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천재 건축가 (4)
카사 바트요 전시관의 설계가 한창 진행중이던 시점.
예건은 다니엘을 찾아가 연극배우를 채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건축물에 대해 설명하는데, 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네, 어려울까요?”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만… 너무 의외의 제안이라서요.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라면 전문 큐레이터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배우는 건축 지식이 부족할 테니까요.”
다니엘은 예건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 그리 답했다.
“물론 전문 큐레이터도 상주해야겠죠. 배우들이 맡을 역할은 그들과 조금 다릅니다.”
예건은 자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오~ 바트요에 숨겨진 상징들을 연극으로 풀어낸다라…. 그거 정말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런 방법이라면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재밌게 관람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흔쾌히 예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니엘의 추천으로 연극 연출가인 마리오가 까사 바트요에 합류하고, 각본도 준비되었다.
카사 바트요 전시의 오픈을 앞둔 3개월 전.
인근 소극장에서 배우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 * *
바르셀로나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페르난도는 카사 바트요에서 이벤트를 위한 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에 참가했다.
서른이란 나이에 뒤늦게 꿈을 찾아 시작한 연극배우 생활.
배고픈 직업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음에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꿈을 좇아 허송세월한 지 벌써 10년.
마흔을 훌쩍 넘기고 나니 적절한 배역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배우 생활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에 이 오디션을 발견한 것이다.
‘월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흔치 않은데…. 이번 배역만 따내면 계속 배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어!’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오디션에 참여할 배우들이 속속 도착하자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자신보다 훨씬 매력적인 배우들이 많았기 때문.
그들에 비하면 자신의 외모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다.
“페르난도 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진행 요원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아! 네.”
우당탕탕.
조급하게 서두른 탓에 그가 앉았던 간이 의자가 쓰러졌다.
다른 대기자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본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황급히 의자를 원위치로 옮겨 놓고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며 진행 요원을 따라갔다.
원래도 좁은 어깨가 긴장 때문에 더 딱딱하게 굳었다.
대기실보다 조금 어둑한 내부.
페르난도는 떨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로 향했다.
‘오디션이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떨리지?’
아무래도 오늘 오디션은 망칠 게 분명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란 생각 때문일까?
심장 박동 소리가 유독 귓가에 크게 들렸다.
* * *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예건은 씁쓸한 표정으로 전시회 총연출을 맡은 마리오 감독에게 말했다.
“배우들이 다 훤칠하네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특별한 오디션이라고 생각해서 더 말끔하게 차려입고 온 모양입니다.”
예건은 카사 바트요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대중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연극 형식을 가미한 전시를 기획했다.
산 조르디 전설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특별한 안내자를 배치하여 건축물 곳곳을 소개하기로 한 것.
다행히 많은 지원자가 오디션에 참여했고, 공주와 성기사 조르디 배역은 쉽게 정해졌다.
하지만 가장 평범하다 생각했던 안내자 역할에 적합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2층 노블 층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예건은 카사 바트요 구상 단계부터 가구를 배치하는 모든 과정을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안내자 역으로 건축가 ‘가우디’를 설정했다.
가우디로 분장한 배우가 직접 주요 공간을 안내하며 설계 의도를 설명함으로써 건축물이 지어지던 과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건은 이왕이면 그 역할을 전생의 자신과 닮은 이가 맡아 주길 바랐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분야에서 진심을 다하여 몰입한다면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기에.
“아직 대기 중인 지원자가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네.”
아쉬운 마음을 갈무리하고 다음 참가자의 프로필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 무명 생활을 알게 해 주듯.
A4 용지 석 장을 훌쩍 넘기는 빼곡한 필모그라피.
맡은 역할은 죄다 단역이었지만, 굴하지 않는 도전 정신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우당탕!
밖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잠시 후, 왜소한 남자가 쭈뼛거리며 무대 위에 올랐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 작은 키에 병약해 보이는 체격.
과거의 자신이 절로 떠오른다.
일단 외모는 합격이다.
‘연기도 곧잘 하면 좋으련만….’
마리오도 예건과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예건과 살짝 눈을 마주치고는 그에게 말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을 읽어보시고 준비되시면 편안하게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어… 그냥 읽으면 되는 겁니까?”
“네. 편안하게 읽어주세요.”
“네….”
페르난도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고 차분히 대사 내용을 확인했다.
‘음? 가우디?’
대본 속 역할은 카사 바트요의 탄생 과정을 설명하는 건축가 가우디 역.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건 어쩌면 하늘이 내게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페르난도는 평소 생각이 복잡해질 때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찾고는 했다.
종교적 이유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를 느꼈기에 그런 것이다.
100년 넘게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배우가 되고자 노력했던 10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 거대한 예술 앞에서 페르난도는 생각했다.
만약 설계자였던 가우디가 눈앞의 성공을 좇아 다른 일을 찾아 이곳을 떠났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세기의 역작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온갖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건축을 포기하지 않았던 가우디.
그를 생각하면 다시금 투지가 불타올랐다.
공주의 구원자가 산 조르디라면, 자신의 영혼을 번번이 구렁텅이에서 끌어 올리는 것은 가우디였다.
페르난도는 천천히 대사를 음미하며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조셉 바트요는 제안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집을 만들어 달라고.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제게 창작의 자유를 주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가 다른 건축주 같았다면 아마 그 길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내게 전권을 맡겼고, 나는 내 모든 영혼을 오롯이 이 건축물을 짓는 일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대본을 읽고 있노라니, 귓가를 울리던 심장 박동 소리가 서서히 지워졌다.
