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수도자의 길 (2)
‘이렇게 누워 있으니, 옛날 생각 나네.’
침대에 몸을 누인 예건은 아치형 천장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한참 지어지던 시절, 도면을 그리다 지치면 현장 지하에 누워 잠을 청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었지.’
이 땅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을 위해 남은 열정을 쏟아부었던 노년기.
마지막 죽는 날까지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수도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였다.
아마도 그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대상이 있었기에 그 고약한 몸으로도 70살 넘게 살아 있을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생을 마무리하고, 다시 태어났음에도 결국 또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과거야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생에는 성당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그였는데 말이다.
“결국 이게 목적이었던 겁니까?”
예건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창가 벽에 붙은 미카엘 대천사의 성화에 닿았다.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자애로운 근엄한 얼굴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서방교회에서 미카엘 대천사는 사탄에게서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자이자, 인간의 영혼을 천국으로 이끄는 인도자이다.
그렇기에 한 손에는 창이나 칼을, 다른 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곳, 몽생 미셸의 상징과도 같은 첨탑 위의 미카엘 천사 조각상도 갑주를 입고 검을 들었다.
그러나 숙소의 미카엘 성화는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수도자를 마주할 뿐이다.
마치 거울처럼.
물끄러미 성화를 보고 있자니, 번뜩 그런 깨달음 들었다.
자신이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지상을 떠돈 것은 어쩌면 미카엘이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미카엘 대천사의 꿈을 꾸고 이 바위섬에 성당을 지었다던 생 오베르, 그리고 이곳에서 동양인에게 수도원의 설계를 맡기라는 꿈을 꿨다고 했던 티모테 수도원장.
자신은 대천사 미카엘에게 끝까지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예술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예술가들도 있는 판국에 천사에게 이용당하는 게 뭐 대수라고.
솔직히 수도원장의 제안을 들었을 때, 이곳의 도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흔치 않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 약간 설렌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축을 위해서라면 육체적 자유쯤은 얼마든지 제한되어도 상관없다 여기는 그였다.
게다가 자신은 아직 젊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지 않는가?
이곳에 갇혀 몇 년을 세상과 단절돼 산다 해도 배움이 있다면 못 버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쉬워.”
하루 정도 도면을 숙지한 것만으로 당장 비슷하게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몽생 미셸의 내부 구조가 그의 머릿속에 훤히 새겨져 버렸다.
과거 50여년 가까이 서양 건축을 연구하고 그중 대부분을 성당과 수도원 건축에 매진했던 그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던 이곳 몽생 미셸의 건축 디자인은 지리적인 특징을 잘 살린 건축물이라는 느낌 외에 큰 감응을 주지는 못했다.
아마도 건축물의 형상, 그 자체가 주는 신성한 아름다움의 부제 때문이 아닐까?
“역시 몽생 미셸은 멀리서 보는 게 아름다워.”
새벽녘 육지에서 바라보았던, 망망대해 바다 위에 떠있는 성채의 형상 그 자체가.
이곳 몽생 미셸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거대한 사막 신기루처럼 신과 인간을 잇는 성소.
새벽이슬이 깔린 바다.
수평선마저 지워버리는 짙은 해무가 낮게 깔렸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여백의 미….”
웃기는 일이다.
프랑스에서 여백의 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다니.
극도로 절제된 풍경이 연출하는 존재감은 신의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지독스럽게 자극한다.
지극히 평범한 고딕의 첨탑이 돋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터.
자연스럽게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떠올랐다.
처음 자신이 성당 설계를 맡았을 때는 성당 설계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초창기 설계는 전통적인 고딕 양식을 본 딴 네오 고딕 양식의 디자인이었는데, 초안을 디자인했던 빌라르 교수가 엔지니어와의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 때문에 총괄역을 그만 두면서 그에게 설계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건축 총괄에 선정되었을 때, 신앙심으로 충만했던 그가 가졌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프로젝트를 맡고 나니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거룩한 신의 전당이 들어설 곳은 번잡한 도심의 한 복판.
게다가 설계 초안은 카탈루냐의 민족적 정취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디에서나 볼 법한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의 성당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계를 느낀 그는 빌라르 교수가 완성했던 기본 평면의 외곽에 자신이 고안한 18개의 탑이 있는 디자인을 덧붙여 설계를 완성했다.
낮은 탑들로 몬세라트 산을 형상화하고, 그 중앙에 가장 큰 첨탑을 세워 놓음으로써 성소의 의미를 강화한 것이다.
도심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만든 해결책이 결국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다른 성당 건축물과 완벽히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이 되어 주었다.
건축가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건축이 가진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현존하는 건축가 중에 자신처럼 치열하게 건축을 연구한 이는 흔치 않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다.
티모테 수도원장은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르기에 나름 자신의 실력을 검증하고자 이런 시험을 준비한 것이겠지만.
어느덧 한국인의 초인적인 속도에 완벽히 적응해 버린 그였다.
“단순히 설계 능력에 대한 검증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곳에서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물론 시험인 것을 알면서도 흔쾌히 응한 것은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미카엘 대천사의 예언이라…. 오히려 잘됐어.”
덕분에 실력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예건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그를 쉬이 잠으로 인도했다.
