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소나무 같은 사람 (2)
오후 인터뷰 시간에 김연희에게 들은 얘기지만, 건림건축은 건축과 공간 잡지 출간을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고 한다.
매년 조금씩 적자를 쌓아가던 것이 최근 대출 총액이 20억 원에 달했다고.
그로 인해 경영진에서 잡지의 발행 기간을 분기로 바꾸거나 아예 폐간하는 방향을 검토했다는데, 이번 저작권 판매 수익으로 그 빚을 완전히 탕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하며 김연희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며 거듭 고마워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래 묵은 고민거리를 해소한 듯 김 대표는 밝게 웃어 보이며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자넨 내게 신의 선물 같은 존재야. 내가 떠난 후에도 계속 건림건축에 남아주면 좋겠네. 그래서 특별히 자네에게 내 회사 지분을 남기려고 하는데, 받아줄 수 있겠나?”
뜻밖의 제안에 예건의 눈이 커졌다.
“그건 가족분들에게….”
김수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가족들에겐 건림건축을 이끌어갈 재주가 없네. 그런 게 있었다면 벌써 따로 사업을 시작하게 했겠지. 연희는 내 뜻을 이어받아 건축과 공간을 지키기로 했네. 우리 와이프는 평생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회사일까지 떠맡긴다고 오히려 싫어할 거네.”
“하지만….”
“지금보다 특별히 더 잘할 건 없어. 경영은 전문 경영인들이 맡을 거고, 그저 자네의 설계를 건림건축에서 이어가면 되는 걸세. 나중에 자네의 명성이 더 높아지면, 자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도 괜찮겠지. 유명 건축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처럼.”
이는 분명 예건에게도 엄청난 기회였다.
200명이 넘는 전문인력을 보유한 설계사무실의 실질적인 오너가 되는 기회니까.
이런 조직을 갖추려면 아무리 그라도 최소한 몇 년의 기간은 필요할 터였다.
김수훈 대표가 죽고 난 이후에도 예건이 조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건축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 김 대표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인가?
예건은 벤하민 모레노 연구소장과의 만남을 통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 참여에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도래하면, 건림건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그가 수락을 주저하는 걸림돌이었다.
예건이 대답을 주저하자 김 대표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안토니 가우디.”
갑자기 전생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놀란 예건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내가 전생에 가우디였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자네가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예건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저 함구했다.
“자네가 바르셀로나에 일이 있다고 해서 짐작은 했었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에 참여하고 싶은 것 아닌가?”
“아니, 대표님께서 도대체 그걸 어떻게?”
김수훈 대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가 가구 매장을 가우디의 건축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라 메종드 아르누보’라고 지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네. 자네가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관을 흠모한다는 것을 말이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오래 일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판단했지.”
그 말을 들은 예건의 맥이 탁 풀렸다.
자신을 가우디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 것이다.
“마침, 오늘 연희가 자네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봤다고 하더군. 자네가 그린 영광의 파사드 입면을 말이야. 그래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확신했지. 혹여 그 방법을 찾으려 바르셀로나에 방문했던 것이 아닌가?”
예건이 긴장이 풀려 대답을 않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보다 생각한 김수훈 대표가 넌지시 그를 응원하는 말을 전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외지인이 그리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 들었네만,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게야. 한 팀장을 못 알아보는 저들이 반푼이인 게지. 자, 이걸 받게.”
김수훈 대표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자네에게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이네. 나와 아주 오랫동안 인연을 쌓은 분이지. 신자가 아닌 내게 성당 건축을 할 기회를 주신 분일세. 자네에 관해 얘기는 해 뒀으니, 아마 반갑게 맞이해 주실 거야.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한 번 연락해 보게.”
예건은 메모지를 펼쳐 확인했다.
성당의 주소와 신부님의 세례명,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자신이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면서도 회사를 맡기신다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좋습니다. 대표님의 뜻을 받들어 건림건축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값은 치르게 해주십시오.”
“허허. 좋네. 그럼 주당 가격은 액면가로 하지. 법무팀에 인수인계 준비하라고 전해 놓겠네. 세금은 좀 내야겠지만 그 정도면 자네에게도 손해는 아닐 거야.”
손해를 보는 건 김 대표임에도 마치 좋은 거래를 한 것처럼 그의 얼굴엔 한점 아쉬움이 없었다.
김수훈 대표는 마지막으로 예건에게 당부했다.
“건림건축은 내 꿈이었네. 폐허가 된 한국을 아름다운 건축의 숲으로 채우고 싶다는 꿈. 건림건축을 자네에게 맡기는 건 자네의 꿈이 내 꿈보다 더 크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네.”
“그래, 그거면 돼. 그거면.”
김수훈 대표는 다시 한번 내 손을 꽉 잡았다.
운명 앞에서 의연한 그 모습에서 어쩐지 과거 자신보다 먼저 천국으로 향했던 친우의 모습이 떠올라 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눈시울이 벌게진 김수훈 대표가 서둘러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가보게. 내가 자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군.”
“그럼,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대표님.”
“그래, 사무실에서 보지.”
쪽지를 품에 넣고 병실을 나섰다.
