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마주하다 (2)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내년 6월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허허. 그것밖에 안 남았다고?
너무 늦게 돌아온 것인가?
허탈한 마음에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나왔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제가 설계에 참여할 방법은 없습니까?”
말석이라도 설계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물은 것이었다.
리오의 곁에서 잠자코 있던 사무엘이 고개를 저었다.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관계자의 입을 통해 확답을 듣고 나니 더욱 속이 쓰렸다.
“일본인 조각가가 공사에 참여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그걸 결정할 때까지 30년은 걸렸다지요.”
저런.
지금부터 30년 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이미 완공을 앞두고 있을 터.
망할, 왜 하필 카탈루냐인만 공사에 참여시키라는 유지를 남겨서.
자신의 유언만 아니었어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 참여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군요.”
예건은 자신도 모르게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그럼,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뭔가요?”
그제야 미안한 듯 땅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리오가 시선을 들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일부라도 좋으니, 영광의 파사드 스케치를 좀 더 자세히 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이 놀란 듯 리오를 쳐다보았으나, 리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건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예건의 머릿속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 후 모습이 당장이라도 도면화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으니.
하지만 방금 사무엘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설계 참여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아까.”
“상세 스케치를 제게 주신다면, 어떻게든 당신이 설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리오가 속사포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부었다.
“처음에는 스케치가 워낙 인상적이라 조각물의 배치 같은 구성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설계에 적용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샤또 메종 발루아를 본 이후로 그 건축물의 형상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발루아는 제가 본 그 어떤 건축물보다 가우디의 건축 스타일이 잘 녹아들어 있는 건축물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아르누보 매장도 마찬가지고요.”
리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진행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 건축가님이 만들었던 탄생의 파사드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입니다. 이대로 건축물이 완성된다면 우리는 최고의 걸작을 조악하게 마무리한 후손이 되고 말 겁니다.”
“그건 설계자들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잖아.”
사무엘이 리오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리오는 그의 말을 일축했다.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고? 사무엘,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사무엘이 리오를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가우디 연구소는 70여 년 동안 가우디 건축가님의 건축을 연구해 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의 건축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후퇴했죠.”
리오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현재의 암울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가우디가 교본처럼 만들어 놓은 탄생의 파사드를 기준 삼아 성당의 다른 부분들을 만들고는 있으나, 아예 스케치가 남아 있지 않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하는 부분은 수많은 검증 작업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매번 완성도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고.
그런 와중 예건의 스케치를 보았고, 리오는 마치 가우디가 살아나 스케치를 남긴 것 같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고 했다.
예건은 그 말을 듣고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물론 제가 당신의 디자인을 가지고 간다고 해도 설계에 적용할 수 있을 거라는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오의 제안이 너무도 솔깃했다.
정작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건 예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전생의 작품이 소중한 만큼 현재의 삶도 중요했다.
가우디가 시작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한 세기를 건너 환생한 한예건의 디자인으로 완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오의 말을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리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설계 총괄 책임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상세 디자인을 하겠습니다.”
예건의 대답에 리오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설득 대상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직접 설득하겠습니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디자인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리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리오가 방도를 마련해 보겠다고 말했고, 둘은 명함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주소가 명확히 찍혀 있는 가우디 연구소의 명함.
뒷면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가우디의 스케치와 시그니처도 인쇄되어 있었다.
비록 당장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지난 바르셀로나의 겨울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었다.
안개에 가려 막막하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진 기분.
‘그렇다고 저들만 믿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지.’
예건은 한시라도 빨리 유명 건축가의 반열에 들어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극적인 예건과의 대면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기 위해 숙소로 돌아온 리오와 사무엘.
여전히 들떠 있는 리오와 달리 사무엘은 뚱한 표정으로 카메라만 만지작거렸다.
그게 자신의 갑작스러운 제안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로 읽은 리오가 최대한 사무엘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물었다.
“한예건 만난 이후로 계속 기분 안 좋아 보인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니.”
퉁명스럽게 말한 사무엘이 리오의 시선이 쏟아지자 크게 한숨을 쉬며 제 생각을 전했다.
“네 말대로 한예건이란 사람이 대단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떠맡은 건 정말 경솔한 일이었어. 딱 봐도 아직 어린 것 같던데 괜한 기대감만 심어준 건 아닌지….”
리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먼저 소장님께 보고드리고 나중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사무엘의 지탄 섞인 말투에도 리오는 자신의 뜻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너도 같이 봐서 알잖아. 난 어떻게든 그의 설계대로 이 디자인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봐.”
“하지만 리오!”
사무엘이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이 아무리 왈가왈부하며 다퉈 봤자,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는 탁상공론일 뿐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네가 반대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리오가 두 눈을 반짝이며 사무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니까.”
리오의 강한 의지를 재차 확인한 사무엘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네가 알아서 해. 난 이제 신경 끌 테니까.”
사무엘이 착잡한 얼굴로 호텔 룸을 나가버렸다.
