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완벽한 적막 (1)
자신만 믿으면 된다는 예건의 말에 큰 고민 없이 시작한 예능이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둘러보고 난 후,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촉박해진 일정 때문에 어떤 식으로 내부 공간을 구성해야 좋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건이 저렇게 확신에 넘쳐 이야기하니 고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 오늘 첫 미팅이니까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애초에 속에 담아두고 혼자 끙끙 앓는 것은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디자인 방향을 잡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준영은 당당하게 피디의 뒤를 따라 예건의 차에 올랐다.
“그럼, 브리핑 장소인 건림건축으로 가겠습니다.”
“네~. 출발하시죠!”
잠시 뒤 도착한 건림건축의 브리핑룸.
전면의 커다란 스크린에 검정색 굵은 글씨로 프로젝트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침묵하는 집]카메라가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도 피디가 준영의 뒤편에 착석하자, 예건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고요한 방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능력이 결핍된 데에서 비롯된다.”
예건은 제목만 있는 상태의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음악의 시작은 침묵에서 시작되고, 또 침묵으로 끝맺음 하죠. 이 침묵이 있기에 소리는 음악이 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가능성을 가집니다. 전 A-3의 본질 찾기를 침묵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한예건은 단상에 올라간 순간부터 좌중의 이목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한예건이 연주하는 독창적인 독주에 참석자들은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2차원으로 표현된 평면을 머릿속에 3차원으로 그리고, 입면과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살을 붙여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공간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경험하지 못한 공간을 상상하게 유도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예건의 브리핑을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니 신기한 일이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공간의 구성, 유연한 공간의 흐름, 더불어 신선한 아이디어가 마구 폭발하며 브리핑은 정점을 찍었다.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도취되어 있던 작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 진짜 멋진 공간이 탄생할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준영 씨?”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디자인에 마음 편히 상상 속 공간을 유영하던 준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작가를 돌아보았다.
준영은 벅차 오르는 감정을 숨기려 눈을 몇 번 끔뻑거린 후,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 제가 원하던 공간이에요.”
첫 브리핑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준영은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예건에게 물었고, 예건은 방송을 보는 일반인들도 알기 쉽도록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수정사항이 거의 없이 디자인을 받아들였고, 이대로 공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김연희가 긴장을 풀려 얕은 숨을 내뱉으며 감탄했다.
“단번에 오케이라니. 정말 한 팀장님은 대단해요!”
그녀의 칭찬에도 예건은 무심히 웃어 보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집이니까요. 그 사람이 어떤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만 알면, 의외로 평면은 쉽게 나오거든요.”
“그럼 컨셉은요? 한 팀장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신 엘레강스한 디자인과 완전히 다른 것 같던데.”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장식을 줄이고 마감을 단순화했을 뿐이지.
“백색의 내부 공간은 침묵이란 의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죠. 추상화의 창시자 칸딘스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색의 공간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깊고 완벽한 적막이다.’라고요.”
“거기서 디자인을 발전시키신 거예요?”
예건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네요!”
형태를 잡는데 시간이 걸리는 대신, 마감을 백색 스타코로 단순화하여 공사기간을 축소했다.
이제 남은 건 모어 스페이스가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
대신 이 적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어울리는 가구가 꼭 필요한 상황.
예건은 눈빛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레브의 ‘비행’ 시리즈를 대중에 선보일 때가 되었군.’
* * *
JJ엔터 사옥과 준영의 집을 마무리하는 와중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한 팀장님, 예고편이 나왔는데 한번 보러 오시죠.]도 피디의 연락을 받고 처음 방문한 방송국.
중앙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 다양한 영상들이 플레이 되고 있었다.
아마 현재 방영 중인 프로그램인 듯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에 방송국이라는 정체성이 잘 드러났다.
일반 사무실보다 훨씬 큰 로비를 스캔하듯 둘러보다 보니, 도 피디가 직접 로비까지 마중 나왔다.
“로비가 굉장히 크군요.”
“아무래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니까요. 자, 여기.”
그가 건네준 출입증으로 출입통제 차단기를 통과하고, 손쉽게 그의 사무실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방송국이라고 여느 사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더 번잡해 보이는 느낌이라는 것 외에는.
테이블 위에는 온갖 서류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저런 게 왜 사무실에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기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도일준 피디의 자리 또한 마찬가지.
건축가는 무질서한 공간을 질서정연하게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건축가를 고문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정돈되지 않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예건이 눈살을 찌푸리자, 도일준이 민망해 하며 얼른 비디오 테이프를 챙겼다.
“하하하. 자리가 좀 정신없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한시라도 빨리 이 카오스에서 탈출하고 싶었기에 예건은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편집본을 보여드렸는데, 위에서 아주 좋아하세요. 여지껏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포맷이라고.”
“다행이군요.”
“하하하. 물론 방송의 인기는 대중에 공개된 뒤에 확인되는 거라서 방송 때까지 가 봐야 아는 거지만, 일단 출발은 좋습니다.”
그가 비디오에 테이프를 꽂아 넣고, 영상을 플레이했다.
잠시 후, 깔깔거리는 패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전형적인 예능 방송 스타일의 귀여운 글자 자막과 엉망인 안준영의 숙소 내부가 언뜻 지나갔다.
