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인식의 전환 (2)
건축과 공간 1월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며 나사 빠진 사람처럼 배시시 웃는 정다은.
비록 잡지의 가장 뒷면 ‘준공 소식란’에 지나가듯 짧게 실린 기사였지만, 자신의 이름이 디자이너로 적힌 건축물이 잡지에 실렸다는 것만으로 신이 났다.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내가 디자인한 건축물이 만들어지다니!”
그녀의 물음에 차정석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아요?”
“그럼요! 대학생 때 건축공모전도 장려상 받아서 이름 한 줄 실리고 끝이었단 말이에요. 집에 가서 자랑해야지~.”
정다은과 차정석, 서영광, 오태수는 인턴 입사 후로 쭉 한두달에 한 번 정도 모여 정보를 나눴다.
오늘은 차정석이 출판팀에서 챙겨준 월간지를 나눠주려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한예건 씨가 만든 디자인은…. 왜 여기 안 실렸을까요? 같이 실렸으면 이참에 얼굴도 좀 보고 그랬을 텐데.”
다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종일관 시니컬한 표정으로 잡지를 들여다보던 영광도 궁금한지 고개를 들었다.
“그게,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단독 기사를 준비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단독 기사란 말에 영광의 눈썹이 움찔하며 물었다.
“단독 기사요?”
“그 왜, 음악당 후원 디자인도 한예건 씨, 아니 한 팀장이 초안 잡았잖아요. 그게 최근에 실시 도면이 마무리되어서 그거랑 같이 특집으로 올릴 모양인가 보더라고요.”
“와~ 후원… 그게 정말 되는구나. 대단하네요.”
정다은이 부러운 듯 눈을 끔뻑거렸다.
“하긴, 시작부터 우리랑 다르긴 했죠. 건축은 천재가 없다고 하던데…. 순 거짓말이야.”
다은의 투정부리듯 말하자 정석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후후, 천재? 글쎄요. 저랑 오 대리님은 한 팀장이 회귀자일 거라고 합의했는데. 천재는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나 있지, 회귀자는… 답이 없어요.”
차정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노련한 서양의 건축 전문가들 앞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프랑스의 한예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보았던 예건은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은의 시선이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는 영광에게 향했다.
“들리는 소문에 기획팀은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공모전팀 못지 않게 다양하다고 하던데. 진짜 부럽네요, 영광 씨.”
“뭐, 일이야 다 똑같죠. 부러울 것까진.”
영광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정다은은 생각이 다른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팀 와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요. 전 몇 달째 철근 배근도만 수정하고 있는데 그것도 맨날 틀려서 야단 맞는 걸요? 거더하고 빔을 아직도 구분 못한다고….”
“그래도 우리 중에 다은 씨가 실무는 제일 잘 알잖아요. 안 그래요?”
차정석의 두둔에 영광이 초를 쳤다.
“그깟 실무 잘 하면 뭐합니까? 디자이너가 컨셉 하나 바꿔버리면 몇 달을 고생했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데.”
서영광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잡지를 챙겨 든 영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오늘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네요.”
“어? 영광 씨! 벌써 가?”
뒤늦게 가게에 들어서던 오태수가 그를 붙잡았으나, 영광은 냉랭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왜 저래? 싸웠어?”
“아뇨, 그냥 혼자 화내고 가던데….”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세 사람은 황당한 표정으로 영광이 사라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기획팀의 1월은 평소보다 분주했다.
한남 엘리우 팰리스의 마스터플랜, 1차 분양 설계 변경, 2차 분양 인허가 접수 도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1월로 예정되었던 네오소프트의 경영진 보고회도 내부 사정으로 자꾸 미뤄지더니, 결국 1월 주주총회 이후로 변경되었다.
김수훈 대표의 부재로 빛가람 미술관 디자인 보고가 2월 초로 미뤄진 것이 그나마 다행인 상황.
기획팀 모든 인원이 엘리우 팰리스의 작업 완료를 위해 투입되고도 부족했기에 임시로 다른 부서 팀원을 2명이나 추가 지원받았다.
