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왕실 프로젝트 (2)
프랭크 게리가 미국으로 떠나고 예건은 홀로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당연히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가장 먼저 찾았을 것이나, 오늘은 달랐다.
도착한 곳은 바르셀로나 시내와 멀리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지나다니는 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한적한 장소였다.
그가 현장에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있던 관리자가 다가섰다.
“미스터 한?”
“네, 전화 드렸던 한예건니다. 프랭크 게리 건축사님 요청으로 현장 조사를 나왔습니다.”
“연락 받았습니다. 편하게 둘러보십시오.”
그는 예건의 손에 들린 카메라와 도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입장을 허락했다.
수도나 전기 배관이 전무한 나대지였기에 현장에서 확인할 것은 그리 없었다.
대지의 범위와 주변 경관, 경사 등의 기본적인 내용만 파악하면 될 터.
그렇기에 관리자는 일이 금방 마무리될 거라 판단하고 입구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현장 촬영을 마치고도 한참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한 시간 가까이 풍경을 감상하다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를 보며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관리자는 예건에게 다가가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습니까?”
“흠. 글쎄요. 해가 저물 때까지는 기다릴 생각입니다. 어느 방향의 야경이 좋은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군요.”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 현장에 울타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제가 알아서 둘러보다 가겠습니다.”
“흠….”
관리자는 한참을 서서 고민하더니 이내 예건의 뜻을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죠.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혹시 제가 매일 다른 시간에 방문해도 될까요?”
“문제 될 건 없지만,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이곳 주민들이 매우 폐쇄적인 분들이라 동네에 낯선 사람이 돌아다니는 걸 무척이나 꺼리시거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후 예건은 매일 다른 시간에 현장에 방문했고, 그때마다 관리자에게 연락을 남겼다.
관리자는 틈틈이 현장에 들러 그의 행동을 살폈고, 예건이 매일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그리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실측하는 건가 싶었으나, 그의 주변에 측량기는 물론 줄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네.”
그러기를 일주일.
매일 문자로 현장 방문 시간을 알려왔던 예건이 전화를 걸었다.
– 오늘을 마지막으로 현장 조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필요한 건 다 확인하신 겁니까?”
– 네. 충분히요.
“아무쪼록 좋은 설계안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공주님께서 많이 까다로우신 편이거든요.”
관리자는 뭔가 덧붙이려다 함구했다.
– 결혼 후, 첫 집이니 당연하겠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디자인은 잘 나올 테니 걱정 마십시오.
관리자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마치 예건이 자신이 건축가인 양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회 입문한 새내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가 마치 자신이 책임자인 것 마냥 행동하니 그럴 수밖에.
“거장이라 불리는 분이니, 당연하겠지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관리자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혼잣말을 했다.
“글쎄. 괜한 헛수고만 한 것 같은데…. 말해줄 걸 그랬나?”
얼마 전 공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아버지 명령이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가 살 집이니,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으로 지어야죠. 아버지께 전해주세요, 건축가는 제가 고르겠다고.’
이미 스페인 왕실에 보고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는 왕의 명령이 없었으니, 관리자로서 대답을 기다릴 뿐.
하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 것이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매사에 순종적인 공주였으나, 어쩐 일인지 자신의 결혼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만큼은 여간해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싫다는데 관리자가 뭘 어쩌겠어? 알려준다고 해도 상황이 바뀔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한예건은 부동산 관리자의 머릿속에서 금세 잊혀졌다.
* * *
“루시아 공주를 만나고 싶다고요? 왜요?”
“불가능한가요? 크리스티앙 정도의 기업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예건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하자 도도한 표정의 니콜이 뾰족하게 대꾸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예요?”
“일을 꾸미다뇨. 일이 좀 더 잘 되게 하려는 거죠.”
예건은 능글맞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프랭크 게리 건축가님께 들어온 의뢰가 엎어질 거다 그 뜻이에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이미 스페인 왕가에서 디자인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니콜이 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예건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스페인 왕실은 엄청 보수적인 왕가에요.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에 국민들의 눈치도 엄청 신경 쓰는 편이죠.”
“그래서요?”
“아무리 현대적인 건축물을 원한다 해도 그것이 프랭크 게리의 해체주의 건축물은 아닐 거란 말입니다. 컨셉 디자인을 한다고 해도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반려시킬 게 뻔해요. 게다가 공사 기간도 1년밖에 안 남아서 게리 교수님 입장에서는 오히려 피하고 싶을걸요. 결국, 스페인 국왕이 생색내려고 맡긴 프로젝트란 뜻이죠.”
“흠….”
예건의 말이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쥔 카드를 쉽게 꺼낼 수는 없는 법.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리 교수님이 한예건 씨한테 프로젝트를 맡긴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러니 먼저 루시아 공주를 만나 설득해야죠. 그녀가 제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싶게 만들면, 게리 교수님도 흔쾌히 업무를 이관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모두가 해피해지죠.”
“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이 틀어져 스페인 왕가와 프랭크 게리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니니, 적임자를 소개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게 보기 좋겠지.
“소개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게 뭐죠?”