영상이 끝나는 30초 동안 시종일관 같은 분위기의 기조가 흐른다.
‘흠…. 노출되는 이미지가 너무 가벼운데.’
눈치 빠른 도 피디가 예건의 표정을 읽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예능성이 강한 다큐이기 때문에 시선을 끌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도민준은 이번 방송을 꼭 성공시키고 싶었다.
방송국에 취직한 이후로 이번처럼 모든 일이 순조로운 적이 없었다.
편집을 하면서도 초반 시청자 유입만 안정적으로 끌어오면 대박날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참에 불운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자신의 사내 이미지를 완전히 깨 버리고 싶었다.
“혹시 편집본을 제가 먼저 봐도 될까요?”
“어…. 아직 수정 중이긴 한데….”
예건이 지그시 바라보자, 도 피디도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편집본이 들어있는 테이프를 가져왔다.
영상을 플레이하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꼼꼼히 내용을 확인하던 예건이 영상이 끝나자마자 도 피디를 향해 돌아보았다.
“좋네요.”
그때까지 숨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긴장했던 도일준은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안도했다.
“하하하. 한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다행이네요.”
하지만 예건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좋기는 한데,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더 좋아질 수 있다고요?”
“네, 이렇게.”
예건은 자신의 수첩을 꺼내 설명을 시작했다.
영상의 시작과 끝, 그리고 예고편의 흐름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방송 전문가가 아닌 예건의 지적쯤은 그냥 흘려 들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상하게 듣다 보니 그의 말이 다 옳은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방송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거지?’
그가 사용하는 용어, 태도,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제의식까지.
그가 건축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완벽하게 방송 전문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집을 소개하는 부분에는 피아노 연주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안준영 씨가 작곡한 음원이면 좋고, 아니면 그가 추천하는 음악도 괜찮을 거고요.”
“아… 그렇군요.”
“준영 씨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상태에서 서서히 줌 아웃,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며 한강 뷰까지 롱 테이크 기법으로 이동하는 거죠.”
예건은 예고편을 보러 오라는 도 피디의 말을 듣고, 방송 제작에 관한 전문 서적을 10권 이상 독파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문제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
“오호! 좋은데요?”
“저는 그 부분이 편집되어 예고편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음악가의 집이니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편집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예능인데 말입니까?”
“다큐이기도 하니까요.”
“아….”
초반에는 예능 분위기로 시선을 끌어내고, 후반에는 음악 다큐 분위기로 가자는 게 예건의 의도였다.
“그래야 평소 안준영의 이미지와 상반된 분위기에 이끌린 음악 팬들도, 흥미 위주의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흠….”
도 피디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뇌리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 팀장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이후 도 피디는 예건에게 제안을 하나 했고, 예건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상하게 한 팀장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니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히트작 한 번 만들어 봅시다.”
도일준이 손을 내밀었고, 예건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느새 8월의 마지막 날.
이재정 대표에게 내일은 더없이 중요한 날이었다.
대중 음악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휘어잡는 것.
누구는 허황된 꿈이라 말했고, 다른 이는 어쩌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지켜왔다.
언젠가 한국의 가요로 세계를 재패할 수 있다 믿었기 때문.
자신이 한국이란 엄청난 경쟁에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아시아 시장에서 우뚝 설 그날까지 잡초처럼 질기게 버틸 생각이었다.
이번 히트어택의 성공이 아시아로 향하는 첫번째 디딤판이 될 것이라 자부했다.
‘그러니 이번 앨범은 꼭 성공해야 해.’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제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지.
“그나저나 오늘 ‘꿈꾸는 집’ 예고편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TV를 켜고 채널을 MBS에 맞춰 놓았다.
마침 광고가 끝나고 신규 프로그램 소개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당신은 어떤 집을 꿈꾸십니까?’
“캬! 시작 멘트 좋은데?”
이내 패널들의 놀란 표정이 클로즈업 되며 일제히 탄성이 쏟아지고, 미술관이라 불러도 좋을 백색 공간이 짧게 지나간다.
그곳에 백색의 상하의를 입은 채 평온한 얼굴로 마치 조각처럼 앉아있는 한 사람.
“오! 준영이한테서 저런 순수한 느낌을 뽑아 내다니, 피디 감 좋네.’
백자 같은 뽀얀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던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며 공간 전체를 비췄다.
뒤이어 은은하게 깔려 있던 배경 음악이 사라지고 한강의 은빛 물결을 잡은 풍경 위에 백색의 글자가 새겨지듯 드러났다.
“적막, 음악의 시작.”
30초짜리 짧은 영상임에도 이재정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도대체…. 이게.”
평소 히트어택의 분위기와 전혀 다름에도 이질감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매번 패션의 아이콘으로 대두될 정도로 화려한 이미지를 자랑하던 그에게 저렇게 순수한 면이 있었다는 것 또한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배경으로 깔린 음악.
‘분명 들었던 곡인데…. 어디서, 아!’
언젠가 준영이 만들었다며 가져왔던 곡이라는 게 생각났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선율이 돋보이는 피아노 연주곡이라 히트어택과 전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배제했던 곡인데.
자꾸 그 리듬이 귀에 맴도는 건 왜일까?
그리고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왜 한예건은 한 컷도 안 나온 거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