야근과 주말 근무까지 불사해야 하는 그야말로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팀원들의 사기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한 팀장, 2차 분양도 완판이라며?”
“네.”
“미쳤네, 미쳤어. 한 채당 35억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게 건축공사 최소 금액입니다. 인테리어 옵션을 추가한 평균 가격은 대략 45억 내외고요.”
최종 확정된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전체 세대수는 대략 50세대.
총 투자사업비 250억 원 규모로 시작했던 고급 빌라가 분양총액 2,300억 원 규모의 국내 최고급 주거타운이 된 것은 겨우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허허. 우리나라에 부자들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우리 같은 일반 직장인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만져 보기도 힘든 돈인데 말야.”
예건은 쓰게 웃었다.
엘리우 팰리스는 19세기 자신이 지었던 구엘 궁전에 비하면 규모도, 면적당 투입되는 투자금도 그리 큰 편은 아니었기 때문.
건축가의 상상을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돈이 든다.
판타지 속 연금술사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는 과학자들이 매번 돈에 집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동질감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터.
“한 팀장이 갑자기 전체 마스터플랜을 바꿔야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설마 그게 다 팔릴까 걱정했거든? 물론 분양 세대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그만큼 한 가구당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올라가니까.”
“대신 주거 환경이 그만큼 좋아졌잖아요. 세대별로 소유하는 지분도 늘어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려면 그 정도 비용은 지불하는 게 맞죠.”
이 차장이 회의를 위해 펼쳐 놓은 배치도를 내려다보았다.
“하긴. 돈만 있다면 나도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긴 해.”
이 차장의 말은 건축가에게 극찬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공을 들여 설계한다 하더라도 어느 한구석 아쉬운 곳은 꼭 있기 마련이니까.
“한 팀장, 혹시 아파트는 지어볼 생각 없어? 한 팀장이 디자인한 아파트라면 달라도 뭔가 다를 것 같아서 말이지.”
아파트.
일전에 공동주택 단위세대 크리틱에서 발표했던 평면들이 생각났다.
“혹시 전에 설계 5팀에서 진행하던 평면 특화 프로젝트는 어떻게 됐는지 소식 아세요?”
“아~ 그거? 송정환 이사님이 그때 한 팀장이 만들어준 계단식 아파트 구조에 필이 꽂혔는지, 엄청 열정적으로 건설사에 어필해서 그 방향으로 배치가 결정 났다고는 들었어. 평면은 현관을 별도로 구성하는 거랑, 3베이 평면이 적용됐다고는 하는데 세대수가 많지 않아서 면적별로 제일 잘 팔릴 것 같은 타입 하나씩만 선정됐다고 하더라고.”
결국, 자신이 만든 대부분의 평면이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구조는 벽식 구조로 가는 거죠?”
“요즘 아파트들이 다 그렇지. 사업 수익을 많이 남기려면 비용면에서 그게 제일 싸니까.”
아쉬웠다.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라멘 구조를 이용하면 층간 소음도 해결하고, 거주민의 생활 방식에 어울리는 다양한 평면 타입을 적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건만.
사업이라는 게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활동이라지만, 최고의 효율만 따져서는 결코 좋은 집을 만들 수 없는 법이다.
시행사만 이득을 보는 셈이다.
건축가가 머물고 싶은, 서민을 위한 꿈의 아파트라….
직접 도전해 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이 차장님, 지금 빌라 산다고 하셨죠?”
“어? 응.”
“2억 정도 있어요?”
“2억? 그렇게 큰돈이 나한테 있겠어?”
“지금 빌라 전세금이 얼만데요?”
“변두리에 있는 20평 빌라라 얼마 안 해. 8천만 원.”
연말에 보너스 탄 것도 있으니, 모으면 얼추 1억은 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흠….”
잠시 고민하던 예건이 대뜸 물었다.
“은행에 5천만 원 빌려서 내 집 마련할 수 있다고 하면, 한번 해 보실래요?”
“응?”
5천만 원.
적은 돈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일한다면 못 갚을 금액도 아니었다.
이경록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아파트 사업, 진짜 해 보려고?”
