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환상의 팀웍 (1)
제대로 된 도면 한 장 없이 스케치만 가지고 건축주를 설득했던 과거,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리오가 자신의 정체를 리오가 알아챘을 리는 만무했기에 침묵하고 있으니 그가 부연했다.
– 모레노 소장님의 스승이신 토레스 초대 소장님께서 건축가 가우디의 천재성에 대해 추억하며 자주 하셨던 말씀이라고 하더군요.
‘토레스? 그래, 견습하던 아이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지. 그런데 모레노가 그의 제자였다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수줍음 많던 아이 토레스가 가우디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다는 말에 반가운 기분이 들어 냉큼 물었다.
“토레! 아니, 토레스 초대 소장님께서는 여전히 건강하신가요?”
– 10여 년 전에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20주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저런…. 그렇군요.”
과거의 이름이 오가는 바람에 너무 들떠 있었던 것일까?
그만큼 실망감도 컸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돌연한 사고로 수장인 자신이 죽고 자본금이 부족해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아닌가?
그가 다시 돌아와 흩어진 자료를 취합하고 다시 프로젝트에 착수해 주었기에 지금의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었다.
괜시리 코끝이 찡해졌다.
예건이 말을 잃고 한숨만 내쉬자, 리오는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예건을 다독였다.
– 아마 모레노 소장님이 미스터 한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결심하시지 못하는 이유는 정통성 때문일 겁니다. 모레노 소장님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정말 사랑하는 분이시거든요.
“그렇군요.”
– 그러니 모레노 소장님을 너무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요.
“물론이죠. 이해합니다.”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정이 딱한 것이라면 예건 또한 만만치 않다.
자신이 20년만 빨리 환생했더라면 이렇게 복잡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말이다.
이후 리오는 예건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고, 예건은 여유가 생기면 초대하겠노라 대답했다.
통화를 끝내고, 예건은 손을 모아 턱 아래 괴고는 고민에 빠졌다.
“정통성이라….”
수도자의 마음으로 카탈루냐인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께 봉헌했던 성당.
그러므로 온전히 카탈루냐인의 손으로 완성하기를 바랐던 간절함이 지금의 배타적인 관습을 만든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벌어진 일.
이를 타파하기 위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만든 룰이니, 나 스스로 깨야겠지.”
새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한 법.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인정받고,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아야 한다.
신께서 자신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양의 나라, 한국에서 환생하게 함은 단순히 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염원을 담아 건축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통해 인류 전체의 화합을 이끌고자 함이 아닐까?
예건은 환생 후 처음으로 간절한 마음이 되어 손을 모았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이루소서.”
신의 뜻이 자신의 목표와 같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가식은 일절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신과의 거래.
“제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완성하게만 해 주시면 이 한 몸 갈아 넣어서라도 최고의 품질로 보답하겠습니다.”
건축주가 사람이든 신이든, 어차피 각오는 한결같았다.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 * *
착공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공 업무가 시작되자 온갖 회의 참석에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2주 정도가 흐르고 건축 각 파트의 조율이 끝났을 무렵, 예건은 자신을 도와줄 인테리어 팀을 꾸리기 위해 팀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의 도움을 받아 굵직한 시공 파트는 쉽게 세팅할 수 있었으나, 타일 패턴을 구체화할 디자이너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제 얼추 밑그림이 그려지는군요.”
“문제는 타일이군요. 타일 제작이야 기간이 충분하니 대기업에 맡겨도 된다지만, 디자이너 겸 시공 관리자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그건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그게 누굽니까?”
예건은 명확히 답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일단 만나 보고 말씀드리죠.”
다시 찾은 그라노예르스.
시골스러운 풍경은 여전하나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건물만큼이나 낡아 있던 세라미카 로메로의 도자기로 만든 간판 대신 철로 만든 새 간판.
그새 가게는 식료품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걸 막을 도리는 없지.”
건물의 외관을 눈에 담고 있노라니,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생의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안토니 로메로.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미스터 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요?”
“전에 왔을 때가 떠올라서요.”
“추억을 떠올리기엔 너무 젊은 나이 아닙니까? 일단 저쪽으로 가시죠.”
“네, 그러죠.”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 세라미카 로메로가 건물이 보이는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신문에서 미스터 한의 기사를 보고 한 번쯤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습니다만, 진짜 연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도움을 받을 데가 로메로 님밖에 없어서요.”
“어휴~ 도움은요. 이제는 그저 일개 회사원일 뿐인데요.”
결국, 안토니 로메로는 할아버지 때부터 운영하던 타일 공방을 접고 얼마 전부터 타일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은 할 만합니까?”
“그냥 하는 거죠, 뭐. 돈을 벌어야 먹고 사니까.”
발루아 1차 물량이 완성되어 확인 목적으로 왔을 때, 예건은 갑작스레 계약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그에게 물었었다.
그는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허심탄회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안토니의 아버지 호세 로메로는 알아버지 조안 로메로의 사업을 이어받아 타일 공장을 본격적으로 확장한 인물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타일 공장을 가지고 있었던 호세 로메로의 가세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시장 상황은 고려하지도 않고 무리하게 공장을 확장하며 받은 투자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를 확장해 이전하고 10년 동안 꾸준히 매출이 상승하며 성장 가도에 오르는 듯했으나, 이후 더 큰 규모의 경쟁사 등장과 잘못된 타일 수요 예측, 그리고 값싼 중국산 타일의 등장으로 서서히 매출이 하락하기 시작했다고.
