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영감의 건축 (1)
관계자들만 모인 소박한 착공식이었으나, 예상대로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관중석에 앉아 예건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이경록 차장이 조마조마한 마음에 달달달 다리를 떠는 것을 보고 하주연이 낮은 목소리로 지적했다.
“차장님, 그만 좀 떠세요.”
“으으. 난 참고인석에 앉아 있는데도 이렇게 떨리는데, 한 팀장은 얼마나 떨릴까? 어! 나온다, 나와!”
이 차장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한예건은 그 여느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마치 수없이 저 자리에 올라 본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여.’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평온한 분위기에 하주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태도 뿐만 아니라, 패션도 제법 신경 쓴 모양.
본래 나이보다 10살은 더 들어 보이게 만들었던 구식 양복을 벗고 유행에 밀리지 않은 맞춤 양장을 입은 한예건의 외모는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수려했다.
그의 자태에 홀리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이경록 차장이 곁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한 팀장 오늘 진짜 멋진데? 그대로 레드카펫 걸어도 되겠어. 아! 맞다. 하 대리,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요?”
“오늘 행사 마치고, 한 팀장 개인 인터뷰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사무실에서요? 정리 안하고 나와서 지금 엉망일 텐데.”
“다행히 거긴 아니고. 카사 바트요에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던데? 진짜 대박 아니냐?”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미지근했다. 하주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뭐야? 바르셀로나 오면서 여행 안내서 한 번 안 훑어본 거야? 가우디가 디자인한 건축물이잖아!”
“아! 그렇구나!”
“야~ 우리 하 대리도 맹할 때가 다 있네. 하여튼 대단하지 않냐? 거길 어떻게 섭외했을까?”
“그러게요. 관광객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빌리기 힘들었을 텐데. 설마….”
‘카사 바트요와 관련된 일이라도 있는 건가?’
평소 예건의 행동을 돌아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설마, 뭐?”
이경록 차장이 의아한듯 돌아보자, 하주연은 별 거 아니라며 덧붙였다.
“한 팀장이 가우디의 건축에서 많이 영향을 받은 건 이 차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알다 마다. 오죽하면 맨날 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샤프에도 가우디 마크를 새겨놨겠어?”
“그래서요. 혹시나 혼자 까사 바트요와 관련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물론 까사 루시아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쁠 테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한 팀장도 사람인데, 설마 여기서 일을 더 키우겠어요?”
하주연의 대답을 들은 이 차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하 대리. 나 이 얘긴 못들은 거로 할게.”
이 차장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가며 하 대리의 시선을 회피했다.
하지만 늘 외면하고 싶은 예측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머지않은 미래, 하주연의 예측은 예언이 되고야 말았다.
* * *
일찌감치 약속 장소에 도착한 예건은 먼저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얼굴을 향해 환하게 미소지었다.
“다니엘 씨. 일찍 오셨군요.”
“오! 미스터 한, 어서 와요. 커피는 뭐로 하겠습니까?”
“이곳에서 가장 맛있는 걸로 부탁합니다.”
“그러죠.”
나이가 스무 살 넘게 차이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제법 살가웠다.
마치 오랜 친구의 대화처럼.
다니엘이 직접 트레이에 음료를 받아 왔다.
“이곳 ‘카페 오페라’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겐 이걸 꼭 추천한답니다.”
“추로스군요.”
“하하. 맞습니다.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80년 가까이 전통을 이어온 가게거든요. 이렇게, 추로스를 초콜라테에 찍어 먹으면 됩니다.”
다니엘을 따라 한입 베어 먹었다.
달지 않은 추로스를 풍미 좋은 걸쭉한 푸딩 같은 초콜라테 찍어 먹으니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1929년에 오픈했다는 카페 오페라의 내부는 그 역사만큼이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붉은 창틀과 오렌지 빛이 감도는 간접 조명이 긴장된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산티아고 씨는 언제쯤 도착하나요? 이 맛있는 걸 우리만 먹고 있으니, 죄책감이 드는군요.”
산티아고 실바.
그는 카사 바트요의 복원 책임자인 건축가였다.
“하하. 곧 올 겁니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멋들어진 흰 턱수염을 기른 사내가 카페에 들어 서며 손을 흔들었다.
“이런, 내가 제일 늦어버렸군.”
“일하다 오신 거니 이해합니다.”
“미스터 한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꼭 노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고용주와 고용인이 같을 수 있습니까?”
가벼운 인사로 시작된 회의는 이내 까사 바트요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로 바뀌었다.
이들이 이렇게 돈독한 관계가 된 계기는 얼마 전 벌어진 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한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드리드에서 게리 교수와 헤어지고 예건이 바르셀로나에 혼자 왔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카사 바트요였다.
미뤄왔던 디자인 제안을 하기 위해 카사 바트요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려 방문한 것.
자유롭게 내부를 둘러보고 싶었기에 다니엘에게 따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대기줄을 한참동안 기다리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입구에 들어선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그마한 타일 하나 깨진 곳 없고, 자유롭게 휘어진 금속 장식물들도 모두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은 지 100년 가까이 된 건축물이 아직도 망가진 곳 하나 없이 건재한 것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앞 서 걷던 외국인 관광객들 또한 그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지, 연신 감탄하며 걷다 서기를 반복했다.