그렇게 대본 속 가우디에게 조금씩 동화되어 갔다.
침묵하며 눈으로 대본을 직시하던 페르난도는 입을 열어 서서히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타일을 배치하던 장인처럼.
또박또박.
대사를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고저 없이 담담하게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절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예건은 그의 목소리에서 기억의 잔상을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카사 바트요의 컨셉 아이디어를 얻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
제방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물방울 디자인을 떠올렸고,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수면을 보며 크라켈레 효과를 생각해냈던 그 순간이.
‘바다를 찾아간 것은 조셉의 아이가 인어공주를 좋아해서였지.’
인어공주가 살던 배경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바닷속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해저 왕국 아틀란티카는 그야말로 상상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으니까.
그렇게 컨셉을 잡은 그는 노블 층 곳곳에 바닷속 풍경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장식을 더했다.
거북이 등껍질을 모티브로 한 천장, 물고기의 가시를 닮은 환기구, 거센 회오리 물결을 닮은 천장.
처음 조셉이 가족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섰을 때, 눈이 휘둥그레져서 도도도 내부를 뛰어다니던 꼬마 아이들의 신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일깨울 수 있는 공간.’
아마 자신이 했던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프로젝트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고 보면, 조셉은 참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나 싶다.
어린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괴짜 같은 자신을 고용했으니.
어쨌든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고, 입주 후 한동안 꼬마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후문에는 매우 기뻤다.
“주거에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요구사항 외에 조셉은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아도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설계였던 것 같군요.”
덤덤하게 대사를 읊는 배우의 표정과 예건의 얼굴이 어느덧 닮아 있었다.
* * *
카사 바트요에서 새롭게 선보인 기획 전시는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2층부터 시작되어 옥상까지 이어지는 ‘가우디와 함께하는 스토리가 있는 건축’.
하루 2번, 옥상에서 진행되는 ‘산 조르디 전설’ 연극 관람.
19세기 주거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아르누보 모던 하우스’.
그리고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미디어 전시관, ‘가우디, 빛의 유희.’
지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미디어 전시관은 물방울을 닮은 색색의 유리구슬을 통해 투과되는 빛의 화려한 연출과 적절한 음악의 사용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몰입형 미디어 아트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수준 높은 기획 전시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멀리서 온 관광객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의 발걸음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덕분에 다니엘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다행히 예상보다 훨씬 빨리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미스터 한 덕분입니다.”
“다니엘 님께서 제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게 다 미스터 한의 아낌없는 투자 덕분이죠. 이제야 가문의 눈치를 조금이나마 덜 볼 것 같습니다.”
그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안도했다.
“그런데 꼭 가셔야 합니까? 이렇게 가시면, 언제쯤 또 뵐 수 있을지…. 미스터 한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곳에서 자리 잡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요.”
다니엘이 헤어짐이 아쉬운 듯 말꼬리를 늘였다.
“한국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요. 그 일만 마무리하고 돌아올 겁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오시는 겁니까?”
“그래야죠.”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대화 친구를 영영 잃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다시 만날 때까지 건승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예건을 가볍게 포옹했다.
* * *
긴 비행을 끝내고 도착한 인천공항.
공항 출입구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직원을 기다리며 김연희 대리가 물었다.
“오랜만에 한국 온 건데, 오늘 같은 날은 집에 먼저 들러야 하는 것 아니에요?”
“사무실에서 할 일이 좀 남아서요. 두 분은 먼저 퇴근하셔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쑥 빼고 차량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오경환이 몸을 홱 틀어 물었다.
“진짜요? 김 대리, 나도 집에 가도 돼?”
“대리님은 나랑 같이 사무실에 짐 풀러 가야죠. 설마 저 많은 짐을 나 혼자 옮기라는 건 아니죠?”
김연희가 가자미 눈을 하고 오경환을 노려보자, 오 대리가 움찔했다.
“에이~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야. 하하. 내가 설마 김 대리한테만 저 많은 짐을 옮기게 하겠어?”
카트 위에 사무실로 가져갈 서류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중요한 자료만 챙겨 왔음에도 양이 제법 됐다.
“먼저 퇴근하셔도 됩니다. 짐은 제가 출판팀에 가져다 둘게요.”
“어? 진짜요? 그럼, 진짜 갑니다?”
“네. 김 대리님도 걱정하지 마시고 바로 퇴근하세요. 부모님께서 많이 기다리실 텐데.”
김연희가 쭈뼛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배려해 먼저 가라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럼, 부탁드릴게요. 미련하게 혼자 힘쓰지 말고 꼭 직원들이랑 같이 옮겨요. 엄청 무거우니까.”
“하하. 염려 마세요.”
김연희와 신난 오 대리가 택시를 타고 먼저 공항을 떠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회사에서 보낸다던 차량은 20분 넘게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이경록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아직 안 갔어? 시간 맞춰서 영광 씨 보냈는데?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요?”
– 내가 전화해 볼게. 차가 많이 막혀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너무 늦어지면 택시 부르는 게 낫겠다.
“네. 알겠습니다.”
막 전화를 끊는데, 그의 앞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보조석에서 덩치 큰 남자가 내리더니, 예건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거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저기 뒤쪽으로 좀 비키세요.”
[카사 바트요, 회오리치는 천장>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