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고속 성장 (6)
또각또각.
힐이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디딜 때마다 공간에 구둣발 소리가 번져 나갔다.
벽에 부딪히며 울림을 만들던 경쾌한 소리가 걸음을 멈춤에 따라 잦아든다.
그 여백을 기분 좋은 감탄음이 대신했다.
“흐음.”
외부와 내부를 경계 지은 철문이 열리고 아르누보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시간과 공간이 멈추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묘한 기분을 느낀 이혜수 대표가 감탄했다.
“멋지군요!”
평소 모든 것에 심드렁한 이혜수 대표가 이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는 건 남산호텔 총지배인 권용호도 처음이었다.
아르누보 매장을 둘러보는 이혜수 대표의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혜수 대표가 몸을 돌려 예건을 향해 물었다.
“한 실장. 혹시 유럽에서 살았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예건은 순간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적절한 답을 찾아내 대답했다.
“어…. 아뇨. 그냥 일 때문에 잠시 파리에서 몇 달 지낸 것 외에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감성이. 흠흠. 이런 감성의 디자인이 나올 수 있죠?”
이혜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조된 억양을 고치고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아, 그게 대학 다닐 때 아르누보 양식에 매력을 느껴서 관련 공부를 좀 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군요.”
천장의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진 꽃잎 형태를 이루는 몰딩.
유연하면서도 비대칭의 형상으로 벽을 흘러내리며 꿈틀거리는 목재 장식.
벽면과 천장을 은은하게 뒤덮은 아이보리 색상의 포근한 점토질 벽면과 그 위를 섬세하게 조각낸 금빛 선들.
이혜수는 시선을 어느 곳 한 군데에 고정하지 못하고 예술적 감성이 돋보이는 공간을 부지런히 탐닉했다.
‘저 목재 장식은 꼭 오래된 고목 표면에 덩굴식물이 박제돼 굳은 것 같아. 게다가 저 벽 조명! 금속 디테일의 섬세함이 단연 돋보이는걸. 게다가 색유리를 통해 나온 빛이 벽면의 입체적인 장식을 더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최대한 감정을 억눌러 감탄이 터지려는 것을 누르고 있으나, 아르누보 매장을 이루는 디자인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벽과 천장의 장식들.
특히 입구 상단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쏟아지는 황금빛이 고혹적인 패턴의 바닥을 비추며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어떤가?
이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치료받는 느낌이 들었다.
‘예술 치료가 이런 거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계의 유명한 호텔을 다 둘러보았던 그녀였다.
좋은 것을 눈으로 보고, 좋은 것을 직접 먹어 보아야 가치를 매길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부지런히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며 유랑하신 것이다.
덕분에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눈높이가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그녀였다.
하지만 라 메종드 아르누보는 그런 그녀의 안목으로 보기에도 황홀경 그 자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북받치는 감동이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상기시켰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영국 리츠 런던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지.’
온통 노란 불빛이 반사된 로비의 벽면은 마치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휘황찬란했다.
어린 이혜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 호텔은 벽에 금가루를 발랐나 봐요.’
놀란 토끼 눈을 한 혜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아버지가 물었다.
‘우리 호텔도 이렇게 만들까?’
‘네!’
아버지는 혜수의 대답을 흡족해하며 놀라운 장소를 구경하느라 흐트러진 혜수의 단발머리를 곱게 쓸어 주셨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는 남산 호텔의 첫 인테리어를 영국 리츠 런던 호텔을 본떠 만들었다.
그녀가 대표로 취임한 이후 그때의 인테리어는 자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렸지만.
잘 생각나지도 않는 까마득한 과거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평온함이 느껴지는 공간이라니.
‘기대했던 것 이상인데.’
타인의 간섭에서 완벽히 분리된 공간에 이런 예술적인 감동을 담는다면,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찾는 이가 끊이지 않을 거라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우리 남산호텔 프레지던셜 룸도 장인 정신이 엿보이는 예술적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계속 머물고 싶어지는 그런….’
결심이 선 그녀가 곁의 총지배인에게 물었다.
“총지배인님, 어떤가요?”
“네. 말씀하신 대로 대단하군요. 정말 멋진 공간입니다.”
처음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르누보 매장을 들어섰던 권용호 총지배인도 연신 눈을 빛내며 감탄하기 바빴다.
오너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이 쫓아 오기는 했지만, 고작 20평짜리 매장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겠나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르누보 매장은 그가 보기에도 보통 공을 들인 게 아니었다.
이 대표가 왜 한사코 같이 보러 가야 한다고 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정도였다.
납득이 되니, 오히려 욕심이 동했다.
호텔의 시설은 호텔리어의 자존심이다.
자기가 관리하는 호텔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만든 문화재급 서비스 공간이 있다는 걸 싫어하는 총지배인이 있을까?
게다가 오너의 지시로 예산이 투입되는 것이니, 자신이 책임을 떠안을 이유도 없다.
‘이건 무조건 해야 해!’
권 총지배인은 아예 작정하고 이혜수를 부추겼다.
“하하하. 대표님의 탁월한 안목은 도저히 제가 따를 수가 없군요.”
권 총지배인이 흡족한 모습을 보이자, 확신을 가진 이혜수가 홍재범에게 지시했다.
“홍 과장. 준비한 서류, 한 팀장에게 주세요.”
“네.”
홍재범 과장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예건에게 건넴과 동시에 이혜수 대표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픈 축하 선물은 이걸로 하죠.”
“이게… 뭡니까?”
예건의 질문에 홍 과장이 냉큼 대답했다.
