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자격의 조건 (3)
‘미카엘 천사의 산’이란 뜻의 ‘몽생 미셸’은 모래톱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바위섬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전승에 따르면, 생 오베르의 꿈에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가 ‘바다 위에 성전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고, 세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고 나서야 그 뜻을 따라 성당을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쏴아아-.
어스름한 새벽.
파도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구경하던 예건은 해수면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잠시 쉬었던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며 발자국을 만들고, 지나간 자리에는 물이 차오른다.
이미 신발 안은 진창이다.
마치 덜 굳은 콘크리트처럼 바닥이 질척거린다.
뚝방 길을 따라 차량을 이용해 들어갈 수 있음에도 굳이 이 험한 길을 걷는 이유는 잠시라도 방문객이 아닌 순례자의 마음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
760m.
시속 4㎞의 느린 걸음은 느린 풍경을 만들었다.
모래 바닥이 드러난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방금까지만 해도 바다였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망망대해, 바다 위에 홀로 솟구친 이 신비한 분위기의 수도원은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버텨내고 파리 다음으로 인기 높은 여행지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번은 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오게 되는군.’
왕의 문을 지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세 분위기의 상가를 구경하며 길을 오르니, 어느새 수도원 입구에 다다랐다.
마침 그를 기다리던 안내자가 예건에게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8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어져서였을까?
세월이 건축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초기 로마네스크에서 후기 고딕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을 즐거이 눈에 담으며 안내자를 따라 걷기를 수십 분.
사각형의 지붕 덮인 회랑과 중정이 돋보이는 클로아트르에 도착했다.
아직 방문객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시간.
정원을 손질하고 있는 수도사 몇 명이 보였다.
안내자는 정원 내부로 들어가 그 중 가장 나이 지긋해 보이는 어른에게 그의 도착을 알렸다.
“신부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그래요. 바로 가죠.”
신부는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곁에 있던 수도사에게 건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모습에 예건의 시선이 오롯이 집중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이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신의 은총이 성도와 함께 하기를.”
성호를 그리며 축복의 말을 건넨 신부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회의 장소까지 안내하겠으니 따라오라 말했다.
자신을 티모테 신부라고 소개한 그는 이곳의 지리를 아주 잘 아는 듯 거침없이 앞서 나갔다.
예건은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의 옷차림과 외양을 살폈다.
언뜻 보기에는 잘 다림질해 깔끔해 보였으나, 옷감의 질감에서 낡은 입은 태가 난다.
자글자글 주름 진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드러났다. 노동이 익숙한 손이다.
검소한 삶을 신부의 덕복으로 여기며 수행과 노동을 함께하는 베네딕트 수도회 신부들의 특징이다.
전생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지으며 수많은 신부들을 만났던 그는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품을 읽어냈다.
‘이런 곳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평범한 신부가 아니야. 앞으로 내가 할 일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인가?’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직접 맞이하러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첫인상이 중요함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앞서 걷던 그가 걸음 속도를 줄이며 물어왔다.
“안내를 부탁받으면서, 성당 건축 때문에 오신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무척 젊어 보이는데, 성당을 지어본 적은 있습니까?”
“…….”
전생의 경험을 포함하면 처음이 아니니 신부님께 거짓을 고할 수는 없어 그저 말을 아꼈다.
그것을 흠이라 생각지 않는지, 티모테 신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격려해 주었다.
“허허허, 괜찮습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니까요.”
예건은 화제를 돌리려 건축물에 관해 물었다.
“통로가 미로처럼 복잡하군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증축되기도 하고, 용도도 많이 바뀌어 그렇답니다.”
“이곳 소속이 아니신 것 같은데, 지리에 밝으시군요.”
“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예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 몽생 미셸은 신부님이 몇 분 안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이 시간이면 한참 예배 준비로 바쁘실 시간이죠.”
예건의 대답에 티모테 신부는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서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성당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나는 퐁트브로 수도원의 수도원장입니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이 설계할 퐁트브로 수도원의 책임자였다.
예건은 예를 갖추며 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퐁트브로 수도원 설계에 참여하게 된 한예건입니다.”
예건이 손을 내밀었으나 티모테 신부는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승낙하지 않았다는 건가?’
예건은 내민 손을 거두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티모테 신부는 뒷짐을 진 채, 창밖 너머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제가 신부가 되고,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적막하면서도 은혜로운 곳이죠. 이곳은.”
그의 눈길을 따라 예건도 시선을 주었다.
멀리 흙바닥이 드러난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십니까?”
“꿈의 계시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가끔 주님은 그런 식으로 놀라운 역사를 행하시죠. 저는 주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1년간 기도를 올렸습니다.”
티모테 신부는 고개를 돌려 예건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들 기다리겠군요. 들어가시죠.”
그는 오래된 오크 문 하나를 가리키더니 예건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끼익.
잘 관리된 금속성 마찰음이 들리고,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공간 내에는 넓은 테이블과 의자뿐.
장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마르탱 교수와 브루노 건축사 외에도 몇 명의 관계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예건은 조용히 마르탱의 곁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르탱 교수가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아냐, 자넨 시간 맞춰 도착했네. 우리가 먼저 도착한 거니, 염려치 말게. 어차피 티모테 수도원장님께서 도착하지 않았으면 회의는 시작하지도 못했을 거니 말일세.”
