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수도자의 길 (3)
도움을 주는 이는 없었으나 예건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작업을 시작했다.
도면 리스트와 비품들이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기에 복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낮 시간의 작업실은 그야말로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적막했다.
쓰윽. 사각사각.
기다란 T자와 삼각자 사이를 오가며 종이 위를 흐르는 잉크 펜 소리와 종종 들리는 연필 깎는 소리가 듣기 좋은 백색소음을 만들어 주기까지 하니, 마치 전생의 설계 사무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그저 가끔 낯선 이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작업에 들어가면 곧바로 시공간이 지워진 듯 도면에 몰두할 수 있었기에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한 장, 한 장.
완성되는 도면이 쌓여갈수록 작업에 속도가 붙으며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2주 안에 끝낼 수 있겠군.’
장식에 치중하기 보다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의 명확성을 중요시하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기에 대부분의 벽이 단조로운 자연석 마감이었고, 건축을 이루는 구조가 단순했다.
테스트가 너무 쉽다고 여겼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서양의 건축 양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 공간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나,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예건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었던 것.
도면을 파악하고 오늘 아침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선의 흐름까지 익히고 나니, 평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의 형태가 연상되었다.
기둥의 간격,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의 형태, 공간을 구성하는 체적을 어림잡고 나면 이후 도면 작업은 단순한 반복 업무일 뿐이다.
순식간에 5장의 도면을 마무리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니, 작업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군.”
오히려 좋았다.
고독은 그의 오랜 친구였으니.
‘그나저나… 티모테 수도원장은 교단 내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까?’
그가 이곳에 오기 전 알아본 바로는 퐁트브로 수도원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수도원이었다.
그런 곳을 책임지고 맡고 있으니 영향력이 적다 할 수는 없겠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그의 입김이 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교황을 움직일 수 있다면….’
바야흐로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기는 저물고, 인간이 스스로 개척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교황은 여전히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존재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접근하는 프리패스는 그의 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든 교황의 눈에 들어야 해.’
퐁트브로 수도원의 설계 결과가 그 지름길이 될 것임을.
예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피로했던 몸에 다시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예건은 다시금 도면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도면 작업에 한참 열중하고 있는데, 조용하던 작업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구둣발 걸음이 예건의 곁으로 와 멈췄다.
“성도님? 잠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예건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마도 이곳 작업실에서 가장 어린 수도사로 보였던 남자가 예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요?”
“네. 첫날 오셨을 때 잠시 얼굴 뵀는데, 저 기억하시죠?”
“네…. 얼굴은.”
“도미니코입니다.”
“한예건입니다. 전 세례명이 없어서….”
“이해합니다.”
도미니코는 선한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커다란 머그잔을 내밀었다.
“따뜻한 차를 좀 가지고 왔는데, 잠시 밖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상대의 친절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밖으로 나서자 선선한 바람에 바다 내음이 눅진하게 묻어났다.
예건은 도미니코가 건네는 잔을 받아 향기를 음미하고는 입을 축였다.
따스한 액체가 고운 향기를 머금고 입술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메말랐던 목구멍이 부드럽게 열렸다.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향이 좋군요.”
“하하. 얼마 전 영국에 다녀온 형제님께서 구해 온 홍차입니다. ‘천둥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다즐링이죠. 청포도 향과 비슷하다고 해서 홍차계의 샴페인이라고도 불린다죠.”
“그렇군요.”
예건이 차를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미니코가 음성을 줄이며 작게 물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네. 딱히.”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평온해 보이시거든요.”
“그런가요?”
“네, 수도 생활이 체질이신 것 같아요. 일반분들은 하루 체험도 힘들어 하시거든요.”
“그렇군요.”
그 후로 도미니코는 이런 저런 소재를 꺼내 이야기를 이어가며 예건과 친분을 쌓으려 노력했다.
목적이 있어 찾아온 것은 분명한데, 어쩐지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아 오히려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차를 모두 마신 예건이 그에게 잔을 건네며 감사를 전했다.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휴식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건이 먼저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도미니코가 황급히 그에게 물었다.
“왜 아무도 먼저 도와주겠다 말을 건네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그냥 수행 중이라 말을 아끼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대게 그렇지 않습니까?”
“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도미니코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보통 분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제가 어리석었군요. 떠 볼 게 아니라 제가 먼저 진심으로 다가갔어야 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 예건은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티모테 수도원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성도님께서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래서 아무도 성도님께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겁니다.”
“흠….”
도움이 필요했던가?
글쎄.
그냥 조용해서 집중이 잘 되기만 하던데.
그런 예건의 속마음은 모른 채, 도미니코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압니다. 이곳이 이방인에게 얼마나 폐쇄적인 곳인지. 그간 얼마나 답답하고 마음이 불편하셨을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괜찮다고 말하기엔 대화가 너무 멀리 가 버린 것 같기에 그저 시선을 떨궜다.
