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걸림돌 (1)
정기택 상무는 김수훈 대표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해 보니, 한예건이 건림건축에 남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는가?
“어차피 회사 경영이야, 경영진들이 알아서 하는 게 아니겠나? 경영권이 한 팀장에게 넘어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이네.”
“하지만 대표님.”
정기택 상무가 뭐라 덧붙이려 하자, 김수훈 대표가 단호하게 자르며 말했다.
“아직 한 팀장의 작품이 완공까지 이어진 수가 많지 않아 잠잠하지만, 만약 그의 건축이 하나 둘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한 팀장을 부르는 곳이 많아질 거야. 경험이 필요한 나이니 아쉬워도 보내줘야겠지. 대신 난 한 팀장이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두려는 거네.”
“……!”
수긍하기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예건 같은 특출한 디자이너를 잃는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엄청 큰 손실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도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10%, 20%도 아니고, 자그마치 60%가 넘는 지분이다.
“그런 이유이시면, 가지고 계신 주식 중 절반만 넘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평생을 함께 한 정기택 상무마저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게 사뭇 못마땅했던 김 대표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어디 공으로 넘기겠다는 건가? 임원들 모두가 접어야 한다고 했던 출판팀을 정상화한 건 물론이고, 겨우 입사 1년 만에 팀을 꾸려 다른 설계팀 매출을 뛰어 넘었네. 그 정도 능력이면 건림건축의 미래를 맡기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김수훈 대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건림건축이 설립되고 벌써 36년이 지났네. 자네 같이 똑똑하고 성실한 직원들 덕분에 위기랄 것도 없이 꾸준히 성장했지. 하지만 말일세….”
김수훈 대표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어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하지만 대표님, 그건 너무 과장된 비약이십니다.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한국이 아닙니까? 앞으로 훨씬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김수훈 대표의 말에 정기택도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기회가 온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팀장은… 스스로 그 기회를 만드는 자일세.”
김수훈 대표가 자신의 병실에 놓여 있는 소나무 액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마 내가 한 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갈 걸세.”
김수훈 대표가 정기택 상무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군. 난 녀석에게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떠넘기려는 거네. 무책임하게 말이지.”
* * *
정기택 상무의 묵인과 함께 김수훈 대표의 주식 승계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도 오고 가는 의견이 분분했다.
파격적인 김수훈 대표의 행보에 회사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며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갑작스러운 경영권 승계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분란도 잠시.
한예건이 연초부터 최강건설과 함께 추진했던 대치동 직원 분양 아파트 계약을 앞두고 주변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하자, 한예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분위기로 돌아섰다.
휴게실에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라도 하면 한예건에 대한 이야기가 꼭 오갔다.
“한 팀장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하는 일마다 대박이지?”
“그러게. 운이 좋은 건지, 정말 세상을 보는 눈이 우리 같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건지. 이제는 한 팀장이 우유로 콩을 만든다고 해도 무조건 믿을 것 같아.”
“하하하. 그건 그래.”
“그나저나 궁금하네. 한 팀장이 만든 아파트라…. 왠지 다른 아파트와는 다를 것 같단 말이지.”
그 말을 들은 직원 하나가 은근히 으스대며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풀기 시작했다.
“우리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예전에 한 팀장이 공동주택 단위세대 특화 설계 발표를 했다고 하더라고.”
“응? 그걸 왜 여태 몰랐지?”
“한 팀장이 기획팀 맡고, 처음으로 선보였던 자리라 팀장급 이상만 참여했었나봐. 그런데 우리 팀장 말에 따르면….”
20개에 달하는 다양한 평면을 내놓은 것이며, 계단식 아파트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하여 환기 및 주거환경 개선에 집중한 설계를 선보였다는 말에 다른 직원들이 저마다 감탄을 해댔다.
“단위세대 하나만 기존과 다르게 그려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20개라니. 대단하네.”
“머리도 좋은데, 노력까지 하니까 엄청난 거지. 듣기로는 그동안 모은 재산도 어마어마하다 던데? 우리 회사 규모의 설계사무실 차리는 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아! 작년에 오픈한 가구점도 대박 났다고 했지?”
“응. 이름이 레브던가? 가구 한 점당 몇 천만 원씩 하는데, 그것도 지금 예약하면 내년 초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부럽다. 그러니 김 대표님께서도 안심하고 회사를 맡기시는 거겠지.”
저마다 수긍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든 게 겨우 1여년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또다시 상기하며,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는 그들이었다.
* * *
회사 주식 양도 및 경영권 승계 문제로 건림건축이 어수선한 동안에도 예건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누적된 업무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네오소프트 사옥 프로젝트가 암초를 만난 것이다.
예건이 기획팀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물었다.
“네오소프트 보고 자료,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다 됐습니다.”
“예산서는요?”
“견적팀에서 곧 보내겠다고 연락 왔습니다.”
“그럼, 자료 취합해서 1시간 뒤에 미팅 룸에서 보시죠.”
“네!”
지난 3월, 주주총회 후 네오소프트의 경영체계가 크게 흔들렸다.
21세기 신성장 동력이라 각광받으며 크게 성장했던 한국의 IT기업들.
당시 회사명에 컴퓨터와 관련된 뉘앙스의 단어만 있어도 주가가 바닥을 모르고 고공행진을 했다.
