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오해의 씨앗
예건이 기획팀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기획팀 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경록 차장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했다.
대충 눈치를 보니 이 사단의 시작은 윤 주임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영광 씨는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게…. 좀 전에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한 팀장님, 제가 진짜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요, 그냥 영광 씨도 확인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거든요. 좋은 일이잖아요.”
예건은 윤 주임이 자책하지 않도록 심각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팀원들에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영광의 소속이 아직 모형팀으로 되어 있었으며, 미리 확인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니 너무 신경 쓸 것 없다고.
“그런 거면 급여 회수하고, 수정해서 다시 입금하면 안 되나?”
“그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 차장의 제안에 그 방안이 마음에 드는지 윤 주임도 환한 얼굴로 동조했다.
예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다행히 엘리우 설계비가 증액되었거든요. 이 상황에 대해서는 김 대표님께 보고드리고 제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예건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팀원들을 독려했다.
“팀원분들이 열심히 노력해주신 덕분에 제가 안심하고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던 겁니다. 성과급은 그런 의미에서 지급한 것이니 좀 더 기뻐하셔도 됩니다. 내년에는 더 바빠질 테니까, 보약 챙겨 드시라는 의미기도 하고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제일 효과 좋은 거로 찾아볼게요.”
“장 과장님, 운동도 잊지 마세요. 요즘 계속 앉아만 계셔서 그런지 배가 많이 나오신 것 같은데, 혼자 운동하시는 거 힘드시면 저랑 같이 주말마다 등산하실래요?”
등산이란 말에 하주연이 얼른 자신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딴 곳을 바라본다.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상황을 하주연에게 들어 알고 있던 장 과장이 양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아, 아니. 괜찮아. 그냥 동네 헬스장 다닐게. 아하하하.”
장 과장이 일부러 더 개그스럽게 호들갑을 떨자, 그제야 팀 분위기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예건은 팀원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이 차장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이 차장님, 영광 씨 들어오거든, 아무런 설명하지 마시고 저한테 가보라고 해주세요.”
“어, 그러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영광이 예건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사무실 풍경에 영광이 눈을 빛내며 두리번거렸다.
다양한 사이즈로 출력된 도면들이 벽면 2곳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업무용 테이블 위에도 프리 핸드로 스케치한 종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언뜻 보아도 건림건축의 프로젝트가 아닌 것들도 제법 많아 보인다.
‘우리 회사는 겸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분명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그런 조항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영광이 보조석에 앉자 예건은 현재 영광이 성과급에서 제외된 상황에 대해 곧바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모형팀 주효섭 과장님이 제 고과 성적을 걱정해서 기획팀에 잠시 파견된 거로 인사 처리를 하셨단 말인가요?”
“네, 제가 성과급 지급 전에 미처 챙기지를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긴 했지만. 기획팀에 합류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모형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에 영광은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사원 조무래기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건가?’
한예건과 똑같이 인턴으로 시작했으며 그 또한 화장실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정직원이 되었다.
하지만 반년도 되지 않아 기획팀 팀장 자리를 꿰차고 앉은 한예건과 여전히 신입사원 쩌리로 전락한 자신을 비교하니 입맛이 씁쓸했다.
예건의 밑에서 일한다는 게 불편했음에도 그가 자진해 기획팀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자신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어떻게든 그 간격을 좁혀보겠다는 목표로.
하지만 딱히 얻은 것은 없었다. 한예건이란 인물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어느 순간부터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고, 그와 처음 설계팀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운 좋은 녀석. 나에게도 기회만 주어졌다면!’
영광은 자신이 기획팀장을 맡았더라도 한예건보다 못하지 않았을 거란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소속 팀원을 못 챙겨 성과급을 못 받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이후 성과급에 대해 예건이 뭐라 말을 이었으나 영광의 귓등을 스칠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예건이 그리 말하고는 영광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라는 건지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예상하던데 대충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았겠지.
하늘 같은 직장 상사에게 부하직원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다.
영광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이해해줘서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셔도 됩니다.”
영광은 꾸벅 묵례하고 기획팀장실을 쌩하니 나가버렸다.