너무 큰 선물을 받았다는 감사함과 앞으로 자신이 건림건축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동시에 교차해 복잡한 기분이었다.
“내 꿈이 회사의 꿈이라…. 그럼 한국 최고 설계사무실로는 부족하겠군.”
예건은 남다른 각오를 다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병원을 나선 예건은 김수훈 대표에게 선물하고픈 마음에 인사동으로 향했다.
송철희에게 부탁하면 좋은 사진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서호 갤러리는 소박하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인사동에서도 제법 규모 있는 갤러리였다.
데스크로 다가가 송철희를 만나러 왔다고 물으니, 안내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송철희 큐레이터님, 이제 여기서 근무 안 하시는데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짜증이 많이 섞인 것이, 어째 불안했다.
그 사이 송철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럼, 어디로 옮기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연락처를 받은 게 없어서.”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는 개인 연락처 대신 미술관 연락처가 적혀있었기에 휴대폰 번호를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직원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저도 몰라요. 그러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그 일은 우리 미술관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요.”
“그 일요?”
예건이 여직원에게 캐물으려 하자, 뒤에서 높은 소프라노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죠?”
여자를 알아본 직원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관장님, 오셨어요? 이분이 송철희 씨를 찾아오셔서….”
여직원의 말을 들은 관장의 표정에 불쾌감이 스쳤다.
그녀는 예건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철희 씨는 더 이상 저희 갤러리에서 근무 안 합니다.”
“그럼, 개인 연락처라도….”
“가뜩이나 불미스러운 일로 사무실을 나간 사람이에요. 더는 그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군요. 죄송하지만 손님들께 방해되니,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주변을 둘러봤지만, 손님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더 있어 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갤러리를 나서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여직원을 꾸짖었다.
“하나 씨, 내가 전에 뭐라고 했지? 송철희 찾는 사람이 있으면 길게 설명하지 말고, 곧바로 내보내라고 했잖아!”
“네, 죄송합니다. 내보내려고 했는데….”
“어휴~ 몇 번을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왜 그렇게 애사심이 없어?”
“죄, 죄송합니다. 관장님.”
관장이란 사람이 저렇게 싸가지가 없으니 직원이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예건은 송철희에게 메일을 보냈다.
한번 만나고 싶다고.
다행히 며칠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 * *
“선물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소나무가 주제인 흑백사진을 하나 구하고 싶은데요.”
“소나무라…. 글쎄요. 소나무가 들어간 수묵화는 많지만, 흑백사진은 딱히 떠오르는 작가가 없네요.”
“그렇습니까?”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건은 서호 갤러리에 방문했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가 주저하며 예건의 눈치를 보았다.
“제 부주의로 잘린 겁니다. 딱히 좋은 일은 아니라서요,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네요.”
“그런가요?”
오랜 연륜 덕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 예건이었다.
송철희가 자신에게 팔았던 현장 사진은 엄청 세심하게 보완된 작품이었다.
크지 않은 돈을 받고도 정성을 다한 것을 보면 딱히 돈을 벌려고 나쁜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나무 사진 건을 그에게 맡기고 싶어 찾아온 만큼 괜한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꺼려하는 것을 알면서도 캐물었다.
“제가 보기에는 송철희 님이 퇴사해야 할 정도로 나쁜 행동을 하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속상한 일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면 병이 됩니다. 어디 가서 말하지 않을 테니, 그냥 시원하게 말씀해 보세요.”
예건이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서 안심했는지, 송철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실은….”
이후 송철희에게 들은 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일이었다.
미술관장이 몰래 위조한 골동품을 가져와 판매해 놓고 그게 고객에게 발각되자, 송철희에게 덮어씌웠다는 것이다.
“그 뒤로 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갤러리에 이력서를 내는 족족 서류심사 통과도 못 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이 새어 나갈까 봐 미리 선수 친 거군요.”
“역시… 그런 걸까요?”
미술품 거래는 매우 좁은 시장이다.
이런 곳에서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순간 업계에 매장되는 건 순식간일 터.
하지만 예건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에겐 송철희가 작품에 몰두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어쩌면 자신의 제안이 제대로 먹힐 수 있겠다 싶었다.
“이런 제안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소나무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네? 제가요?”
“네. 시간을 넉넉하게 드릴 수는 없겠지만, 지금 송철희 님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작품을 만드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도 좀 필요하실 것 같고, 송철희 님께도 뭔가 다른 일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나온 탓에 생활비도 부족한걸요. 당장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송철희가 손에 얼굴을 묻고 고민스러워했다.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퇴직금도 안 줬다는 말에 예건 또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착수금으로 천 만원을 드리죠.”
“네?”
“대신, 오래 기다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한 달 안에 완성을 부탁드릴게요.”
“하, 한 달요?”
김수훈 대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그리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 작품이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요?”
“천만 원은 계약금입니다.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해서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완성만 해주십시오.”
“아….”
그의 실력이라면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김수훈 대표 또한 빛가람 미술관 컨셉에 제출한 그의 사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니, 분명 마음에 들어 할 터였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장비는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장비 대여료도 한두 푼이 아닐 텐데요?”
“그만큼 송철희 님이 작품에 공을 들여주시면 됩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군요.”
송철희는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