가 가느다란 눈을 빛냈다.
조소훈이 정말 모르는 것이 확실한지 가늠하는 것일 터.
물론 조소훈은 건림건축의 네오소프트 설계 수주 건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 계약 규모까지는 몰랐기에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백정일 이사가 직접 조소훈을 찾아올 정도면 이번 영입은 백 이사 선에서 추진하는 일이 아닐 거다.
‘어쩌면 정홍식 대표가 직접 지시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판이 커질 터.
그만큼 자신의 몫도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조소훈의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한예건 그 친구만 우리 회사로 보내주면, 수수료는 얼마든지 주겠네.”
“쉽지 않을 텐데요.”
“급여라면 얼마든지 준다고 해. 팀장급 수준에 맞춰줄 테니까.”
조소훈이 살짝 웃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조소가 담긴 웃음이었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조 대표의 말을 들은 백 이사가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이쪽 업계에서 우리 회사가 직원 대우는 탑급인 거 조 대표가 더 잘 알잖아. 설마 그 대단한 조소훈이가 벌써 겁먹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백 이사의 빈정거림에도 조소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 뭐로 움직일 수 있는데?”
백정일의 눈빛이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재촉했다.
하지만 가진 패를 미리 꺼내 보일 필요가 있을까?
유리한 패가 많아질수록 협상의 이득은 높아지는 법이다.
조소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제가 먼저 만나서 확인해 보고 좀 더 정확해지면 말씀드리죠.”
백 이사가 떠나고 조소훈은 손을 깍지 껴 모으고 턱을 괴었다.
그가 고민이 많을 때 주로 하는 습관적 행동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위너스는 너무 약해.”
아직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한예건의 재력을 감안하면 위너스가 수억 원의 연봉을 제시한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가 됐든. 그와 만나는 걸 더는 늦추면 안 돼겠군.”
조소훈은 명함집에서 한예건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다섯번의 통화음이 울리고 한예건이 전화를 받았다.
– 한예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온리원 HR컨설팅을 운영하는 조소훈 대표라고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예건이 말했다.
– 실례지만, 급한 용건이 아니면 제가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곧바로 약속이 있어서요.
“물론입니다. 명함을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조소훈은 예건의 번호로 명함 이미지 파일을 보냈다.
통화를 자주 하는 업무 특성상 목소리만 들어도 상대의 성향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다.
첫인상은 신뢰감 있는 단단한 목소리.
예건의 목소리는 그가 20대 중반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미확인 상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약속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전화를 끊은 것도 고단수.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군. 뭐, 오히려 좋아.”
조소훈은 흥미로운 눈길로 사무실 전화기를 주시했다.
* * *
전화를 끊자, 곧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 연락 주실 때까지 사무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온리원 HR컨설팅 조소훈 대표라고 적힌 명함 이미지에 잠시 눈길을 준 예건은 곧바로 안내데스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르누보에서 왔습니다. 구매과장님과 오후 2시 약속했는데,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미소 지은 직원이 상냥하게 대답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 내려오신다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예건은 여유롭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백자호텔 로비는 국내 최고급 호텔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세련되면서도 한국의 미가 잘 드러나는 절제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었다.
‘호텔명이랑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군.’
구매과장이 로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5분 뒤.
예건은 직접 만든 아르누보 갤러리 명함을 그에게 건넸다.
“한예건 실장입니다.”
“반갑습니다. 홍재범 구매과장입니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따라오십시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2층 연회장과 이어진 별동의 사무실이었다.
‘호텔 사무실은 주로 지하에 있다고 들었는데, 여긴 직원 복지가 굉장히 좋나 보네. 본사라 그런가?’
복도 유리창 너머로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에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구매과장이 회의실로 보이는 문을 열자, 이미 그곳에는 세련된 명품 양장을 입은 한 중년 여성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손님이 왔음에도 일어설 기색 없이 물끄러미 예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데다 눈빛 또한 형형했다.
‘보통 직책은 아닌 것 같은데.’
멀뚱히 입구에 서 있던 예건은 구매과장의 한 마디에 단박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표님, 이쪽은 아르누보 한예건 실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예건입니다.”
“반가워요. 백자호텔 이혜수 대표예요.”
‘어쩐지 일반적인 호텔 사무실 같지 않더라니. 그런데 고작 가구 구매 미팅을 대표가 직접 참여한다고? 왜지?’
발주 금액과 중요도를 따져보아도 딱히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권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지금 우리 회사에서 추진하고 있는 명동 백자호텔의 리뉴얼이 12월에 끝날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오픈할 생각이에요.”
“그러시군요.”
“그래서 객실에 가구를 넣어야 하는데….”
같은 눈높이로 마주한 이혜수 대표의 포스는 대단했다.
예건의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 왠지 익숙한데.’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다.