절반 정도 예건의 설득에 넘어간 니콜은 마지막 딜을 하듯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건은 그런 니콜의 시선을 피하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흠. 인테리어까지 맡게 되면 장식품들도 꽤 많이 필요할 텐데…. 크리스티앙 정도 규모면 그 정도 수입으로는 역시 만족스럽지 않겠죠. 소개해 주는 게 어려우시면 그냥 소더비로 가보죠.”
“자, 잠깐만요. 미스터 한!”
예건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액션을 취하자, 니콜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뭐, 그 정도면 거래해볼 만하겠네요.”
“그렇습니까?”
“하여튼 능구렁이라니까. 제가 미스터 한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예건이 눈빛을 진지하게 바꾸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일이 잘되어 제가 목표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예건은 확언하듯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찾은 피카소의 작품을 크리스티앙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피카소?”
그제야 예건이 과거 피카소의 숨겨진 작품을 찾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떠오른 니콜.
“정말 찾은 거예요?”
“네. 제가 잘 보관하고 있지요.”
“진짜? 거짓말 아니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니콜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좋아요! 미스터 한의 목표가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문제가 될만한 일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울게요. 단!”
니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작품, 꼭 나한테 맡겨야 해요.”
“물론입니다.”
그제야 니콜은 환한 얼굴로 자신의 수첩을 펼쳐서 비행기 표를 건넸다.
“이번 주 토요일, 마드리드에서 개최하는 파티가 있어요. 루시아 공주가 개최하는 자선 행사죠. 회사 대표로 내가 참여하기로 했어요.”
“벌써 거기까지 확인한 겁니까?”
예건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잊었어요? 여기 크리스티앙이에요.”
니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물론 내가 아니라 대표님 능력이긴 하지만.’
“역시! 니콜을 만나면 방법이 생길 줄 알았어요. 그럼, 공항에서 뵙죠.”
예건은 말릴 새도 없이 티켓을 챙겨 돌아갔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싱겁게 웃던 니콜의 촉이 예민하게 발동했다.
“분명 또 엄청난 게 나오겠지?”
그녀는 자신의 티켓을 내려다보며 마담 르네의 당부를 머리에 새겼다.
‘한예건, 그를 소더비에서 신경 쓰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에 관한 거라면 앞으로 니콜이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마담 르네가 피카소의 ‘꿈’을 그에게 넘긴 후, 경쟁사인 소더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니콜도 잠자코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피카소의 숨겨진 그림 한 점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마담 르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마담 르네의 집무실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자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한 복장을 마련하려 마드리드 중심가의 루이비제 명품관에 들른 루시아 공주와 그녀의 친구들.
“와! 이게 이번 시즌 한정판이라는 그 옷이야?”
“진짜, 예쁘다. 잡지에서 본 것보다 실물이 훨씬 고급스러운데.”
“디테일이 살아있어!”
그녀가 예약해 놓은 신제품들을 들여다보며 친구들은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다.
“이번 시즌 컨셉은 플라워인가 보네요.”
“역시, 공주님의 안목은 탁월하십니다. 맞습니다. 이번 한정품은 저희 회사 수석 디자이너 사샤 마르소님께서 특별히 고풍스러운 아르누보 스타일의 플라워 패턴을 적용해 기존의 단순한 디자인에서 탈피하고 엘레강~스한 품격을 높인 제품입니다.”
이후 점장은 패턴의 아름다움과 특수한 가공 공정을 여러 번 거쳐 질리지 않는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자랑했다.
“이번 시즌 디자인은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특별한 상품이라 100 피스 한정으로 VVIP 고객들만 제한하여 구입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제품이죠.”
“어쩐지. 이 디자인 백화점에서는 없던데.”
“어째~, 너무 아쉽다.”
함께 온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부러워했다.
“한 번 착장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루시아가 탈의실에서 나오자, 그녀를 본 친구들의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와~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신화 속에서 나온 플라워 여신 같아.”
“진짜! 너무 예쁜 거 아니니? 이건 자선 행사용이 아닌데? 바로 약혼식장에 달려가야 할 착장이야.”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무슨 소리야. 너한테 딱인데!”
“호호. 그래?”
숨기지 못한 미소가 자꾸 새어 나왔다.
“포장해 주세요.”
“네, 공주님.”
점원이 상품을 포장하는 동안 점원이 내 온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중에 친구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건축가는 정했어?”
“아직.”
“내년 9월이면 너무 빠듯한 거 아니니?”
“안 그래도 고민이야. 하지만 신혼집인데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는 거잖아.”
루시아가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자 대대로 부동산 사업을 하는 친구가 물었다.
“어떤 스타일로 하고 싶은데? 모던? 아니면 클래식? 원하는 스타일을 말하면 내가 아빠한테 물어봐서 추천해 달라고 할게.”
“흠… 모던한 것도 좋은데, 그냥 특색 없는 스타일은 싫어. 이럴 때 가우디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신혼집을 남편의 고향도, 그렇다고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가 아닌 바르셀로나로 선택한 것은 오로지 휴양지처럼 아름다운 도시 풍경 때문이었다.
특히나 카사 바트요와 같은 화려한 디자인에 절로 눈길이 갔다.
‘검소한 생활이라면 이제 질렸어. 독립하면 내 마음대로 꾸미고 살 거야.’
그때, 친구 하나가 박수를 짝- 치며 주목을 끌었다.
“아! 나 봤어. 살아있는 가우디 말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