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빛가람 미술관 (1)
오랜만에 니콜에게서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니콜 씨, 발루아 특별 경매가 벌써 다 끝났나요?”
– 아뇨. 그건 아니고, 전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전할 말이라니? 무슨 일 있는 건가?
니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좋은 일은 아닌 모양이네요.”
그러나 예건의 예상과 달리 그녀가 전한 내용은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이었다.
– 의도를 확인할 수 없어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일전에 가우디연구소에서 발루아를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어요.
“역시!”
예건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환호를 내뱉을 뻔한 걸 깨닫고 당황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니콜은 예건의 외마디 함성에서 그가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의 짐작을 말했다.
– 미스터 한이 가우디의 건축물을 복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브루노 건축사님이 말씀하시던데, 그게 사실이었군요.
더는 숨길 이유가 없기에 그는 지금껏 속에만 품고 있던 뜻을 드러냈다.
“네.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복원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생각을 정리한 니콜이 말을 이었다.
– 불가능한 일이란 건, 본인이 더 잘 아시겠죠? 그에 관해 첨언하지는 않겠어요.
잠시 숨을 고른 니콜이 이어 말했다.
– 어제 가우디연구소 측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 발루아를 돌아보고 갔어요.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제법 놀라는 기색이더군요.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당장이라도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래도 명색이 건축 역사 한 시대를 장식했던 자신인데, 그렇게 경박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예건이 니콜의 말을 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아는지, 그녀는 딱 필요한 말을 전했다.
– 연구원들이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 하지만. 그리 좋은 뜻으로 만나자는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미스터 한. 당신…, 혹시 사그라다 파밀리아 기부함에 스케치를 남기고 온 적이 있었나요?
영상이 되감기 하듯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네, 그랬습니다.”
– 가우디의 시그니처를 그곳에도 사용했고요?
“아…. 네.”
전화기 건너편에서 작게 니콜의 한숨이 들려왔다.
–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네요. 만약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내년 메종&아트 전시회 이후로 최대한 미루세요.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후퇴한 기분이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내가 만든 시그니처를 내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왜 내가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숨어야 하는 거냔 말이다.’
현실이 너무도 암담하고 답답했다.
세상을 향해 내가 전생에 가우디였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들의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평생 도면 유출을 신경 쓰며 조수들에게 매사에 도용을 조심하라 강조했던 그였으니까.
“니콜의 조언대로 최대한 천천히 만나면 되는 거야. 명성이 쌓아진 다음, 천천히.”
전화를 끊기 전, 니콜이 했던 마지막 조언이 떠올랐다.
‘이건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직 발루아 특별 경매가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경매는 물론 전시회까지 취소될지도 몰라요. 그럼, 우리 회사에서도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어요. 이해해요?’
니콜의 말이 백번 옳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향하는 길이 오명으로 얼룩지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예건은 하는 수 없이 니콜의 제안을 수긍했고, 니콜은 예건이 개인 정보 제공을 거부했다고 가우디연구소 측에 전하겠다고 답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묵묵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길의 끝에 닿을 수 있겠지.
조급해지지 말자.
예건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복잡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 * *
터덜터덜 회사로 출근하던 길.
로비에서 우연히 하주연을 마주쳤다.
회식 이후로 한 달 만인가?
업무로 쉴 새가 없는지 눈 밑에 그늘이 가득했으나, 몸가짐에 흐트러짐 없는 건 여전했다.
“하주연 대리님, 오랜만이네요.”
“아! 한 팀장님, 안녕하세요. 일찍 출근하시네요?”
“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자꾸 힐끔거리던 하주연이 그를 향해 물었다.
“이 근처에서 가구 매장 운영하신다는 말씀 들었는데, 잘 되나요?”
“네. 그럭저럭요.”
“다행이네요.”
다시 침묵.
“그, 호텔 같은 데 납품하면 이윤이 많이 남는다던데. 혹시 아세요?”
“호텔이요? 최근에 하나 진행하고 있는 게 있긴 합니다.”
“오~ 무슨 호텔요?”
하주연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백자호텔이라고, 명동에 있는 브랜드 체인 호텔입니다.”
“백자호텔! 거기 저도 알아요. 럭셔리하기로 유명한 국내 호텔 브랜드잖아요. 그런 호텔 객실에 가구가 팔리면 제법 이윤이 남겠네요!”
주연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 예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어느 부분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객실 가구를 수주한 것을 하 대리가 어떻게 아는 거지?’
하주연이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다가 예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입을 합 다문다.
냉랭하게 바뀐 표정이 어딘가 낯익었다.
“네. 뭐, 수량이 많으니까요.”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잠시 멀어진 거리.
예건이 열림 버튼을 누를 채로 하주연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감사해요.”
먼저 엘리베이터에 자리 잡은 하주연이 자신이 가야 할 층과 7층 버튼을 같이 눌렀다.
“하 대리님 말씀처럼 확실히 호텔 프로젝트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객실보다 로비나 라운지 같은 공용부분 가구들이 이윤은 더 많이 남더라고요.”
예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하주연이 반문했다.
“네?”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정정해 드리는 겁니다.”
“아~, 네.”
띵-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음에도 하주연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예건이 열림 버튼을 누른 채 하주연에게 말했다.
“5층, 도착했습니다.”
“아? 네네.”