“정말 괜찮은 건가?”
김수훈 대표의 도움으로 영광은 새해부터 기획팀으로 이동하고, 미지급된 성과급은 1월 급여일에 지급하는 걸로 말을 맞춘 후였다.
전생이나 현실이나 어린 조수들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친 그가 전화를 들어 익숙한 내선 번호를 눌렀다.
“아! 이 차장님, 오늘 저녁에요.”
영광의 일은 잘 마무리해 뒀으니, 저녁에 팀원들 회식 좀 챙겨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한 팀장은? 같이 안 가?
팀원들 회식 자리에 끼어드는 눈치 없는 팀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회식은 편하게 해야지.
“전… 일이 바빠서요.”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이 차장이 서운한 듯 말했다.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요.”
그래 알았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저녁은 챙겨 먹고 일해.
“하하. 네. 염려 마세요.”
전화를 끊자 다시 조용해진 사무실.
오늘따라 사무실 내의 온도가 5°는 떨어진 것 같다.
썰렁한 기분에 잠시 멈칫한 예건은 생각을 비우려 도리질했다.
“일이나 하자.”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니.
* * *
사무실 근처의 유명한 양곱창집.
불판 위에 양곱창이 지글지글 맛있게 익어갔다.
“차장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제가 쏴야 하는데….”
“에라~ 김 대리야. 입에 침이나 닦으면서 말하든지. 그렇게 좋아죽는 얼굴로 그런 말 하니까 하나도 안 웃긴다. 우리 마눌님한테 허락받았으니 걱정 말고 실컷 먹어. 끽해야 100만 원밖에 더 나오겠냐? 안 그래?”
“흐흐흐. 그럼 2차는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하! 당연하지. 나 다음에는 장 과장이 쏘는 거야.”
“설마 그렇게 3차까지 가는 건 아니죠?”
“뭐 어때? 내일이 토요일인데, 오늘 하루 죽자 하고 노는 거지. 안 그래도 힘든 직장 생활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하하하. 그렇죠. 그렇죠.”
여기저기서 환한 웃음꽃이 만발했다.
이경록은 다소곳이 앉아 곱창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하주연 대리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아니에요.”
“설마 양곱창 안 먹는 건 아니지? 내가 일부러 우리 하 대리 생각해서 여기 온 건데.”
하주연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보고 건너편의 장 과장이 눈치껏 물었다.
“못 먹겠으면 다른 거 시켜줘?”
“됐어요. 맛있으니까 비싸겠지.”
“그래, 그래. 하 대리, 안 먹어봤으면 이참에 먹어봐. 인생 그래봐야 한평생 80밖에 못 사는데, 양곱창이 무슨 맛인지는 알아야지.”
“이 차장님, 오늘따라 유난히 신나신 거 아세요?”
하주연이 똑 부러지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오늘 같은 날 기분 안 좋으면 그게 이상하지. 안 그래? 장 과장.”
“그럼요, 그럼요.”
지글지글.
이 차장이 팔을 붙이고 직접 구운 양곱창이 노릇노릇 알맞게 익자, 커다란 고기 한 점을 턱 집어 하주연 대리의 앞접시에 놓아준 이경록.
“여기 진짜 맛있다니까. 나 믿고, 딱 한 번만 먹어 봐. 우리 마누라도 여기서 한 번 먹어 본 후로 맨날 양곱창 먹으러 가자고 노래를 부른다고.”
오기가 생긴 하주연이 큼직한 고기를 소금장에 쿡 찍어 한입에 넣었다.
잠시 후.
큰 눈이 반짝 떠졌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무슨 맛이 이래요? 고무 씹는 맛일 줄 알았는데.”
“하하하. 그러게.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평소 냉랭하던 하주연이 양곱창의 맛에 무장 해제되고,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던 즈음.
장현우 과장이 아쉬운 듯 말했다.
“우리 한 팀장님도 양곱창 좋아하는데.”
“바쁘다잖아. 요즘 정신없는 것 같던데.”
