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1)
011화. 생의 찬미 (2)
“여보, 나 왔어.”
한명호가 집으로 들어서며 아내를 찾았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서희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요? 얼른 씻고 와요. 밥 먹게.”
“우리 아들은 아직이야?”
“오늘도 늦나 봐요.”
살갑게 웃던 서희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설계사무실이 다 그렇지 뭐.”
“집에 들어와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니까 그러죠.”
“원래 인턴 때가 제일 바쁜 법이야. 모르는 게 한 둘이 아니니까.”
“그래도….”
서희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예건이가 좀 자상한 아들이었어요? 이상하게 요즘 따라 말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고요.”
최근 들어 데면데면해진 모자 관계 때문에 안 그래도 속이 상하는데 그런 서희의 속도 모르고 명호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녀석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된 거지.”
서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독립이라뇨?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하하. 언제까지 품에 끼고 있으려고?”
“결혼 전까지는 데리고 있을 거예요.”
아내의 귀여운 투정에 명호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예건이 독립하고, 아내가 느낄 상실감이 머릿속에 그려진 탓이었다.
“여보,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당신 전공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작은 가게를 차려보는 것도 괜찮고.”
“가게요?”
서희가 명호의 제안에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 내가 일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싫어했다기보다는,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지.”
현장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가족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던 그였다.
아빠의 빈 자리를 아내라도 사랑으로 꽉 채워주기를 바랐고, 덕분에 예건은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하지만 예건이 인턴 생활을 시작하자 눈에 띄게 우울해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정작 아이를 위해 아내는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염려가 든 것이다.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요.”
“알겠어요.”
삑삑삑삑삑. 띠리릭.
서희가 설레는 표정으로 뭐라 말을 이으려다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아들, 일찍 왔네.”
“네, 어머니.”
예건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평소처럼 곱게 휘어졌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부드러운 미소.
서희는 일하느라 피곤했을 아들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아버지의 구두를 확인한 예건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일찍 오셨네요?”
“어, 왔냐? 씻고 와라. 저녁은 아직이지?”
“네, 아직요. 옷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다정함에 행복해진 서희가 콧소리를 내며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도 얼른 씻고 나와요. 밥 금방 되니까.”
“하하하. 그래. 그러지.”
온가족이 함께 모인 저녁 식사 자리를 준비하는 서희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 * *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여유로운 저녁을 보낼 무렵.
문뜩 아들의 직장생활이 궁금해진 명호가 물었다.
“설계사무실 근무는 할 만 하니?”
“네. 재밌어요.”
“그래, 다행이구나.”
“아, 어머니. 저 다음 주까지 제출하는 공모전이 있어서 당분간 조금 늦을 거 같아요.”
“그래, 알았어. 밥은 꼭 챙겨 먹으면서 일해.”
“걱정하지 마세요. 직장 선배님들이 엄청 잘 챙겨주세요. 저 내일 일찍 가봐야 해서, 오늘 일찍 들어가서 쉴게요.”
“그래, 그러렴.”
예건이 방으로 먼저 들어가고, 아쉬운 눈빛으로 아들의 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서희를 명호가 타이르듯 나무랐다.
“관심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야.”
“하지만, 안쓰러운 걸 어떡해요.”
“성인이 되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야. 녀석은 당신 생각보다 더 잘 해낼 거니까.”
그렇다고 명호가 예건의 걱정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아내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건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 마주하는 짙어진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고는 했다.
외모는 분명 자신의 아들임에도 그 속에 있는 것은 예건이 아닌 것 같달까?
아마도 서희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어? 아냐, 그냥 회사일.”
“회사 일은 회사에서 끝내고 오라고 했죠. 집에서 고민해 봐야 주름만 는다고요.”
“하하하. 미안, 미안.”
자신의 아들이 분명한데, 아들이 아닌 것 같다니.
명호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망상이었다.