뭐, 워낙 사람의 생김새에 관심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도.
한동안 빤히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던 이 대표가 말을 이었다.
“지인이 추천하더군요. 아르누보 제작 가구가 요즘 꽤 인기라고. 한예건 씨가 만든 가구가, 사군자라고 했나? 이름도 직접 지은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전통적인 느낌이 나는 게, 우리 백자호텔 인테리어와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보다 아주 조금 편해진 얼굴로 소파에 기대며 다리를 꼬는 이혜수 대표.
다만 그녀가 풍기는 냉기는 여전했다.
“예약주문이 많이 밀려 있다고 들었는데. 일정은 가능할까요?”
대략적인 납품 가능 시점은 이미 가구공장과 협의해 조율하고 왔다.
12월 초까지 객실 수에 맞춰 110세트를 제작하는 건 문제 될 것 없었다.
“네. 사군자 세트만이라면 가능합니다.”
이 대표는 옅은 미소를 흘리고 물었다.
“객실 내부를 모두 같은 컨셉의 가구로 세팅하고 싶다면요?”
어쩐지 능력을 시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직접 부른 이유가 이거였나?’
사군자 시리즈의 디자이너가 자신인 걸 알고 지목했던 거였다.
예건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호텔에 배치되는 가구라고 해서 일반 가구와 특별히 다른 건 없다. 객실에 필요한 가구라고 해 봐야 침대와 사이드 테이블, 장식장, 서재 가구와 식탁 세트 정도가 전부였으니.
구매처가 원하는 스타일도 이미 정해져 있어 디자인이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일정이 문제였다.
가구공장은 현재 풀가동 중이다.
사군자 세트의 신규 주문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으며, 아르누보 매장의 인테리어를 위해 목재 몰딩 및 장식물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유가 생기면 곧바로 발루아에 보낼 가구도 생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의 제안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자그마치 한국 5성급 호텔과의 첫 거래인데?
예건은 포기라는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그러니 남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가구공장을 확장해야겠군.’
공장을 확장하면 초반에는 관리에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겠지만, 공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이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르누보 갤러리의 규모를 한 단계 성장시킬 좋은 기회다.
결심을 끝낸 예건이 이 대표에게 답했다.
“기회를 주신다면,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힘들다는 답변을 예상했던 것인지, 이 대표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최근 매출이 늘어 공장 확장을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무리 될 것은 없습니다, 그저 일정을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니까요. 혹시 필요한 품목을 알 수 있을까요?”
이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매과장이 서류를 내밀었다.
품목을 확인하니 다행히 예건이 예상했던 품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없는 제품들은 샘플 먼저 보여드려야겠지요?”
대답은 홍재범 과장의 입에서 나왔다.
“네. 아무래도 가구의 최종 상태를 확인해야 가격이 적정한지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흠. 수량이 많으니, 예산부터 결정하는 게, 서로 부담 없고 좋겠네요. 인테리어 도면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요청하신 수량에 맞춰 견적 먼저 제출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홍 과장이 흡족한 얼굴로 답했다.
“샘플은 다음 주 중에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논현동 매장이 현재 공사 중이라, 그 옆의 공실에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실무적인 대화가 오가는 동안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 대표가 물었다.
“하! 나도 성격이 급한 편이긴 한데, 일주일 만에 샘플까지 제작할 수 있겠어요? 디자인 보고 마음에 안 들면, 계약 안 할지도 모르는데?”
“계약이 빨리 결정돼야 이후 공장 확장이나 다른 업무에 차질이 없으니까요.”
예건은 계약체결이 안 되었을 경우는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만약 계약이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점점 판매량이 많아지고 있는 사군자 컨셉으로 통일한 가구를 대중에 선보이는 것도 괜찮겠다 판단한 것이다.
“뭐, 당사자가 그렇다니, 더는 말리지 않겠어요. 대신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해 둘게요.”
“네. 말씀하십시오.”
“사군자 세트, 그 수준에 준하는 퀄리티와 디자인이 아니면, 이 계약은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물론입니다.”
시원한 한예건의 대답에 오히려 기가 차는 쪽은 이혜수였다.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딘가 자신을 닮은 그 오만한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아주 자신만만하네요. 좋아요! 그 패기, 한 번 믿어보죠. 열심히 해봐요. 이번 건 잘 해내면, 다른 호텔 리뉴얼 할 때도 우선적으로 고려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예건은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구매과장을 따라 사무실을 나서던 예건의 머릿속에 뜬금없는 궁금증이 생겼다.
‘분명 누굴 닮았는데….’
하지만 호텔을 벗어나는 순간, 호기심도 함께 달아나 버렸다.
그의 관심이 온통 하루라도 빨리 완성해야 할 가구 디자인에 쏠린 탓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