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파리 전시회 (3)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파악한 시공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어? 아니, 내 말은 일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예건은 시각을 확인하고는 창준에게 물었다.
“작업자들이 손을 멈춘 게 언제입니까?”
“어, 그게 20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요.”
예건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말했다.
“일당은 정확히 2시 10분까지 작업한 거로 책정해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리오 소장님께 이 일은 그대로 전해드리죠.”
예건이 당당하게 나가자 되려 시공팀장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괜한 게으름을 피우다가 하루 공치는 건 물론이요, 리오 소장과의 관계마저 빡빡해질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에헤이~,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흠흠. 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하면 되지. 자자, 뭐해? 얼른 작업 시작하자고.”
시공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다급히 쉬고 있던 작업자들에게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예건은 서두르는 그들에게 안전에 주의하라 지시하고는 한동안 그들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사불란 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더는 요령을 피우지 않을 것 같았기에 다시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하하하. 제가 그렇게 부탁해도 소용없더니, 실장님 한 마디에 바로 해결되는군요.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조창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예건과 시공팀장 사이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 턱이 없었으니 뭔가 신묘한 방법이라도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자기 일당이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는지 알려줬을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나 저들을 다시 일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일당 때문만은 아니다.
이렇게 작은 단발성 프로젝트쯤 가뿐히 무시하고 얼마든지 돌아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하지 않은 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관계 때문이다.
예건에게 저들을 소개해 준 리오 소장과의 관계.
생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력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회는 예건에게 중요했다.
단순히 가구라는 상품을 소개하고 판매를 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
“내일까지는 목공 바탕 작업이 끝나야 합니다. 혹시라도 아까 같은 일이 생기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네, 실장님.”
조창준은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인 예건은 현장 구석에 마련해 놓은 임시 자리로 돌아갔다.
잠깐 자리를 비운 찰나의 시간 동안 주인 없는 자리를 차지한 건 희뿌연 먼지였다.
예건은 먼지 앉은 의자를 고민 없이 툭툭 손으로 털어내고 다시 작업을 이어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회장 공사가 마무리되고 이제 전시까지 하루를 앞둔 상황.
고생한 조창준을 먼저 숙소로 돌려보내고, 예건은 마지막 점검을 위해 현장에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었다.
베이지 컬러를 주조색으로 사용한 따스한 느낌의 아르누보 공간과 검정색 바탕에 매끈한 백색 가구들이 상반되면서도 세련된 대조를 이루는 레브.
그 사이를 오가는 아르누보 장식으로 마감한 거대한 통로와 고딕 스타일의 원형 창, 조명으로 연출한 한 줄기 빛.
예건의 과거와 현재를 빗대어 만든 공간이다.
검은 바닥과 벽면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지이며, 예건은 그 속에서 부유하는 ‘비행’과도 같은 존재다.
마치 빛 한줌 들지 않는 자궁 속에서 태어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태아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요동치는.
예건은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위태로운 모서리에 서서 원형 창을 바라보았다.
한 줄기 빛을 통해 삼각형의 밑변, 실제로는 반만 완성된 스타코 벽면이 보인다.
그곳에는 거대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화려한 거울이 있고, 맞은편의 책상을 비춘다.
25도 틀어져 입체적으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그가 한창 인테리어 디자인 중인 한남동 주택 평면도와 함께 다양한 종류의 필기구가 놓여 있다.
자신의 사무실을 떠올리며 만든 테이블, ‘창조하는 책상’이다.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사이즈의 책상은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 측에 면하는 부분은 10㎝의 폭으로 단을 높여 필기구를 넣을 수 있도록 서랍을 만들었고, 그보다 7㎝ 정도 낮은 상판은 사용 목적에 따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각도 조절 기능을 부여했다.
굴곡과 장식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실용성을 보다 가미한 디자인.
사군자 시리즈와 같이 심플한 현대적 공간과 잘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건은 전시회 동안 저 테이블에 앉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생각이다.
자신의 설계 과정을 전시회에 방문하는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런 예건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목적은 한예건이란 건축가를 세상에 선보이기 위한 것.
자신의 의도를 아는 것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어떻게 하면 그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리저리 고민해 보는 중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한.”
돌아보니 니콜이 양손 가득 커피와 간식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길래 그렇게 불러도 몰라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하하. 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죠. 가요, 내가 좋은 자리 봐 뒀어요.”
예건은 니콜을 따라 전시회장 밖으로 나갔다.
해가 져 어두워진 야외 공터는 아무도 지나치는 이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으나, 마감 준비로 분주한 전시회장 내의 불빛 덕분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준비랄 게 있나요?”
“바이어들 많이 올 텐데, 일일이 상대하려면 적어도 서너 명은 상주해야 할 것 같은데. 저희 직원을 좀 붙여 드릴까요?”
예건은 고개를 저었다.