부모와 떨어져 홀로 한 여행에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왔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토록 좋아하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환영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만나고, 그의 건축에 대한 심오한 깊이를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아들이라 크게 염려되지는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아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곁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환하게 웃는 아내를 보며, 명호는 자신의 어깨가 한층 무거워짐을 느꼈다.
* * *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가족들과의 거리감일 것이다.
처음에는 75년이란 생애 동안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감당해야 했던 상실감이 떠올라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특히나 지금의 부모님을 뵐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면서 허약한 가우디를 각별히 돌보아 주셨던 전생의 부모님이 자꾸 떠올라,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되려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갚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보답할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한 번 돌아가신 부모님은 살아서 만날 수 없으니, 남아 있는 마음의 빚을 현재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 갚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편해졌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저녁을 함께하고,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시는 두 분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
가족들이 자신에게 진정 바랐던 것은 그저 소소한 관심이었을 뿐인데.
일밖에 모르던 전생의 가우디는 사람은 뒷전이오,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기 바빴다.
불빛을 보고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부나방 같았던 전생의 자신을 떠올리자 밀려드는 후회감.
때늦은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 * *
어느새 금요일 오후.
새보람 종합병원의 모형은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었다.
김 대리가 종일 라이싱 보드를 자르느라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쭉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
“아아! 죽겠다. 왜 업무 강도가 평소보다 더 빡센 것 같죠?”
김 대리 맞은편에서 잘린 벽면을 바닥에 부착하고 있던 주 과장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안 쫓기고 일하고 있잖냐.”
주효섭의 눈길이 옆 테이블의 예건에게 향했다.
“그게 다 저 녀석 덕분이고.”
예건이 모형팀으로 출근하고 난 후로, 모형팀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4일은 너끈히 소모될 대지와 주변 건물이 단 이틀 만에 도색까지 마무리되고, 주효섭과 김준호, 이지연은 본건물의 모형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예건이 추가로 받아온 종합병원 단지 내 공원은 무시무시한 퀄리티와 속도로 대지 내부의 비어 있던 땅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먼저 만들어진 모형을 보고 도면을 그려야 할 정도의 빠른 속도감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설계 3팀의 직원들이 모형팀을 방문할 정도였으니.
빠듯한 일정임에도 신기한 것은.
지난 3일 동안 모형팀은 단 하루도 밤샘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모전을 일주일 앞두고 매일 10시 퇴근이라니.
가히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마감이 다가올수록 피곤함에 녹초가 되었을 몸이 가뿐한 덕분에 모형팀 인원들은 업무 시간에 집중해 더욱 효율적으로 모형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지연 씨, 우리 간식 먹고 할까?”
“네. 안 그래도 당이 필요했어요. 바람도 쐴 겸, 제가 영광 씨랑 같이 가서 사 올게요.”
“그래, 그럼 난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로.”
“난 아이스티.”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 테이블로 향했다.
“예건 씨는? 오늘도 아아?”
“네. 감사합니다.”
“영광 씨, 같이 가요. 우리 바람 좀 쐬요.”
처음 모형팀에 왔을 때보다 핼쑥해 보이는 얼굴로 영광이 고개를 들었다.
“네.”
유명 브랜드 카페로 향하던 지연이 넌지시 영광에게 물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닙니다.”
“얼굴이 많이 상해 보여서. 아프면 얘기해요. 하루 정도는 일찍 퇴근해도 되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잠시 후 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영광은 매일 6시에 퇴근을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예건에게 지시를 받고 일찍 나가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저녁마다 어디를 그렇게 가는 거예요?”
“하아-.”
영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첫날은 모형 재료였지만, 그다음 날은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까운 공원을 3시간이나 헤매고 다녔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나 할 법한 일을 자신이 하고 있으니 빡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별거 아닙니다. 예건 씨가 필요한 재료가 있다고 해서 구하러 다녔어요.”
“아~. 그랬구나.”
