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우연 (2)
“…알고 있었나?”
“네, 오면서 최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길상수 이사를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곧바로 최미현 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가 어떤 성품인지 알아야 대화가 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얼마 전 길 이사가 사직서를 냈다는 게 아닌가?
정기택 상무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어쩌면 그의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 아닐까 넘겨짚었는데, 그게 맞는 모양.
예건은 길 상무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퇴직을 결정하신 이유가 실적 때문입니까?”
“크, 크흠….”
길 이사는 딴청을 하며 헛기침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곤란하게 됐네요. 공모전팀을 챙겨 달라는 김 대표님 뜻은 지킬 수 없을 테니.”
예건의 말이 공모전팀을 해체하겠다는 말로 오해한 길 상무가 펄쩍 뛰며 말했다.
“아, 아니. 왜? 내, 내가 나가면 한 팀장이 공모전팀을 편하게 맡을 수 있을 텐데!”
“누가 그럽니까?”
“응? 그야… 당연히….”
예건과 잠시 눈이 마주친 길 이사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나, 나는…. 그냥. 내가 여기 남아 있으면 팀에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정기택 상무가 안쓰러운 얼굴로 타일렀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자네가 혼자 지레 짐작하는 거지.”
“하지만…. 김 대표님이 떠나고 난 후에 내가 이끈 공모전팀이 단 한 건도 수주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잖아! 그게 모두 나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바보 멍청이라도 다 알 거야!”
길 이사는 머리를 싸매고는 괴로워했다.
“난! 최선을 다 했어. 하지만 결과가 이러니,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공모전팀의 주축이 되었던 김 대표의 부재로 인해 그를 대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꽤 컸던 모양이다.
누구보다 김수훈 대표의 건축 스타일을 잘 아는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김수훈 대표 스타일로 디자인을 한다고 해도 결국 그를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어려웠을 터.
등대 역할을 하던 구심점이 사라진 후.
공모전 팀원들이 느꼈을 허탈함과 무기력은 다른 설계팀 팀원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설계팀도 그랬겠지.’
갑작스러운 자신의 부재에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예건은 길상수 이사와 공모전팀에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그렇기에 길상수 이사는 한예건이라는 새로운 태양에게 스스로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금의 건축은 원맨쇼처럼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현재 공모전팀은 최고의 성과를 올리던 팀이다.
인원이 변경된 것도 아니고 내부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방향성만 제대로 잡아준다면 다시 원래의 폼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공모전팀을 완전히 거두어야 건림건축이 세계 최고의 건축회사가 되게 만들어 달라던 김 대표님의 뜻을 이뤄드릴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김수훈 대표가 자신에게 준 마지막 질문이라고 느껴졌다.
예건이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정 상무가 조급한 마음에 말했다.
“한 팀장, 이 친구 말주변 없는 거 빼면, 실력은 탄탄해. 내가 보증하네.”
“보증하실 필요 없습니다. 실력이 없었다면 김 대표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공모전팀을 맡기셨을 리가 없겠죠.”
김수훈 대표에게 건림건축의 경영권을 이어받으며 좀 더 깊이 고민했어야 했다.
자신의 역량을 키울 생각이 앞서 다른 직원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은 그의 패착이었다.
예건은 길 이사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돌아온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예건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했다.
“아, 아니야. 자네가 미안할 이유가….”
“아닙니다. 한 회사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미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리더의 부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지도요.”
혼자 잘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회사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전문가 집단.
모두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어야 비로소 회사의 주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길 이사 같은 건실한 팀장급 인사들이 꼭 필요하고.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건림건축이란 배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걸.”
예건은 똑부러지는 음성으로 담담히 말했다.
“제게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한 후에도 제 싹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되시면, 그땐 그만두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예건의 눈빛에 총기가 흐르는 것을 본 정기택은 가만히 숨을 삼켰다.
처음 사내 공모전 이후 보았던 신입사원 한예건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설마 벌써 경영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성장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웠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막중한 사명을 맡긴 것 같아서.
하지만 그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 한 팀장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나? 자네가 이리 떠나버리면, 김수훈 대표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나?”
“하지만. 내가…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길 이사는 자신감을 잃고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 1년간 너무도 많은 실패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예건은 단언하듯 말했다.
“제가 함께 할 거니까요. 길 이사님은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아래로만 향하던 길 이사의 시선이 처음으로 예건의 시선과 닿았다.
예건이 단지 말만 번지르르한 인물이 아님은 그도 알고 있었다.
‘김 대표님이 믿고 회사를 맡긴 인물이라면. 공모전팀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나는 몰라도 팀원들마저 궁지에 몰리게 둘 수는 없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자. 한 팀장이 자리잡을 때까지만 돕는 거야.’
이내 길 이사는 한숨을 내뱉듯 대답했다.
“…그래, 한 프로젝트만. 돕도록 하지.”
* * *
한편, 건림건축 공모전 팀원들은 갑작스러운 예건의 등장이 불편했다.
휴게실에 모여 앉은 팀원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걱정했다.
“설마하니, 한 팀장이 공모전팀까지 핸들링할 줄이야….”
