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다시, 바르셀로나 (2)
아직 펼쳐지지 않은 A2 사이즈의 용지를 확인한 벤하민이 예건의 곁에 앉은 리오를 노려보았다.
‘한예건에게 도면을 그려 나를 직접 설득하라 조언한 건가? 괜한 짓을 했군.’
벤하민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오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과거 벤하민이 예건의 스케치를 보고 놀랐던 것은 그 스타일이 너무도 가우디의 것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가우디가 직접 쓴 것이라 혼동될 정도로 시그니처도 완벽히 동일했고.
물론 그 정도 복제품을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해외 전시를 위해 자체적으로 복제품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고.
하지만 스케치를 구체화하고 가우디 스타일의 도면을 그리는 것은 웬만한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년 동안 설계에 참여하고 있는 가우디 연구소 연구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벤하민은 그 점을 상기하며 가슴속에 불같이 일은 동요를 잠재웠다.
‘그저 스케치를 확대한 것에 불과할 거야.’
아무리 한예건이 가우디를 열심히 연구했다 한들 설계 도면마저 완벽히 그려냈을 거라 상상하기 어려웠다.
박물관에 공개된 도면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허나, 전혀 궁금하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일 터.
숨기고 있던 호기심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동으로 드러났다.
예건은 상체가 앞으로 쏠린 모레노 소장의 자세를 통해 조급한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
‘후후후. 신경 쓰이나 보군. 원래라면 참고라도 하라고 도면을 넘겨줄 생각이었지만….’
파리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설계자로 공개되지 않아도 좋으니 대성당의 완성에 참고해 달라며 전체 도면을 넘길까 고민했던 예건이었다.
하지만 가우디 연구소에 도착해 연구소장을 기다리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공사 현장을 바라보던 예건의 심중에 파란이 일었다.
‘내가 그린 디자인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에게 내가 평생 이룩한 건축을 이을 자격이 있는가?’
만약 저들이 기대 이하라면 도면을 넘기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짧지만 강렬한 침묵을 깨고 예건이 입을 열었다.
“혹여 실망하실까 봐 먼저 말씀드리지만, 오늘 이 자리에는 제가 작업한 디자인의 아주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예건의 말을 들은 모레노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흠. 큰 기대는 하지 않겠소.”
“다행이네요. 제가 주제넘은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모레노 소장을 향해 씩 웃어 보인 예건의 손이 동그랗게 말린 도면으로 향했다.
‘놀라 뒤집어져도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예건의 익숙한 손놀림과 함께 숨겨졌던 도면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처음에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벤하민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자신의 예상을 까마득히 뛰어넘은 결과물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우디가 직접 그린 것처럼 정교한 도면, 세세한 작도 방식, 상세도에 표기된 글자와 지시선 하나마저도 가우디의 도면과 완벽히 동일했다.
그런 생각은 벤하민만 한 것이 아닌 모양.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리오를 보니 확실해졌다.
하지만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리오가 참고하라고 가우디의 도면을 빼돌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감정이 요동친 만큼 분노가 일었다.
“리오, 설마 도면을?”
분기 가득한 벤하민의 목소리에 리오는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도면을 유출한 거냐고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저도 도무지 믿기지가….”
리오가 놀란 것은 단순히 도면 기법이 동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항상 가우디의 도면에 기반해 작업하는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표기 방식이었으니,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은 것.
오히려 벤하민이 노한 것을 보고 가우디가 그렸던 도면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만약 도면이 유출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도면을 그릴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건 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리오가 항변하듯 말했다.
작은 스케치에서 볼 수 없었던 디테일의 정교함은 단지 디자인 재능이 있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면에 완전히 꽂혀버린 리오는 벤하민이 노한 것도 잊어버리고, 테이블에 몸을 붙이고 도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연구자 본연의 탐구욕이 마구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예건이 가져온 것은 영광의 파사드 중 중앙 출입문이라 생각되는 부분 상단의 장식 상세도.
가우디의 작품인 탄생의 파사드는 예수의 고난과 역경이 꿈틀거리는 표면의 거침으로 표현되었다면, 예건이 그린 영광의 파사드는 천국으로 향하는 환희와 기쁨, 감동의 순간을 부드러운 일렁임으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예건을 볼 때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동이 느껴질 정도.
“이걸 정말… 한예건 씨가….”
벅차오르는 감동에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리노를 보고 있으니, 벤하민 또한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정말 녀석 혼자 이걸 설계했다고? 녀석 말대로 일부만 가져온 거라면, 디자인을 모두 완성했다는 건가?’
단순히 도면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 영광의 파사드가 어떻게 연출될지 상상이 되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아직 베일에 감춰진 디자인이.
이미 수많은 시간 동안 영광의 파사드를 계획하기 위해 이미 고민을 거듭했으나, 그에겐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설계를 미뤄왔던 것.
‘이보다 더 완벽한 디자인을 떠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는 속으로 도리질을 치고는 다시 도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꿈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환상적인 건축물을 현실로 끄집어낸 것 같은 감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끝을 모를 질투심 또한 그를 격정으로 몰아넣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가우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거늘. 어찌?’
저 빌어먹을 동양인 녀석은 이토록 쉽게 가우디를 연상케 하는 설계를 할 수 있는 것인가?