지연은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오히려 그녀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영광에게 더 상처가 되었다.
“예건 씨, 모형 너무 잘 만들죠? 나도 옆에서 돕고 싶은데….”
부러운 표정으로 영광을 바라보는 지연.
모형 만들 때 힐끔힐끔 자신 쪽을 바라보던 지연의 시선을 못 느꼈다면 거짓말이다.
“대단하지 않아요? 이제 겨우 인턴인데…. 그렇게 자신감 넘치게 일하는 거.”
“대단합니다.”
“어쩜 그렇게 자신의 디자인에 확신을 가질 수 있죠? 전 하라고 해도 못 했을 거예요.”
“네. 저도요.”
“모형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예건 씨를 볼 때마다 굉장한 아우라가 쏟아지는 것만 같아요. 일에 열중하는 남자를 보고 왜 멋있다고 하는지 예건 씨 보고 처음 느꼈잖아요.”
“그렇군요.”
지연은 간식을 사러 갔다 오는 내내 예건을 칭찬했다.
무표정하게 장단을 맞춰주었던 영광은 모형실을 들어서기 전 지연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부러우시면 자리 바꿔드릴까요?”
순간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익어버린 지연이 손사래를 치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예건 씨 칭찬한 거, 절대로 예건 씨한테는 말하지 마요.”
“…네.”
모형실로 들어서는 둘의 표정에서 묘한 기류를 읽은 김 대리가 쯧쯧 혀를 차며 지연을 나무랐다.
“영광 씨한테 무슨 소리를 했길래 나갈 때보다 얼굴이 더 상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연은 화들짝 놀라며 김 대리가 주문했던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입을 막았다.
“예건 씨, 와서 간식 먹어요.”
어딘가 수줍게 들리기까지 하는 지연의 목소리.
하지만 예건은 간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로 다가온 예건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자석에 끌리듯 예건의 자리 옆으로 쪼르르 다가간 지연.
“와~ 이제 거의 끝이 보이네요?”
“네. 영광 씨가 잘 도와준 덕분에요.”
“나무는 언제 심어요?”
“도색해 놓은 거 다 마르면요?”
“아~. 어제 영광 씨가 구하러 다녔다는 게 나뭇가지였어요? 완성되면 진짜 예쁘겠다.”
지연은 어느새 예건이 완성하고 있는 공원 모형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황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색감의 모자이크 조형물들은 사진으로 보았던 가우디의 구엘 공원 장식들과 닮아 있었다.
“이거 가우디의 구엘 공원을 참고해서 만든 거죠?”
“네. 맞아요.”
“그런데 색감이 좀 다르네요. 음… 뭐랄까? 구엘 공원은 발랄하고 화려한 색감이라면…. 이건 좀 더 차분하고 익숙한 느낌이랄까?”
“서울을 닮은 색상이거든요.”
예건의 답을 들은 지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말요. 뭔가 색상에서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요.”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물에 그 지역의 자연을 담고 싶어 했잖아요. 그가 한국에 와서 디자인했다면, 이런 색상을 썼을 것 같아서요.”
“와아~. 정말 그렇겠네요. 한국의 자연을 닮은 색이라 그런지, 색상의 조합이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거군요.”
똘똘한 조수는 가르치는 맛이 있다.
지연은 금세 예건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뭔가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느껴져요. 특히 이 부분 여기, 중앙이요. 바닥에 숨어 있던 새싹들이 막 고개를 내밀고 튀어나올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고 할까? 음… 그런데.”
살짝 머뭇거리는 지연.
예건이 그 부분의 마감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왜 아직 도색하지 않았어요?”
“그게….”
예건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이거다 싶은 디자인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이 곳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다른 곳과는 차별을 두고 싶거든요. 생명력이 넘치는 찬란한 빛을 표현하는.”
예건의 말에 지연이 박수를 짝 쳤다.
“찬란한 빛! 저 그거 봤어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