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환상의 팀웍 (2)
바르셀로나 출신 아티스트로서 현재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엘사 자파타.
엘사 자파타의 회화 스타일은 1970년대부터 대두되고 있는 하이퍼 리얼리즘부터, 단순하지만 화려한 컬러감으로 시대를 이끌고 있는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팔색조라는 별칭이 항상 그녀를 따라 다닌다.
그런 대단한 인물을 회유하러 왔으면서 그녀의 작품을 미리 조사하지 않았다면 예의가 아닐 터.
핸드백의 손잡이를 장식한 손수건을 보자마자 그녀가 디자인한 제품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작품의 주제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도드라지고, 배경이 되는 풍경의 경계는 모호하게 만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구성 방식.
그녀와 다른 극사실주의 작가를 구분 짓는 그녀만의 특징이기도 했다.
손수건을 물에 적셔 현수 아치 형태로 얼린 다음 보여준 건, 상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일 테니.
“어려운 일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사 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고요. 물리적으로 작업 기간이 부족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건 디자인을 구체화하며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요. 말처럼 쉬울지 모르겠네요.”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한 엘사였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빡빡한 일정도 문제지만 이후 예건이 설명하는 컨셉이 더 골치 아팠다.
“이 넓은 공간을 전부 장미로 채워요? 하! 완성도 하기 전에 내가 질식할 거 같은데요.”
사실 그녀가 팔색조가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승부욕이 남다른 그녀는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고,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몰입했다.
최고가 되는 순간의 짧은 희열을 위해.
하지만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런 그녀가 평생 가우디 한 사람만 파고 있는 산티아고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아마도 서로 너무나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일 년 내내 장미만 보고 있으라는 말은 그녀에게 일 년 내내 만두만 먹고 지내라는 말과도 같았다.
지긋지긋 그 자체.
아마 그 일을 끝마치고 나면 평생 장미 향도 맡기 싫어질지도 모르겠다.
“작업을 진행하며 질릴 일은 없을 겁니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은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으니까요. 우린 그 자연을 이미지로 구현하려는 거고요.”
“어쨌든! 수천 개가 될지, 수만 개가 될지 모르는 장미를 나더러 그리라는 거잖아요. 지금!”
예건은 눈빛을 가라앉히고 흥분해 있는 엘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단순히 장미의 형상만을 바랐다면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다만 엘사 님이라면 꽃 한 송이마다 각기 다른 서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으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꽃의 서사란 말에 엘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최근 자신이 작품 속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표정 없는 대상에 서사를 담는 것이었으니.
“당장 답을 달라 재촉하지는 않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예건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다 전했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산티아고에게 엘사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왜?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전부!”
재능은 있지만, 영혼이 없는 그림.
냉혹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 평가했다.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이를 더하기도 전에 대중에게 주목받았고, 화려한 화풍은 그녀를 단숨에 유명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고, 비싸게 작품이 팔려도 가슴 속 헛헛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엘사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
작화 스타일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해지는 것 또한 그렇게 파고들다 보면 자신의 재능이 언젠가 대상에 깃든 감정마저도 베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혼을 통째로 옮겨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흔적만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물화든, 정물화든, 풍경화든.
그녀의 화판 속 대상은 그 순간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담고는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 속에서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동시에 뭘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무력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감정 불감증 같은 게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설마… 내가 소시오패스? 뭐, 그런 건가?’
덜컥 겁이 나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자신이 ‘자책형 완벽주의자’라나?
세상과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서 성과에 집착해 생긴 병이란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으니 그리 걱정할 상태는 아니라고 했지만.
궁금했다.
과연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도 자신과 똑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지.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과 비슷한 대상을 분석하고 싶었다.
왠지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한예건이 그녀를 만나길 원한다는 걸 산티아고에게 들었을 때, 흔쾌히 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 사람들에게 주목받아 한창 기고만장해 있을 젊은이.
그에게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기고만장은커녕 그가 풍기는 진지한 태도를 보고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게 아닌가?
돌연 그녀는 분한 기분이 들었다.
“지가 잘났으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난 건데?”
“뭔 소리야? 미스터 한이 언제 잘난 척을 했다고?”
“몰라! 나 절대로 이 일 안 해! 그러니까 앞으로 내 앞에서 미스터 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그래, 알겠다. 알겠어. 네 고집을 누가 꺾겠니?”
산티아고가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가서 일해야지.”
“뭐? 밥은? 같이 저녁 먹기로 했잖아.”
“나중에. 나 내일 미팅 준비해야 해서. 어이쿠, 벌써 6시가 다 됐네. 나, 먼저 간다! 저녁 맛있게 먹고 들어가.”
“야!!”
결국, 산티아고마저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엘사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그녀의 시선에 예건이 두고 간 손수건이 들어왔다.
엘사는 예건이 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어 올려서 아치의 내부를 올려다보았다.
늘어진 사슬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길쭉한 타원형 아치는 일반적인 아치 형태 보다 수직성이 강조되어 세장미가 돋보였다.