“남산호텔 프레지덴셜 룸 인테리어 설계 및 공사 의뢰서입니다.”
홍 과장에게서 모어 스페이스 대표님도 함께 참석해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인테리어 디자인 의뢰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게 호텔마다 단 하나씩만 있다는 프레지덴셜 룸 디자인 의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마 아르누보 스타일로 인테리어 디자인해 달라는 건가? 그건 좀 곤란한데.’
백자호텔처럼 인테리어 트렌드를 선도하는 곳에서 아르누보 스타일로 객실을 꾸미고 이를 선보이기 시작하면, 그를 따라 우후죽순 비슷한 보급형 디자인이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3월 전시회에 라 메종드 아르누보가 공개되고 자신이 아르누보 스타일의 새로운 리더임이 소개되기 전까지는 가급적 경쟁자가 생기지 않아야만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 한다고 해도 디자인 퀄리티의 격차를 쉽게 따라잡을 수야 없겠지만.
완벽하게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유사 기업의 등장이 치명적일 수 있다.
역시나 분위기가 예건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두 분께서 함께 만드신 이곳 라 메종드 아르누보와 똑같은 스타일로 우리 남산호텔 프레지덴셜 룸을 꾸미고 싶어서요. 면적은 100평. 이미 한 번 손발을 맞추셨으니, 어렵지 않겠죠?”
이혜수가 도도한 표정으로 예건의 답을 기다렸다.
당연히 승낙할 거라 의심치 않은 눈빛.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고 판단한 예건은 고개를 저었다.
“흠…. 그건, 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고민을 한다고?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곁에 서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이성하 대표가 한 방 맞은 것처럼 벙찐 얼굴로 한예건과 이혜수 대표를 번갈아 보았다.
“예산이라면 얼마든지.”
“아뇨.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예건의 단호하고 무심한 표정과 대조된 이혜수 대표의 붉어진 얼굴.
중간에 끼어서 안절부절못하던 이성하 대표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예건이 이상하다는 듯 이혜수 대표에게 되물었다.
“프레지덴셜 룸이라면 남산 백자호텔을 대표하는 장소인데, 왜 아르누보 스타일로 디자인을 해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거야 이곳 디자인이 마음에 드니까요.”
“흠…. 그런 이유라면 작업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 아니, 왜?”
당황한 이혜수가 언성을 높였다가 분기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전, 지금의 남산 백자호텔 디자인이 마음에 들거든요. 도포 입은 선비 같은 고고하고 세련된 분위기 말입니다. 마치 조선 백자 같지 않습니까?”
거절하기 힘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던진 말이긴 했으나, 예건의 본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자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프레지덴셜 룸이라면 지금의 로비 디자인과 유사한 컨셉으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혜수가 형형한 눈빛으로 예건을 쏘아보며 뭐라 한마디 덧붙이려다 입을 꾹 닫았다.
‘한예건의 디자인을 갖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야. 괜히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이내 생각을 정리한 이혜수가 단호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좋아요. 그럼, 직접 제안해 봐요. 100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예술품 같은 공간을. 이곳 아르누보 보다 못하면, 이 제안은 없던 거로 할 테니까.”
그제야 예건이 마음에 드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혜수 대표 일행이 떠나고 긴장이 풀어진 이성하 대표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휴~ 조마조마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혜수 대표님 성깔, 아니 성격이 보통이 아니시거든요.”
예건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그런가요? 항상 무덤덤하시길래 태평한 성격이신 줄 알았는데요.”
이성하 대표가 뜨악하는 표정으로 예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혜수 대표가 지배인으로 근무했던 젊은 시절, 공사 마감 때마다 분기탱천해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업체 관리하나 제대로 못 하냐며 직원들을 향해 고성을 지르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무덤덤이요? 하하하. 그건 한 실장이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호텔 내에 이 대표님 불같은 성격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공사 마감할 때마다 아주 난리, 시한폭. 아… 하하하. 뭐 그렇다고요.”
무의식중에 시한폭탄으로 불리던 이혜수의 과거를 폭로할 뻔한 이성하 대표가 얼른 말을 고치고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죠? 이혜수 대표님, 디자인 보는 눈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으니 웬만한 제안으로 성에 차지도 않을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을 하면 되죠.”
“하하하. 뭐, 그렇긴 합니다만. 어디 그게 쉬운… 어. 물론 그렇죠. 이혜수 대표님 마음에 드는 제안만 만들면 되는 건데. 그렇죠?”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이성하 대표가 예건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다 말을 바꿨다.
“네, 걱정 마십시오. 이혜수 대표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만한 디자인을 해 보이겠습니다.”
예건의 의욕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성하 대표의 숨통이 턱 막혔다.
한예건의 눈빛에서 광기라고 불러도 좋을 뭔가가 일렁거리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무래도 아르누보 매장 못지않은 엄청난 작품이 탄생할 것만 같았다.
‘이거, 이거. 어째 우리 회사 에이스들을 또 한 실장에게 뺏길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담?’
남주형 이사의 부재는 상상 이상으로 이성하 대표에게 부담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백자호텔 프레지덴셜 룸 시공에 다른 사람을 현장 소장으로 보낸다는 것은 가당키나 하겠는가?
게다가 디자이너가 한예건인데?
모르면 모를까.
그 꼼꼼한 남주형 이사가 한 달 만에 반쪽이 되어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단 하루도 저 한예건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20평이 100평으로 늘었으니, 걱정이 다섯 배쯤 되는 셈인가?
허허허.
이성하 대표는 그냥 마음을 비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닿는 곳이 벼랑 끝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이성하 대표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