* * *
전날 하루 종일 예건을 찾아다니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하루를 마무리한 마테오는 아침 일찍 예건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
“성도님, 안에 계십니까?”
인기척이 없자 문을 열어볼까 망설이던 그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슬며시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
그가 가져온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길을 못 찾아서 아예 밖으로 나간 건가?’
어제 점심시간에 맞춰 작업실에 찾아 갔으나 어디에도 예건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소개 받은 이후로는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니, 다른 장소를 둘러보고 있는 중인 모양이라 판단한 그는 일과를 끝내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괜히 찾으러 다녔다가 길이 엇갈리면 곤란하니까 그곳에서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식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손님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하며 식당으로 향하던 마테오의 발이 우뚝 멈추더니, 당황해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었다.
“설마 하루도 못 버티고 돌아간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말도 없이 도망갈 줄은 몰랐는데….”
“누가 도망갔습니까?”
소리도 없이 다가온 부드럽고 낮은 음성에 화들짝 놀란 마테오가 뒷걸음치며 소리 난 데로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한예건이 보였다.
“어? 성도님?”
“식사하러 가십니까?”
“아, 네.”
“아침이 늦으셨네요. 여기 식사 맛있던데요.”
‘내가 누구 때문에 늦었는데!’
너무도 태연한 척 말을 걸어오는 예건의 모습에 마테오는 은근히 부하가 이는 걸 느꼈다.
“네, 뭐.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런데 지리는 좀 익히셨습니까?”
“네. 아침부터 내부를 싹 다 훑어봤거든요. 중요한 실마다 푯말도 붙어 있어서 생각보다 찾기 쉽던데요.”
“다행이네요. 어제는 계속 안 보이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면 보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오늘부터 작업 시작할 테니, 안 찾아다니셔도 됩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마테오 님.”
“네. 성도님도 수고하십시오.”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멀어지는 예건의 모습에 조금 안도하는 마테오였다.
“도망간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식당 하나 스스로 찾아왔다고 벌써 수도원 내부를 다 파악한 것처럼 구는 자만심 가득한 태도가 조금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도사 생활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에게 이곳은 미로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나도 이곳 지리를 익히기까지 일주일은 걸렸는데…. 허언증이 좀 있는 편이군.’
저 맑은 얼굴을 앞으로 며칠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째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작업에 들어간다니, 이제야 실력을 확인할 수 있겠군.”
멀어지는 예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테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웅성웅성.
작업을 마무리할 시각.
작업실 내부가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예건이 도면 정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가 작도한 도면을 보기 위해 다른 수도사들이 한 데 모여든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심 많은 수도사 한 명이었던 것이 그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자 저마다 궁금증을 못 참고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야~ 천재네. 천재야.”
“호오. 정말 실력이 대단하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젊은 친구가 아주 제대로 배웠어요.”
이들 대부분은 10년 이상 몽생 미셸의 도면 복구 작업을 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의 예리한 눈에도 예건이 작도한 도면은 자로 잰 듯 기존 도면을 완벽히 복제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속도라면 우리가 뽑아준 리스트는 세 달이면 완성하겠군요.”
“세 달이요? 제 생각에는 한 달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처음 자리했던 수도사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이게 처음 완성한 도면이 아닙니다. 저기 보십시오.”
수도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 떨어진 테이블 위에 펼쳐진 도면 종이들.
테이블을 가리킨 수도사는 그게 모두 예건이 작업한 것이라는 듯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 설마…. 저게 다 오늘 작업한 분량이라는 겁니까?”
“네! 그래서 제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다. 완성도가 모두 대단해요.”
“그럴 수가!”
“이건 뭐, 우리가 가르칠 게 없겠는데요? 이 정도 실력이면, 되레 우리가 한 수 배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 수도사가 다른 이들의 동의를 구하듯 묻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당장 성당 설계를 맡겨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니까요.”
티모테 수도원장은 한예건이 일주일 이상 수도원 생활을 버티는 경우, 그에게 성당 설계를 맡겨도 괜찮을 때까지 직무 교육을 해 달라 이들에게 부탁했었다.
그래서 일주일간은 가르치지도, 필요 이상의 도움을 주지도 말고 지켜보기만 하라 지시한 것.
수도원장의 지시가 떠오른 수도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하지만 아직 이틀도 안 지났는데, 그래도 일단은 지켜보는 게….”
“역시, 그렇죠?”
그들 또한 일개 수도사일 뿐.
수도원장의 지시를 어기고 함부로 다가설 용기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전 미사 준비하러 먼저 나가 봐야겠습니다.”
“어어, 같이 갑시다. 같이.”
수도사들은 예건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처음부터 그를 눈여겨보았던 수도사만이 도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망부석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쯧, 재능을 저리도 못 알아 봐서야.’
도미니코는 이곳 작업실 내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이였다.
이곳 관리자인 가브리엘도 그의 디자인 실력을 인정하여 중요한 디자인은 전적으로 그에게 작업을 지시할 정도.
그런 그가 보기에 예건의 재능은 자신의 실력을 상당히 웃도는 수준이었다.
‘한번 맡겨 볼까?’
마침 그에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