“지난 1년 동안 수주가 한 건도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하죠. 그런데… 아무리 팀장급이라도 이제 갓 3년차인데, 지적 받으면 왠지 자존심 상할 것 같아요.”
대부분 예건의 설계 실력을 잘 모르기에 벌어진 문제였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길 이사님은 그 속이 어떻겠냐? 아무리 대표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에이~ 설마 길 이사님한테까지 지적하겠어요? 그냥 지시하는 척만 하겠죠.”
“얌마, 너 설계안으로 타협하는 거 봤냐? 더 좋은 설계안 따라 가는 거지. 진짜 문제는 한 팀장이 이상한 제안 가지고 와서 이대로 하라고 지시하면 안 할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럼 우리만 맷돌 갈 듯 갈리는 거고.”
“아….”
하지만 이들의 걱정은 첫번째 브리핑에서 완벽히 사라졌다.
한예건이 준비해 온 을숙도 그린센터 초안이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
불만은 이내 동경으로 변했다.
“와~ 기획팀에서 있었던 일들은 그냥 운빨인 줄 알았는데, 진짜 소문대로 실력이 장난 아닌데요.”
“그러게. 한 팀장, 아니 한 대표 브리핑할 때 길 이사님 눈빛 봤냐? 눈에서 레이저 쏘는 줄.”
“후후. 저도 길 이사님 브리핑 시간에 그렇게 한 마디도 안 하시는 건 처음 봤어요. 계속 고개만 끄덕이셔서 인형인 줄. 크크크.”
예건의 등장으로 공모전 팀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3개월이 흐르고.
항상 마감 시간에 쫓겨 아슬아슬하게 제출하던 예전과 달리, 여유롭게 마감 하루 전날 접수를 끝냈다.
이제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 * *
“게리 교수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 그래. 모시게.”
잠시 후 조교의 뒤를 따라 제라르 가뱅이 교수실로 들어섰다.
“하하하. 자네가 여기까지 나를 다 만나러 오고. 이거 참 영광이군.”
“하하. 소원했다는 말을 그리 하십니까?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뭘.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자네나 나나 피차 바쁜 사람인데 소원해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런데 어쩐 일인가? 자네가 여기까지 날 찾아오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라르 가뱅이 포트폴리오 하나를 그의 앞에 놓았다.
“이게 뭔가?”
“한예건의 포트폴리오입니다.”
“음? 이걸 왜 자네가?”
“건축사 자격 면접 볼 때 하나 챙겨 뒀습니다. 한예건의 작품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니까요.”
“하긴.”
포트폴리오를 끝까지 살핀 게리 교수가 흡족하게 웃으며 책을 닫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이만한 실력이라니. 솔직히 곁에서 지켜 보고 있다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 세계까지 확고하죠. 저도 이런 건축가는 처음 봤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자네도 녀석의 실력에 반한 모양이군.”
가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한예건을 프리츠커상 후보로 추천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인지도 말이군.”
“네, 듣기로는 마침 한국의 부산이란 도시에서 진행한 국제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다고 하더군요.”
“공모전처럼 루키의 등장을 잘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지.”
프랭크 게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흠…. 그래서 내게 바라는 게 뭔가?”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을 맡아 주십시오.”
“한예건의 실력이라면 굳이 내가 심사위원이 아니라도 당선될 텐데?”
“공모전의 품격을 높이기에 참가하는 심사위원의 수준을 높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자네가 그렇게까지 한예건의 성장을 바라는 이유가 뭔가?”
가뱅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좀 더 빨리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음?”
“궁금해서요. 그의 다음 작품이.”
“한예건의 다음 작품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네만.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게리 교수는 가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목적이 궁금해졌다.
제라르 가뱅이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면접이 끝날 때쯤, 그에게 물었습니다. 건축사가 되고 난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죠. 그의 대답이 뭔지 아십니까?”
“흠. 글쎄….”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가뱅이 당시 예건의 표정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걸 마무리하기 위해 왔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 후로 매일 꿈을 꿉니다. 하얀 베일이 덮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형상을요!”
“하지만….”
게리 교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가우디 연구소에서 외지인에게 설계를 맡길 리 없다는 것은 가뱅 또한 모르지 않는 사실임을 알기에.
“…쉽지 않은 일이야.”
“압니다. 가우디 연구소 측에 문의해 보니, 이미 마지막 파사드 설계에 착수했다고 하더군요. 이제 완공까지 채 20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라르 가뱅은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꽉 쥐었다.
“건축가로서 보는 눈이 있다면 한예건이 완성할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전 그의 꿈을 응원할 겁니다.”
게리 교수는 깊은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된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한예건이 마무리 짓는다라…. 가뱅이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충분히 공감가는 이유였다.
그 또한 한예건의 건축이 가우디의 건축에 뿌리를 두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어떤 건축가보다 한예건이 이 일에 적임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런 이유라면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지. 대신, 심사는 공정하게 볼 걸세. 조금의 사심도 없이 말이야.”
그렇게 을숙도 그린센터는 예상치 않게 높은 수준의 국제공모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