그게 안쓰러워 보였는지, 도미니코는 예건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에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지 물어보시고요. 물론 가브리엘 님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지만, 성도님께 조금 도움을 드린다고 해서 저를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저를 많이 신뢰하시거든요. 하하하.”
예건은 도미니코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럼,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곳 몽생 미셸 소속의 성직자 분들은 미카엘 대천사님이 나타나신 꿈을 얼마나 신뢰하나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도미니코가 코를 찡긋하며 물음의 의도를 파악하려 조금 뜸을 들이다 답했다.
“이곳 몽생 미셸은 미카엘 대천사님께 봉헌된 장소입니다. 제가 성직자님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꿈의 의도는 명확히 주님의 신도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왜곡하거나 부풀려지는 것 없이 말이죠?”
“당연합니다.”
“그렇군요.”
도대체 왜 예건이 이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던 도미니코는 혹시라도 예건이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낼까 염려해 표정을 냉정하게 굳히고는 덧붙였다.
“거짓을 미카엘 대천사님의 뜻으로 왜곡하거나, 그분의 뜻을 어기고 따르지 않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제야 도미니코는 마음이 놓이는 듯 본래의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성도님이 작업하신 도면을 보았습니다. 이곳 어느 수사보다도 성도님의 작업이 월등히 빠르고 훌륭합니다. 그건 제가 보장하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이라면?”
도미니코는 멋쩍은 얼굴로 부연했고 예건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설명이 끝났을 때, 예건은 흔쾌히 승낙했다.
“뭐,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군요. 제가 하죠.”
* * *
섬의 북서쪽.
몽생 미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샤펠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유독 매서운 태풍에 지붕 아래까지 물이 찼었고, 그 이후 가끔 관리를 위해 수도사들이 드나드는 것을 빼면, 거의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이곳 건물들이 워낙 오래되었고, 복제해야 할 자료에 비해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관광객들이 많이 드는 곳부터 보수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평소 이 샤펠의 아늑한 분위기를 좋아했던 도미니코는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언젠가 자신이 새롭게 디자인을 보완해 개인 기도실로 사용하자고 의견을 내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다 예건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 틈틈이 샤펠을 디자인해보는 것이 어떻겠는지 제안한 것이다.
예건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해안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그마한 성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음. 꽤 아담하네.”
가로 5미터, 세로 7미터의 작은 직사각형, 세모꼴의 박공 지붕으로 이루어진 10명 남짓한 인원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이즈의 작은 성당.
지붕 위 동상에도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지붕까지 노란 이끼가 가득했다.
예건은 도미니코에게서 받은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딸깍.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 손잡이를 돌리자,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리는 문.
내부는 밤처럼 깜깜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어이쿠!”
입구에 단차가 있었던 것인지 발을 헛디뎠으나 부리나케 중심을 잡아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휴대폰의 조명을 켜고 내부를 비췄다.
외부에서 본 형태 그대로 생긴 내부.
다만 벽 두께가 두꺼워서인지, 내부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밖은 벌써 해가 차올라 훤해지기 시작했는데, 내부는 여전히 어둡고 음습했다.
벽 속에 스며든 바닷물에 염분이 가득한 공기는 숨쉬는 것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일단 빛부터 보강해야겠군. 환기도 해야겠고.”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보완해야 할 부분과 방법들이 떠올랐다.
이제 돌아가서 도면만 그리면 되겠다고 생각한 찰나, 그의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왜? 여기만. 다른 돌을 사용한 거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바닥부터 천장까지 비슷한 패턴으로 이어진 석벽.
하지만 분명 다른 돌들과 재질부터 만들어진 시기까지 다른 게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벽 표면을 매만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중 구조?”
* * *
태연히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예건의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때문에 복잡했다.
샤펠에서 자신이 본 벽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위장해 만든 이중 벽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걸 처음 발견한 것은 자신뿐인가? 아니면, 이곳 수도원 사람들도 알고 있을까?
이곳 몽생 미셸의 시설은 모두 문화재급의 가치를 지닌다.
벽을 뜯어 내부를 확인하려면 수도원장의 허락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외부인인 자신의 말만 듣고 벽을 뜯을 리는 만무했다.
일단 예건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바닷가 샤펠에 대해 좀 더 확인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잠시 손을 쉬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성도님, 작업은 잘 되어 가십니까?”
“아! 마테오 님, 오랜만이군요.”
마테오가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어제 아침에 뵙지 않았나요?”
“그런가요? 작업 시작하면 시간 가는 걸 잘 몰라서요.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작업에 불편은 없는지 확인 차 들렸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속내는 달리 보였다.
티모테 수도원장이 관리를 맡겼으니, 감시하러 온 거겠지.
“리스트에 있는 작업 내용을 말하시는 거라면, 2주 정도면 끝날 것 같습니다.”
“네?”
마테오가 흠칫하며 되물었다.
“2주…요?”
“네.”
예건이 단호히 대답하고는 부연했다.
“그런데 기존 도면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 부분을 보완하려면 일주일 정도는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엉터리 도면을 그린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