그러나 2000년 초 IT버블이 붕괴되고 대부분 허울뿐이던 IT 기업들은 상장폐지 수순을 밟았다.
다행히 네오소프트는 자체 개발 게임들의 탄탄한 입지를 바탕으로 거친 풍파에도 굳건히 버텨내며, 이를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버블 붕괴의 엄청난 후폭풍을 경험한 투자자들은 위기감을 인지하고 회사 경영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설무영 대표 1인 경영 체제의 관리 위험성을 이유로 사내이사 2명을 추가로 선임한 것이다.
새로 선임된 사내이사는 기존 주주총회에서 선임되었던 관리자들로 이번에 각각 사업총괄담당 대표와 경영전략담당 대표로 격상되었다.
1인 대표 체제에서 3인 대표 체제로 변경.
물론 창업자인 설무영 대표의 입지는 여전히 탄탄했으나, 그렇다고 전혀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그들은 수익성이 전혀 없는 사옥 건설에 너무 많은 비용이 지출된다는 것을 지적하며 비용 절감을 요청했다.
이에 설무영 대표는 이미 설계 계약이 완료되어 디자인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신임 대표들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겨 결국 디자인 보고회를 열기로 결정되었다.
설무영 대표는 미안한 마음에 예건을 따로 불러 의견을 나눴다.
“아니, 사옥 잘 짓자고 하는 게, 어디 나 혼자 좋자고 하는 일이야?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편안한 업무공간을 제공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짜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자체 데이터베이스를 탄탄하게 구축해서 이전 보다 나은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는 건데. 안 그래?”
“물론입니다.”
문제는 저들이 사옥을 짓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저들이 과도한 비용 지출 항목이라 지적하는 부분은 디자인이었다.
고객의 방문이 잦은 것도 아닌데, 굳이 게임 속 세상을 현실에 구현할 필요가 있냐는 것.
디자인 구현 난이도가 높아 시공에 필요한 예산이 높아질 것이 우려되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과도하게 지출되는 비용을 아껴 재투자에 힘쓰겠다는 건 경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나도 어떻게든 방어하려 노력은 하겠지만, 그게… 워낙 저쪽 사람들이 완고해서 말이지.”
설무영 대표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업을 시작해서,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었다.
그에 반해 경영진은 60대를 바라보는 협상에 능한 사람들.
아무리 독불장군처럼 성장한 설무영 대표라도 뿌리깊은 한국의 경로사상을 쉽사리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설 대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전까지 돈 같은 건 걱정 말고 마음껏 상상을 펼쳐 보라고 자신하던 그였으니, 민망한 것이리라.
“괜찮습니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건축주를 설득하는 건 건축가의 몫이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늘었다 뿐이지, 달라질 건 없다.
건축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설계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면 합의점을 찾으면 된다.
디자인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 그것처럼 쉬운 건 없다.
50년 넘게 그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러나 진짜 문제는 돈이다.
투자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건물 짓다가 회사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야 없지.
“경영진 쪽에서 얼마나 절감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초기 예산에서 20% 삭감. 물론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건 잘 알지만, 어쩔 수가 없더라고.”
사옥 건축을 위해 초기에 잡았던 예산은 3000억원.
자그마치 600억원의 감산.
연면적 10만 제곱미터, 데이터베이스 구축시설을 포함한 금액인만큼 20%를 감액하겠다는 것은 주요 디자인 장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흠…. 어쩔 수 없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때론 건축가는 해결사의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는 나아갈 수 없으므로.
* * *
설계 브리핑을 마치고 조명이 켜지자, 맹수 같은 눈들이 먹잇감을 노리듯 예건을 노려보았다.
어떤 이는 점잖은 척 꾸미고는 못마땅한 기침을 연신 흘리고, 어떤 이는 속내를 곧바로 얼굴에 드러낸다.
기어코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눈매가 매섭게 찢어지고, 얼굴은 족제비 상을 한 이승준 대표였다.
“좋아요. 좋아! 한 팀장 디자인 잘 하는 건 우리가 잘 알겠고. 우리 쪽 조건은 하나도 반영이 안 된 것 같은데. 아닙니까?”
“디자인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금액을 절감을 우선적으로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판단했습니다.”
“훗! 그래요?”
이승준 대표가 설무영 대표를 힐끔 바라보며 씩 웃었다.
“다른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설무영 대표에게도 말했지만, 이번 사안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옥 신축 계획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어요.”
이는 한예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설무영 대표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예 설무영 대표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어지지도 못할 상상 속 그림으로 대리만족 하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심플하게, 확실히 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까놓고 말해 사옥 멋들어지게 짓는다고 해서 매출이 드라마틱하게 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설무영 대표가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이승준은 다시 한예건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한 팀장, 난 왜 당신이 이 프로젝트의 총괄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만? 자네, 건축사 자격도 아직 못 딴 1년차 디자이너라며? 건축사보? 뭐, 그런 거라 들었는데.”
건축사보.
건축사 사무소에서 건축사 업무를 보조하는 사람, 즉 건축사법에 따른 실무 수련을 받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이승준 대표는 이 판을 엎고, 아예 새 판을 짜려는 모양이었다.
“혹시 당신과 설무영 대표, 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의 물음에 대회의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한예건과 설무영에게 향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