심장이 쉴 새 없이 쿵쾅거리고 가슴 한쪽이 뜨겁게 아려왔다.
하지만 도면을 읽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천국의 비밀을 본 것처럼 고귀하고 성스러운 그 파사드를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잃은 두 사람이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며 도면을 외울 것처럼 파고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공간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후후후. 놀랄 만도 하지. 나 아직 안 죽었다고.’
홀린 듯 자신의 도면을 탐독하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짓던 예건의 표정이 이내 무거워졌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것, 그 자체는 매우 다행인 일이다.
후대의 조수들이 허투루 일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니까.
하지만 저들이 진지한 반응을 보일수록 의구심이 커졌다.
과연 벤하민 소장을 설득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예건은 가우디란 존재가 바르셀로나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가우디에 필적할 만한 설계자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민족성으로 똘똘 뭉친 저들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면을 그냥 넘겨?’
어쩌면 그편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이 이번 생의 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방도이다.
자신이 그린 도면이 완벽에 가깝다고는 하나, 현장에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를 모두 가늠하여 그린 것은 아니다.
건축은 단순히 외피를 장식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구조, 설비, 조명 등 건축물이 유지되기 위한 모든 요소들을 살펴야 한다.
이 말은 건축 상황에 따라 설계변경을 하며 보다 완벽하게 수정해야 한다는 뜻.
하지만 도면을 그저 저들의 손에 주었을 때는 공사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영광의 파사드 설계자로 결정된다면?
얼마든지 참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결국, 과거 내가 했던 유언을 묵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
이들에게 그런 영향력이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거취를 저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
전생에 그는 항상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과 대립해왔다.
그런 위기마다 뜻을 꺾고 의견을 들어주었다면 지금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꺾이더라도 드세게 부딪혀 이겨내야, 비로소 내가 설 자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현대 예술을 아이콘이 된 피카소가 과거에 왜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파리로 향해야 했을까?
기존의 권력자들은 반항기가 다분한 그를 항상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들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해서다.
물론 파리로 가서 더 잘된 사례이긴 하나, 그 정도로 과거 바르셀로나는 정체되어 있었다.
당시 귀족들의 돈과 권력은 과거로부터 세습되었다.
피라미드식 인간 계층 구조가 그들의 자리를 지켜주었던 것.
하지만 피카소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해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세습은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주장하며 귀족들을 조롱했다.
그러니 알량한 재능으로 귀족의 곁에 붙어 녹을 받아먹는 자신을 그토록 미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귀족의 세습적 권세는 끝이 났으나, 권력의 집중은 여전하다.
자신의 건축이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되고, 피카소의 그림이 그가 죽은 후 수백억을 호가하는 것이 그 반증이다.
고작 70년 사이, 유명세는 새로운 권력이 되어 있었다.
바르셀로나 문화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가우디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은 카탈루냐인의 손으로.’
그가 남긴 말 한마디가 70여 년이 넘게 지켜지고 있으니, 할 말 다 했지.
그런 세계를 뒤바꾸기 위해서는 예건이 피카소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겠지.’
어차피 답은 하나뿐이다.
부딪혀 이겨내는 수밖에.
* * *
예건이 돌아가고 난 후, 벤하민은 한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도면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애송이의 귀여운 발악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비웃음을 보란 듯이 무너뜨렸으니.
자꾸 영광의 파사드 상세도가 뇌리에 떠올라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우디가 직접 그린 도면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설계도 아직도 그의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설계 전문가인 리오조차 말을 잇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도면을 가져간다고 했을 때, 막았어야 했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시름이 점점 깊어졌다.
* * *
유럽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일단 그의 팀인 기획팀 인원들이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한 것은 물론이요,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와락 안았다.
“정말 잘됐어. 우리 아들이 최고야.”
뭐가 잘됐다는 건지, 주어는 빠져 있었지만.
그 행동만으로도 따스한 위로가 되었다.
아마 예건의 지난 노력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두 분이었기에 예건의 성공이 기뻤던 것이겠지.
그날 저녁,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세 사람은 성공을 자축했다.
전생의 최고 경지에서 누렸던 영향력에 비하면 이제 겨우 시작점에 선 것일 뿐이었지만, 치열한 내일을 위해 작은 기쁨을 나눌 여유는 필요한 법이니까.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던 중 기대 가득한 얼굴로 어머니가 물었다.
“그래서, 피카소의 작품은 언제쯤 한국에 도착하는 거니? 피카소의 작품을 실물로 볼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지 않아요? 여보?”
“하하하. 그러게. 내 생전에 그런 경험을 다 해보네. 어떻게 알았는지, 소식을 들은 사람마다 한 번만 볼 수 없냐며 물어보는 통에 아주 곤란해 죽겠다니까.”
“어….”
‘크리스티앙에서 계속 보관하기로 했는데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버지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긴, 가져와도 보관할 데가 없겠구나. 그런 걸 일반 가정집 벽에 걸어 둘 수도 없고. 이거, 미술관부터 만들어야 하는 건가? 하하하.”
“호호호. 그러면 땅부터 사야겠네요.”
‘고작 미술 작품 하나 때문에 미술관을 짓는다고? 허허!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쩝.’
온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세기의 작품이 그의 마음속에서 한순간에 귀찮은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
‘모르겠다.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기회가 있으면 가져오지, 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