당황해 허둥거리다 나가자마자 정색하는 걸 보니, 조금은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도 같아서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당황한 표정이 꼭 백자호텔 이혜수 대표를 닮았는데? 어…?’
그제야 이혜수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설마, 두 사람이 친족관계?’
그제야 백자호텔에서 보냈던 의뢰서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첫 거래임에도 명확히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의아했는데, 오늘 일로 유추해 보니 하주연이 손을 쓴 게 분명한 것 같다.
‘허허.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지? 소개해준다고 했어도 거절하지는 않았을 텐데.’
전후 관계가 어느 정도 선명해지자, 하 대리의 진짜 목적이 궁금해졌다.
하 대리와의 접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유추할 수 있는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기획팀으로 돌아오고 싶은 건가?’
평소 그녀 성격이라면 타인에게 부탁하는 게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요구를 할 셈이겠지.
일이라면 차고 넘치니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침 적절한 프로젝트 하나가 대기 중이기도 하고.
“운을 한 번 띄워봐야겠어.”
예건은 곧장 하주연 대리에게 연락을 취했다.
점심시간, 회사 인근의 커피숍.
예건과 마주 앉은 하주연이 미간에 옅은 주름을 그리고는 보고서를 살폈다.
물론 중간중간 예건을 힐끔거리는 것이 완전히 서류에 집중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예건의 기획팀 합류 제안을 들은 하주연이 전과 달리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미술관이라…. 재밌을 것 같네요.”
“그럼 설계팀장님과 인사팀에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급하게 일이 진전되자 하주연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그 전에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네.”
하주연은 잠시 심호흡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설계 7팀으로 간 건, 호텔 설계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그랬군요.”
예건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하주연이 물었다.
“놀라지도 않네요? 설마, 알고 있었어요?”
“그냥 넘겨짚은 겁니다. 백자호텔에 아르누보를 소개한 사람이 하주연 대리님이 아닐까 하고요. 이제 보니, 이혜수 대표님과 많이 닮으셨네요. 얼굴도, 말투도.”
“닮기는 누가 닮았다고. 전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닮았거든요.”
하주연이 발끈하며 소리쳤다가 주변의 이목이 끌린 것을 확인하고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아, 이혜수 대표님이 어머님이셨군요. 그건 몰랐네요.”
예건이 대수롭게 말하며 커피를 마시자 하주연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에 안 거예요?”
“백자호텔과 계약했다고 했을 때 어디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대리님이 먼저 객실 가구라고 딱 짚어서 말하셨잖습니까?”
“아…. 생각보다 눈치는 있으시네요.”
그제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그래서 일부러 나한테 빛가람 미술관 제안하는 건가요?”
“뭐, 겸사겸사죠. 그냥 기획팀으로 오라고 하면 안 오실 것 같기도 하고. 지난 회식 때 꽤 비관적이셨지 않았습니까?”
한 달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하주연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뭐, 좋아요. 어쨌든 기획팀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조건이 뭡니까?”
“별거 아니에요. 내가 하자는 프로젝트 하나만 같이 해주면 돼요.”
“그게 백자호텔인가요?”
하주연은 코웃음을 쳤다.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딱 맞춰요? 뭐, 이제 숨길 것도 없겠네요. 맞아요. 내년에 착수 예정인 제주 백자호텔, 그 프로젝트 나랑 같이해요.”
“내년이라면, 아직 여유 있네요. 그러죠.”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 아니에요. 잘 생각해서 대답해요.”
예건은 잠시 고민하는 척만 하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봤는데… 할 수 있어요. 하도록 하죠.”
하주연이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다 쉬워요?”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아니~, 호텔 설계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
“안 해봤으니, 이참에 연구하면 되죠. 어차피 호텔도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담고 있는 공간 아닙니까? 호텔 프로젝트라면 기획팀 팀원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흔히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니까.”
하주연은 분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요!”
“물론. 그런데 왜 그렇게 호텔에 집착하는 겁니까?”
하주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존중받고 싶어요. 앞으로의 내 직원들에게. 호텔은 공간과 함께 경험을 서비스하는 곳이니까. 내가 제대로 모르면서 남에게 업무를 지시할 수는 없잖아요.”
“좋은 태도군요.”
하주연의 말에서 호텔업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긴, 어떤 일이든 기초를 무시하고 대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건은 속으로 하주연의 열정을 감탄했다.
“호텔만큼이나, 미술관도 섬세하고 복잡한 건축물입니다. 기획팀에 오기로 힘들게 결정한 만큼 맡은 일은 제대로 하실 거라 기대하겠습니다.”
“흥!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아!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어요.”
“또 있습니까?”
예건은 피곤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제가 백자호텔 대표 딸이라는 거,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해요.”
“그러죠. 본인도 말하지 않는 개인사를 제가 발설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면 예건이 오히려 많았으니, 하 대리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경계가 조금 허물어지자, 항상 쌀쌀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하주연의 얼굴에도 조금 온기가 돌았다.
자신에 대해 더 숨길 필요가 없으니 안도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언제부터 기획팀으로 가면 되는데요?”
“이번 주말. 혹시 시간 괜찮습니까?”
예건의 물음에 하주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급한 거예요?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인수인계도 해야 하는데. 못해도 2주 정도는 걸릴 거예요.”
“아뇨. 하루면 됩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현장 먼저 둘러보려고요.”
“알겠어요. 이사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하지만 하주연은 머지않아 예건의 제안을 덥석 수락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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