예건이 말했던 공간의 컨셉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눈의 여왕 동화책에 여름 정원이라는 게 있었다고? 겔다가 탈출할 수 있게 장미가 도와줬고?”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런 장면이 있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꽤 자주 읽었던 동화였던 것 같은데.
“너무 예전에 읽어서 그런가? 기억도 안 나네. 마침 시간도 비었는데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동화책이나 한 번 사 봐야겠다.”
절대로 작업에 참여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지.
저녁을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기 시작한 엘사는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결국 잠들지 못했다.
“이 동화책, 생각보다 엄청 재밌잖아?”
그런데 이걸 어떻게 건축물에 녹여낸다는 거지?
설마 구엘 공원에 있는 과자의 집처럼 만들겠다는 건가?
그거야 가우디가 디자인 했으니까 그런 디자인이 나올 수 있었던 거지, 잘못하면 엄청 유치해질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엘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진짜 순수하게 디자인이 궁금해서 가는 거야. 내가 낸 세금을 쏟아붓는다는데, 유치한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걸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서둘러 외출 준비를 끝낸 엘사는 어제 입었던 외투에서 예건의 명함을 찾아내고는 차 키를 챙겼다.
* * *
어릴 적 혼자 공상을 하며 지낸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예건은 전생에 건축물의 형태에 스토리를 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예로 구엘 공원 입구의 경비실은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의 집을 연상하며 만들었고, 카사 바트요는 산 조르디의 영웅담, 사그라다 파밀리아 때는 성서의 주요 사건을 벽면에 조각으로 박제하기에 이르렀다.
전설이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자존감 넘치고 의협심 강한 주인공들을 동경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화책을 읽다가도 주인공들이 낯선 장소에 도착하면 그 풍경을 묘사한 활자를 따라 눈을 감고 나름대로 상상해보곤 했다.
상상하는 것은 힘이 들지 않으니 몇 번이나 허물면서 다시 쌓아 올렸다.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상상은 거듭할수록 디테일해지고, 뚜렷해졌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상상한 공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전생에 그가 건축가의 길로 들어선 이유였다.
스토리는 무표정한 건축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단순히 건축물의 외관을 꾸미기 위함이었다면 그리 즐겁게 완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그가 카사 루시아에 담으려고 하는 이야기는 ‘눈의 여왕’
겨울과 여름, 눈과 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아름다운 서사와 함께 공간에 담고 싶었다.
트롤의 장난으로 세상을 추하게 왜곡하는 마법 거울이 조각나고, 그 조각의 일부가 눈과 심장에 박혀버린 카이.
해맑던 어린아이 카이는 서서히 감정을 잃고 차갑게 변해 버린다.
결국, 카이는 우연히 다시 마주하게 된 겨울 여왕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를 따라가게 되는데….
사라진 카이를 찾기 위해 겔다가 긴 여정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차갑고 매서우며 아름다운 겨울 여왕과 상반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여름 정원의 마녀 할머니다.
마녀는 우연히 자신의 정원에 들어온 겔다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지우고 카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여름 정원에서 장미 덤불도 모조리 치워버린다.
하지만 장미의 도움으로 겔다는 자신이 카이를 찾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겔다는 여름 정원을 벗어나 여정을 계속하고, 결국 카이를 찾아 집으로 돌아온다.
동화책 눈의 여왕은 인간의 성장을 그리는 성장스토리다.
눈의 여왕과 마녀 할머니는 둘 다 아이를 자신에게 속박하는 존재, 즉 세상에 홀로서기 두려워 만든 보호막이다.
루시아 공주가 독립을 위해 처음 마련한 공간이 바로 바르셀로나 신혼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의 여왕이 머릿속에 번뜩하고 자리 잡았다.
순수한 백색의 눈꽃과 정열적인 붉은 장미는 이제 막 사랑의 결실을 본 두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름 정원의 장미가 겔다가 주체적으로 일어설 수 있게 만든 모멘트다~, 이 말이죠?”
“그렇죠.”
“흠! 그럼, 장미마다 다른 서사가 필요하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다중인격도 아니고, 독립하겠다는 의지, 그거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직원들이 출근도 하기 전부터 사무실 앞에 도착해 자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엘사는 다짜고짜 까사 루시아의 건축 컨셉에 대해서 물어왔다.
예건은 그녀의 질문에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일일이 답하며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중이다.
“사람마다 어른이 되는 계기는 다 다르니까요. 어떤 이는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요.”
“보는 사람의 감정을 장미에 이입하겠다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우주에 자신의 별이 있듯이, 장미에도 자신만의 장미가 있는 거죠. 어린 왕자의 장미꽃처럼.”
“하지만 왜 그래야 하죠? 여긴, 개인 주택이잖아요.”
“기부할 거니까요.”
“아….”
엘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착실하게 내는 세금이 이상한 사람이 손에 쥐어진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좋아요!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요.”
“뭐든지.”
“왜 나예요?”
엘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물었다.
이전 의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최고니까요!’라는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이었으나.
예건의 대답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이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작업인 것 같아서요.”
[가우디, 구엘 공원 관리실과 경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