리오는 홀로 상념에 잠겼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은 더 이상 바르셀로나만의 이슈가 아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오랜 기간 서유럽 문화의 기반이 되었던 가톨릭이라는 거대 종교의 사적이자, 바르셀로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사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특히나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한 기이할 정도로 특이한 탄생의 파사드는 전 세계 여행객들에게 알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선사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인류가 창조해낸 가장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가우디가 죽고 혼란 속에서 중단되었던 건축이 재건되기까지 엄청난 반대와 역경을 맞이했다.
특히 피카소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재건을 두고 탄생의 파사드 수준으로 만들 게 아니라면 차라리 완성을 시키지 말라는 뼈아픈 조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현대 조각가 수비라치가 고난의 파사드를 맡아 조각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건축물을 오히려 망치고 있다며 비난했던가?
리오는 똑같은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영광의 파사드는 가우디 못지않은 재능을 가진 디자이너의 디자인으로 완성해야 해!”
리오의 말은 허공에 잔잔히 흩어졌다.
* * *
한남 엘리우의 분양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오랜만에 최강건설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왔구나! 우리 아들. 아니, 업무차 왔으니 한 팀장이라고 불러야겠지.”
“하하. 사장님은요?”
“곧 오실 거야.”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열리고 최강수 사장이 들어왔다.
“한 팀장, 오랜만이군.”
인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예건을 말리고 상석에 대충 자리를 잡는 최 사장.
예건의 맞은편에는 성삼호 부장이 자리했다.
오늘 미팅은 예건이 아버지께 부탁해 마련한 자리였다.
착공이 예정된 18세대 중 예건과 임직원 소유분인 4세대는 이미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 설계를 진행하고 있었고, 성삼호 부장이 선분양한 55평 중 2세대는 가계약까지 마친 상황.
이제 남은 85평형의 분양 금액만 확정하면 언제든지 분양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다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홍보가 잘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예건이 준비해 온 제안이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
수완 좋은 최강수 사장은 예건을 보자마자 대뜸 근황부터 물었다.
“가구 매장이 엄청 유명해졌다며?”
“네. 다 사장님 덕분입니다.”
“하하하. 내가 일조하기는 했지. 한 전무가 망설이는 걸 등 떠민 게 나였으니까. 신문에도 나고 아주 대박이던데. 어때? 유명세만 있는 거야? 아니면, 매출도 짭짤한가?”
“매출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잘됐군. 정말 잘됐어.”
“입소문을 탄 덕인지 이전보다 국내에서 아르누보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백자호텔에도 가구를 납품할 수 있게 됐고요.”
예건의 말에 최강수 사장이 화들짝 놀랐다.
“뭐? 백자호텔? 국내 5성급 호텔 체인인 그 백자호텔 말인가?”
“네. 조만간 프레지던셜 룸 디자인도 저와 모어 스페이스가 맡게 될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예건은 가만히 최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예건이 백자호텔에 대한 운을 띄운 것은 오늘 그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 정도 정보로는 눈치채기 어려우려나?’
그러나 걱정도 잠시.
익숙한 회사 이름이 예건의 입을 통해 나오자 최강수 사장의 눈매가 착 가라앉았다.
“흠….”
양손을 모아 턱에 괴고 고민을 거듭하던 최강수 사장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자네와 모어 스페이스가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 같고.”
최강수 사장과 눈이 마주친 예건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분양 홍보에 잘 이용하시라는 뜻이죠.”
“하하하. 분양까지 걱정해주는 건가?”
최강수 사장이 크게 웃었다.
“당연하죠. 분양이 잘 되어서 2차 분양도 하셔야 하니까요.”
“2차 분양?”
최강수 사장이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리오 일행과 헤어지고, 예건은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길 유능한 건축주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야겠다고 판단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사업 수완 좋고 결정도 성격처럼 화끈한 최강수 사장이었다.
그와 함께 진행 중인 한남 엘리우.
디자인을 진행하면서도 그 규모가 크지 않다는 것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들쑥날쑥 형태도, 모양도 제각각인 무질서한 한남동 한강 변에 아무리 좋은 디자인의 빌라 몇 동 들어선다고 그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저 무질서에 무질서를 더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건축물이 적절한 군락을 이루며 한강 도로변의 미관을 밝히는 주축이 된다면 어떨까?
예건의 눈앞에 한강 우측으로 늘어선 한남 엘리우 단지가 그려졌다.
단지와 단지 사이를 잇는 아기자기한 정원, 경사를 따라 한강을 바라보며 통일감 있는 와중에도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는 건축물들.
겨우 몇 동의 건축물일 때와는 비교 불가인 장관을 이룰 것이 분명했다.
예건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조은은행 지점장을 찾았고, 그를 통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한때 피카소에게 속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돈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그였다.
엘리우는 반드시 성공한다.
“사업을 좀 더 키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강뷰 프리미엄 명품 주거 브랜드, 한남 엘리우 팰리스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