“우와! 디테일 정말 장난 아니다.”
“어떻게 벽이랑 천장에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지? 이 건물 만드느라 작업자들 엄청 고생했겠는데.”
“내 말이. 마치 건물 전체가 거대한 조각 같아.”
“그래, 조각! 네 말대로 조각품 내부에 들어온 기분인데?”
“이걸 디자인한 가우디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건축물을 만든 건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
관광객이 주고 받는 대화를 들으며 예건은 속으로 기꺼워했다.
‘이 현장에 투입된 작업자들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스킬을 자랑했던 이들이었으니 가능했던 거지.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만들었는데,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진짜는 이제 시작이라고.’
자부하건데, 이곳 카사 바트요의 핵심은 1층 입구가 아니라 노블 층이라 불리는 바트요 일가가 머물던 곳이다.
예건의 시선이 복도 끝 나선 계단에 닿자,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했다.
마치 영화 속 연인들이 만나는 장면처럼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느껴졌다.
‘이제 한 층만 오르면….’
나선형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기 위해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19세기로 돌아온 것 같은 데자뷰.
이 순간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쓸리며 지중해의 돛단배처럼 울렁거리던 그때.
2층 마지막 계단을 디딘 예건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꿈결을 걷는 것처럼 온화하던 그의 표정도 온데간데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그도 그럴 것이. 2층의 벽면 디자인이 그의 기억과 다르게 심플한 아이보리 스타코로 도색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예건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안내를 하고 있던 도슨트에게 다가갔다.
“뭐 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세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혹시…. 여기 벽면 말입니다. 원래부터 이런 마감이었나요?”
도슨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뻑거리자, 예건은 답답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물었다.
“원래 이렇게 단순한 컬러의 스타코로 마감되어 있었냐는 말입니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정말인가요?”
도슨트는 예건이 되려 엉뚱한 질문을 한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희 카사 바트요의 복원팀은 10년 이상의 복원 경력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로 이뤄진 팀입니다. 당연히 기존과 최대한 유사한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말로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예건은 그를 직접 만나야겠다 결심했다.
“그 복원 책임자라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분과 얘기를 좀 나눠 봐야겠습니다.”
에건이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회색빛 턱수염을 말끔하게 기른 키 큰 남성이 다가섰다.
“제가 복원 책임자입니다만. 왜 그러시죠?”
예건은 곧바로 예의를 취하고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아, 전 한예건이라고 합니다. 내부 디자인 제안 건 때문에 현장 조사 차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둘러 보다 보니, 여기 이 벽.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였을까?
상대는 매우 불편한 시선을 예건에게 보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와 저희 팀이 복원을 소홀히 했다는 겁니까?”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건은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곧바로 의미를 정정했다.
“잘 아시겠지만 이곳은 건축주인 바트요 일가가 직접 머물던 곳입니다. 그런 곳을 이렇게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자재로 마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흠….”
“제 생각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존 마감 위에 새롭게 스타코를 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이 바뀌어서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줬을 수도 있죠.”
예건이 말이 길어지려 하자, 복원 책임자는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는 갑니다만, 저희는 저희 나름의 기준과 절차가 있습니다. 그런 예측성 말만 듣고 벽을 뜯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주신 의견은 추후 팀원들과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건은 돌아서는 책임자의 앞을 막아 서고 그에게 제안했다.
“제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이라…. 만약 아니면 어쩔 겁니까?”
“디자인 제안을 공짜로 해 드리겠습니다.”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요?”
“마음에 들 때까지 해 드리죠.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예건이 턱을 치켜 들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꾸했다.
잠시 고민하던 책임자는 예건이 도무지 그냥 돌아갈 것 같지 않자, 한숨을 쉬며 제안했다.
“좋습니다. 오늘 관람이 끝난 후에 입구에서 봅시다.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
“네! 좋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이 즉석에서 체결되었다.
밤 9시.
건물 입구에 예건이 도착했을 때는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다니엘 베르낫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무모한 제안을 한 거 아닙니까? 산티아고는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설계비 한 푼도 못 받고 무료 봉사할 수도 있어요.”
웃자고 한 말이었으나 예건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제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실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무리한 제안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서 그만….”
“하하하. 그건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명할 생각입니까?”
예건은 대답대신 자신의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낮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끌과 정이 들어 있었다.
기존 마감 위에 스타코를 덮었다면 대략 10㎜ 이내의 두께로 발랐을 터.
아까 현장을 둘러보며 샘플링하기에 적당한,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을 눈여겨 봐 두었다.
바트요 집무실로 사용되던 방의 벽에 커다란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던 것.
‘저들이 순순히 승낙해줘야 할 텐데.’
저들이 벽면 일부를 뜯어내는 것에 동의만 한다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래, 어떻게 증명할 셈입니까?”
예건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샘플을 채취할 겁니다.”
“뭐라고요? 벽을 훼손하겠다는 뜻입니까?”
“훼손이 아니라 복구를 위한 과정입니다. 기존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복구의 가장 기본 아니겠습니까?”
[가우디, 카사 바트요 외관> [출처: 카사 바트요 홈페이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