“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문제였죠.”
결국, 아버지는 화병으로 쓰러지고 창고로 사용하고 있던 할아버지 공방을 빼고는 모두 투자금을 갚기 위해 처분해야 했다고.
남아 있던 기술자들을 모야 재개를 노렸으나, 이미 열악해질 대로 열악해진 사업을 재개하는 건 쉽지 않았다.
호세 로메로에게서 그가 물려받은 것은 엄청난 빚뿐이었다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장식한 타일의 제작 공법을 계승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수공예품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직접 만든 제품보다 품질이 좋고 디자인도 균질한 공장 타일이 훨씬 인기니까요.”
당시 할아버지의 타일 제작 기술을 대기업에 넘기고 조금이라도 빚을 줄이려는 찰나에 예건이 찾아갔던 것이다.
“그럼, 타일 제작 기술은요?”
“미스터 한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지금 포기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비싸게 값을 매겨 줄 테니 팔더라도 당신한테 팔라고 말이죠. 그때 조언해주신 대로 판매 수익금 전부 빚 청산에 썼습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는 거고요.”
“하하. 다행이네요.”
예건은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럼 이제 제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차례군요.”
예건은 안토니에게 자신의 제안을 제시했고 그 내용을 들은 안토니는 기함했다.
“500평짜리 공장이요? 그걸 정말 제게 맡기신다는 겁니까?”
“네, 그건 조안 로메로의 기술을 지금껏 지켜 주신 것에 대한 대가이고요. 제가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따로… 라면?”
“카사 루시아의 타일 디자인 및 제작을 맡아주세요.”
“카사 루시아…. 설마 스페인 공주의?”
“맞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안토니는 과거 한예건과 함께 했던 발루아 프로젝트를 잊을 수가 없었다.
타일 제작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사자인 자신보다 훨씬 방대한 그의 지식에 놀라는 것은 기본이요,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늘 넘쳐났다.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못했던 제작상의 문제점들이 그와 함께 대화하는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해소되는 것이 신기했다.
사정만 어렵지 않았다면 그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싶었던 그였다.
때문에 안토니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미스터 한과 함께할 수 있다면 제가 영광이지요.”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어려워서 더 가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쉬운 길을 바랐다면 진작에 복잡하고 귀찮은 수공예 타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을 겁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안토니는 자신의 가슴에 주먹을 부딪치며 자신감을 표했고, 예건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화답했다.
“각오가 아주 마음에 드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타일 디자이너 안토니 로메로의 합류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부터 계속 함께했던 조각가 조창준과 황금금속 황두철을 각각 목공과 금속 책임자로 발령하고, 발루아에서 함께 손을 맞췄던 프랑스 유명 조각가 클로드가 흔쾌히 석공 반장역을 맡아 주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각 파트의 수장이 모두 예술가로 이루어진 환상의 수공예 시공팀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페인팅 아티스트뿐.
산티아고에게 소개받은 바르셀로나 출신 성공한 화가 엘사 자파타.
그녀는 예건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대뜸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산티아고가 그러던데? 천재라고.”
“네?”
예건이 당황해 산티아고를 바라보자, 산티아고는 민망한 듯 얼굴이 벌게지며 엘사를 나무랐다.
“하하. 얘가 좀 당돌한 성격이라, 자네가 이해하게. 엘,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실례잖아.”
“알게 뭐람.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데?”
“증명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응, 난 재미 없으면 일 안 하거든.”
“흠….”
예건의 눈빛이 돌연 진지해지자 엘사가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표했다.
물론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정말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당황하니까 귀엽잖아?’
오랜 친구인 산티아고에게서 한예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동하던 차에 합류를 제안받은 그녀였다.
하지만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건 왠지 흥이 나지 않았다.
산티아고가 그에게서 보았다는 천재성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피던 예건이 그녀의 핸드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수건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음? 이거?”
예건이 선택한 손수건은 그녀가 유명 명품 브랜드와 합작해 만든 제품이었다.
가방에 장식으로 둘러놓은 실크 손수건을 풀어 예건에게 건네자, 그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대략 30분 뒤.
예건은 쟁반을 하나 들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이게 도대체… 뭐예요?”
놀란 엘사는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사가 건넨 꽃무늬 손수건이 카테너리(Catenary:현수선) 아치 형태로 얼어 있는 것이 아닌가?
기괴한 것은 그 형태가 중력을 따라 아래로 쳐진 것이 아닌 역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예건은 엘사가 아치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쟁반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엘사 님께서 저희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면 작업하실 공간의 일부입니다. 현수 아치에는 아직 제대로 된 장식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완성 후 매우 아름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엘사가 예건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몇 미터나 되는데요?”
“연결 복도 쪽이라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실내 폭이 가로 5미터에 세로 12미터 정도 되죠.”
예건은 별거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으나, 엘사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미쳤어요? 그렇게 큰 공간을 3개월 만에 내 그림으로 채우라고요?”
[카사 바트요에 적용된 카테너리 아치>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