“그래도 저녁이라도 같이하면 좋았을 텐데…. 요즘 들어 바빠서 점심 식사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더라고요.”
장현우 과장은 한 팀장의 마누라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갈 때 좀 싸 가던지.”
“에이~ 차장님도. 바로 구워야 맛있지 여기서 익혀 가면 맛있겠어요? 그리고 노총각 배불뚝이 아저씨가 도시락 싸가는 걸 누가 좋아한다고?”
김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장 과장의 배를 흘겨봤다.
“뭐? 노총각 배불뚝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저녁마다 술 한 잔 사 달라고 꼬신 건 너였잖아. 왜 나만 찌고 넌 안 찌는 건데에~?”
술이 적당히 들어가서인지 자리가 유독 떠들썩해졌다.
회식 내내 영광의 눈치만 보며 연거푸 술을 들이켜던 윤민수 주임이 술기운에 용기를 내 용서를 구했다.
“영광 씨, 미안해. 나는! 지인-짜, 하나도 모르고-.”
줄곧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던 영광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지더니 씁쓸한 표정을 하고 대답했다.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럼, 내년부터는 기획팀으로 바뀌는 거야?”
“…글쎄요. 좀 생각해 보려고요.”
“왜? 잘 마무리된 거 아니었어? 분명히 한 팀장님이 본인이 잘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말라고 했었는데….”
윤 주임의 반응에 영광은 싸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 팀장이 제가 모형팀 소속인 거, 정말 몰랐을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하하하- 아하하-
“…찾아보면 되는데, 저를 일부러 … 아닐까요?”
그러나 마지막 질문은 윤 주임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묻혀버렸기에.
* * *
회식을 마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 주연, 30분쯤 뒤에 그녀 앞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비닐봉지로 포장된 물건을 건네받은 하주연은 그대로 사무실로 향했다.
주연의 손에 들린 것은 백자 호텔에서 룸서비스로 판매하는 고급 한우 스테이크였다.
기획팀장실에서 여전히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아직도 일하느라 퇴근을 못 했나 보다.
“쯧. 아무리 바빠도 밥은 챙겨 먹고 일해야지. 이런 걸로 팀원들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근무 태만이라는 걸 모르나?”
겉으로 내뱉는 말과 달리 입꼬리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주연은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똑똑.
“네? 누구세요?”
“저… 하주연인데요.”
“아, 잠시만요.”
주연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손으로 빗어 내리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예건이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오늘 회식이라더니, 어떻게?”
“장 과장님이 저녁도 안 먹고 일하는 것 같다고 해서요. 그러면 속 다 버려요.”
쌀쌀한 표정과는 반대로 온기가 남아있는 스테이크 도시락을 내민다.
“어? 감사합니다. 잠시 들어 오실래요?”
곤란한 표정의 예건 뒤로 불쑥 장 과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하주연 대리도 왔어?”
놀란 하주연이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과, 과장님? 아까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갔지. 갔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이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가 한 팀장 뭐 좋아하는지 물어만 봤는데, 자꾸 장 과장이 눈치도 없이 따라온다잖아.”
“헤헤. 하 대리님, 저도 있어요.”
“나도. 우리는 여기서 2차 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윤 주임과 김 대리도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든다.
하주연의 손에 들린 비닐을 냉큼 뺐어간 장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를 벌름거렸다.
“우와~ 이게 뭐야? 백자호텔? 설마 그 유명한 한우 스테이크 뭐, 그런 건 아니지?”
“냄새가 장난 아닌데요? 설마 1인분만 사 온 건 아니죠?”
이미 예건의 테이블 위는 팀원들이 가져온 야식으로 가득했다.
“하 대리도 왔으니까, 지금부터 3차 하면 되겠네요. 이 차장님, 맥주 좀 더 사 올까요?”
“스테이크가 왔는데, 맥주로 되겠어? 와인이랑 소주도 사 와야지!”
“넵!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건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하하. 오늘은 더 이상 일하기 힘들 것 같네요. 일단 들어오세요, 하 대리님.”
그렇게 건림건축 기획팀의 소란스러운 연말 3차 회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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