“최고급 주택 단지도 짓고 있는데, 아파트 설계가 대수겠어요? 수요만 충분하면 해볼 만하죠. 특화 설계한 평면 중 어떤 게 호응이 좋은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흠. 위치는?”
그건 지금부터 찾아볼 생각이다.
찾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마침, 아파트가 자리하기 좋은 위치를 가장 알 수 있는 지표가 눈앞에 있었다.
서울 시내 회사에 근무 중인 결혼 10년 차, 4인 가족의 가장이.
* * *
도도도도.
우다다다.
“다혜야, 정훈아! 그만 좀 뛰어.”
오후 5시 30분.
한창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잠시를 참지 못하고 작은 집안을 누빈다.
다혜가 유치원에서 만들어온 비행기가 문제였다.
한창 재밌게 놀고 있는 애들한테 엄마의 지적이 들릴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씻고 있던 콩나물을 두고 손의 물기를 닦았다.
“너희 자꾸 뛰면, 아랫집 호랑이 아줌마가 ‘어흥’ 하고 쫓아온다!”
그나마 말귀를 알아듣는 6살짜리 딸아이를 붙잡고 주의를 주는데, 여지없이 신경질적인 벨소리가 울렸다.
딩동딩동. 딩동딩동딩동.
민희는 황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도끼눈을 하고 인상을 쓰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내가 정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니까!”
“죄송해요….”
목청 높은 아줌마의 짜증에 민희의 목소리가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아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힐끔 집안을 살핀 아줌마가 쯧쯧 혀를 차며 민희를 나무랐다.
“저 봐, 내가 바닥에 쿠션 좀 깔아 놓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안 해놨네. 새댁은 내 말이 그렇게 말 같지가 않아?”
“깔아 놨는데….”
“거실 저 중앙에만 깔아 둔 거로 되겠어? 온 방을 다 뛰어다니더만.”
“그게…. 스펀지가 청소하기도 너무 힘들고, 바닥에 전부 다 깔려면 비용도 너무 많이 들어서요….”
“어머 어머, 그래서 나보고 비용이라도 대라는 거야 뭐야?”
“…그게 아니라.”
“좋은 게 좋은 거랬다고,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새댁 애들 즐겁게 뛰어노는 통에 우리 아들 지난 모의고사 성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아?”
아랫집 아들은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 애들 잠자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민희는 또 다른 아들이 있으신 거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괜히 신경을 긁어 책망을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여기서 1년은 더 살아야 하잖아. 요즘 좋은 제품 많더만. 쿠션 좀 빵빵한 스펀지로 사서 깔고, 나 신경 좀 안 쓰이게 해줘.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네, 조심할게요.”
시끄러운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흥분한 아주머니가 돌아서며 혼잣말을 했다.
“어휴~ 이래서 세 놓을 거면, 애 없는 신혼부부랑 계약하라고, 그렇게 주인한테 신신당부했는데. 재계약은 절대로 못 하게 막아야지, 원~.”
숨이 콱 막혔다.
아주머니야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집 없이 전세를 전전하는 것도 서글픈데, 왜 보석 같은 자신의 아이들이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서둘러 눈물을 닦고 돌아서니, 아랫집 아줌마의 등장에 숨죽이고 방에 숨어있던 아이들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호랑이 아줌마 갔어?”
“…응.”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안 다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이제 집에서 안 뛸게. 정훈이랑 얌전히 책만 읽을게. 응? 그러니까 울지 마.”
딸아이의 말에 괜히 억장이 무너졌다.
“옷 입자.”
“응? 어디 가?”
“놀이터 가서 신나게 뛰다 오자.”
빌라촌에는 놀이터가 없다.
아이들이 놀 만한 장소로 가려면 아이 둘을 데리고 공원이 있는 곳까지 족히 15분은 걸어야 한다.
평소라면 애들을 다독여 집에 머물렀겠으나, 가끔은 아이들도 자신도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진짜?”
“그래, 저녁도 맛있는 거 사 먹고.”
“와! 엄마, 나는 돈까스!”
폴짝폴짝. 쿵쿵.
멋모르고 신이 나서 뛰는 정훈이를 보고 아차 하는 마음에 다혜가 엄마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온 엄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