“명함은 양쪽 부스에 비치해 뒀고, 가이드북도 있는데요. 상주 인원은 2명이면 충분합니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 상주 인원이 많으면 그 자체로 복잡하기만 할 것이다.
내일은 류광일 본부장도 합류하기로 했고, 셋이서 번갈아 가며 전시장을 관리하면 될 터.
외국어에 그다지 능하지 않은 조창준에게는 초반 준비만 같이 해 주고 이후로는 전시장 투어나 하면서 식견을 넓히라 말해 두었다.
“방문객들이 많아서 꽤 바쁠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그렇게 호기롭게 말했으나, 하루 뒤 예건은 니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토요일 오전 전시회장이 열리기 전 니콜이 다시 전시장에 방문했을 때, 예건의 표정에는 일전에 보였던 여유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하루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안쓰러운 표정으로 묻는 니콜의 질문에 예건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방문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매회 3천여 개의 브랜드가 참가하고, 방문객만 8만 명이 넘는 규모의 전시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니콜은 예건이 파리에 있는 동안 잘 보살피라는 오너의 지시를 상기하고,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인원이 더 필요할 거라고 했잖아요.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제가 도울게요.”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대신. 나 시급 무지하게 비싼 거 알죠?”
“물론이죠, 도와만 주시면 시급은 물론 근사한 저녁까지 대접하겠습니다.”
니콜은 예건에게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나절 만에 자신의 겁 없던 제안을 후회했다.
정말 사람이 많아도 이렇게 끓이지 않고 밀려드는 건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 * *
금요일 오전 8시.
시작은 그냥 평이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 예건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이경록 차장이 보내온 도면을 검토하고 있었다.
9시쯤 류광일 본부장과 조창준이 도착하고, 그들에게 간단한 업무 지시를 내리고 다시 도면에 집중했다.
첫날이고, 평일인지라 관람객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급한 업무를 먼저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소란스러운 말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부스 내에 사람이 가득했다.
시각을 확인하니, 도면에 집중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아직 전시회가 오픈하는 10시가 되려면 30분 넘게 남았는데 저 관람객들은 누구란 말인가?
잠시 오가는 말소리를 들어보니, 저들 모두 전시회에 참가한 업체들인 것 같았다.
‘자기들 부스는 내버려 두고 왜 다들 여기에 있는 거지?’
의아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류광일 본부장이 마이크를 든 흑발의 미녀와 함께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
“한 팀장, 인터뷰하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
전시회 첫날 오전에 주최측에서 마련한 인터뷰가 있을 거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건은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기자를 맞이했다.
“인터뷰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30분 정도면 됩니다. 전시회 시작 전에 끝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인터뷰어가 화이트 컬러의 정장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한 예건은 그녀의 의상과 더 잘 어울리는 레브 매장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주최 측에서 말한 인터뷰가 방송용이었나? 커다란 비디오 카메라가 둘의 맞은편에 자리하는 게 아닌가?
조금 의아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자신을 에멜린 바종이라 소개한 기자는 카메라 기자가 보내는 큐사인과 함께 질문을 시작했다.
“역대 메종&아트에 초대된 올해의 신진 디자이너 중에서 올해 처음으로 동양인을 선정했는데요, 감흥이 어떠신가요?”
감흥? 메종&아트 신진 디자이너로 뽑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인 건가?
“글쎄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무덤덤한 예건의 대답에 에멜린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얼떨떨하신 거군요. 하긴 동양인에게는 쉽게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니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럼, 한예건 씨가 디자인했던 샤또 메종 발루아 복원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한데요. 이점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의식이 과한 인터뷰어군.
예건은 자신의 뜻을 멋대로 해석하는 그녀의 언행에 살짝 짜증이 났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싶은 마음에 이어진 질문에 답했다.
“제 소신대로 완벽하게 발루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복원은 건축물을 원래의 형태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발루아의 외관은 복원의 개념이 아니라 리뉴얼이라고 평가해야 할 정도로 확연히 달라졌던데요. 완벽한 완성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상대는 예건의 말을 물고 늘어지며 발루아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다.
동시에 예건은 자신이 이질감을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다.
메종&아트의 주최 측이 이번 전시와 관련 없는 질문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함정이구나!’
그제야 자신이 인터뷰어의 소속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이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마 이들은 이름도 모르는 비전문가 동양인이 발루아 복원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요, 수석 디자이너로 불리는 것에 불만을 가져 이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아르누보 부스 주변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충분히 당황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예건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전생에 온갖 모진 풍파를 경험했던 그였으니, 이쯤은 아무것도 아닌 셈.
예건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카메라를 직시하고 입을 열었다.
“원형 그대로의 복원은 유일무이한 가치를 가진 것을 보존하기 위해, 혹은 인류가 잃어버린 기술의 재확인을 위해 필요한 수단입니다. 정말 발루아가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다면, 지금처럼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건축은 진화해야 합니다. 진화를 멈추는 순간 예술은 죽은 것이 되니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