예건이 자리를 잡자 티모테 수도원장이 축복기도를 함과 동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먼 곳까지 어려운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라면 현장에서 뵈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이곳으로 오시라고 부탁드린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티모테 수도원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들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결정해야 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곳에 오곤 합니다. 이곳에 와서 수행을 하며 기도를 드리면 미카엘 대천사님께서 응답을 주시거든요.”
수도원장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뜻이 너무 기이하여 머무는 시간이 좀 길어졌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간 자신에게 있었던 기이한 일들을 모두에게 말했고, 이를 다 듣고 난 후, 브루노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꿈을 꾸셨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미카엘 대천사님이 직접 제 꿈에 나타나 계시를 주셨죠. 이런 경우는 저조차 처음 경험하는 일입니다.”
“허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예건을 바라보는 브루노.
그러나 예건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묵묵히 그 의미를 곱씹을 뿐이었다.
티모테 신부가 꾸었다는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황금빛 천으로 전신을 감싼 아름다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그에게 명령을 했다.
동양에서 신비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이니, 그에게 수도원 재건을 맡기라고 했다는 것.
그는 자신에게 내려온 계시를 믿지 못하고 다른 답을 구하기 위해 1년 넘게 이곳에 계속 머물렀다고 했다.
그의 남은 생에 가장 중요하다 여긴 일이 바로 이번 수도원 재건 사업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마르탱 교수님께서 먼저 제안을 해 온 겁니다. 우연히 출중한 동양인 학생 한 명을 맡게 되었는데, 수도원 설계에 참여하면 어떻겠냐고요.”
수도원장은 평온한 얼굴로 예건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흘려 들었습니다만, 이후 두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신비로운 동양인.
그런 대단한 계시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놀랄 만도 했으나, 예건은 그저 담담했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꿈에 천사가 나타난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종일 잠자코 있던 마르탱 교수가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는 건, 한예건을 건축가로서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마르탱의 물음에 수도원장의 눈빛이 깊어졌다.
잠깐의 정적 후, 입을 연 그가 단호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단에서 반대가 심할 텐데요.”
성당의 재건 비용이 모두 교단에서 나온다.
수백 년간 성당 재건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성직자들의 눈높이를 맞추려면 최소한 그만한 경험이 필요하다.
역사적 의미 또한 중요하다.
교단에서 퐁트브로 수도원 내의 교회를 복원했던 비올레르뒤크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과거 교회를 복원한 설계자의 후대가 대를 이어 설계를 했다는 상징성 또한 퐁트브로 수도원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런 교단의 뜻을 꺾고 경험이 전무한 동양인 건축학도를 선정한다는 데 누가 찬성하겠는가?
“그에 대한 대비는 해야겠지요.”
‘대비? 흥! 말은 쉽지.’
이 길이 고난과 역경이 넘치는 가시밭길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마르탱은 수도원장을 만류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이제 막 피어나는 젊은 건축가에게는 너무도 큰 시련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건 불가합니다. 한예건은 이제 막 저희 학교에 편입한 학생입니다. 교수로서 그런 막중한 일을 홀로 책임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르탱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수도원장은 예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도님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예건은 마르탱 교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수락하면 제 건축사 자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격? 자네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선정 되는 순간 건축사 자격은 통과될 걸세. 이런 막중한 일을 진행하는 책임자에게 건축사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뭐?”
“그래도 자격 검증은 필요할 할 테니, 도면은 있어야겠지요?”
예건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퐁트브로 수도원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마침 여기, 첫번째 설계 장소로 딱 어울리는 곳이 있네요.”
왕의 무덤이 있는 납골당 자리였다.
퐁트브로 수도원에는 헨리 2세와 사자심 왕 리차드 1세,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묻혀 있다.
관은 교회 중앙 바닥에 놓여 있으나, 시신은 교회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풍트브로 수도원은 교회 건축 복원을 위해 이 납골당을 별도 건축물로 신축할 계획을 세웠고, 예건이 선택한 곳이 바로 그 납골당인 것이다.
“허허허. 젊어서 그런가, 결정이 시원시원하군요.”
수도원장은 기꺼운 얼굴로 예건의 결정에 화답했다.
“대신 성도님이 설계자로 선정되기까지 꼭 거쳐야 할 관문이 있습니다. 나름의 검증 과정인 셈이지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예건의 물음에 수도원장은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이곳 몽생 미셸에는 오랜 기간 보관되어 있는 건축을 위한 도면들이 있습니다. 그걸 필사하며 건축양식에 대해 이해를 높이면 어떨까 합니다만.”
티모테 신부가 내건 억지스러운 조건에 흥분한 브루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큰 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아니, 수도원장님! 지금, 자그마치 천년 동안 지은 건축물의 도면을 필사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거대한 공간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놀라 동요했으나, 예건만은 마치 조각상처럼 고요했다.
그런 그를 수도원장은 눈을 빛내며 유심히 바라볼 뿐, 말을 아꼈다.
잠시 후.
예건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손을 들어 흥분한 브루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무심히 말하는 목소리 톤과 달리 예건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몽상 미셸> [출처: Unsplash의 Rita Burza]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