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19)
019화. 스터디 (3)
매주 월요일 주간 회의.
대표가 직접 참가하는 회의인 만큼 참가하는 임원들의 표정이 제법 긴장돼 있었다.
그런 임원들의 분위기를 먼저 풀어 주는 쪽은 김수훈 대표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멋스럽게 자연스레 뒤로 넘기고, 나이를 잊은 듯 캐주얼한 정장 차림으로 회의장에 들어서던 김수훈은 밝은 미소로 경직된 임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다들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네.”
“주말에 잘 쉬어야 일도 능률이 오르는 법입니다. 좋습니다. 회의 시작합시다.”
주요한 안건들이 오가고, 회의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김수훈 대표가 정기택 상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 인턴들은 어떻든가요? 잘 적응하고 있습니까?”
인턴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배분되는 설계팀이기에 특별하게 눈에 띄는 인재가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네. 눈여겨보고 있는 인턴이 몇 있습니다.”
“오호~ 정 상무가 눈여겨보는 인턴이라…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군요. 공모전 팀에도 온 적 있었나요?”
김수훈 대표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이가 있음에 묻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은 김수훈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공모전 팀은 마지막 주에 배정될 것 같습니다.”
“오호? 아직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김수훈 대표.
“올해는 인재가 풍년인가 봅니다. 테스트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정기택 상무는 고심했다.
최종 테스트로 몇 가지를 두고 검토하고 있으나, 아직 이거다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확정한 것이 없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어떤?”
김수훈 대표가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답했다.
“서울시에서 2002년 월드컵 행사를 대비해 화장실 문화 개선에 힘쓰고 있는 건 아시죠?”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공중화장실 20개소를 공사하겠다고 시작한 게 올해 완공 목표였죠, 아마?”
“정확히 아시네요. 그런데 급하게 5개소를 추가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5개소를 더?”
김수훈 대표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딱 좋지 않습니까? 저희가 뽑아야 할 인원이 5명, 설계가 필요한 곳이 5곳.”
“아…. 설마?”
“네. 생각하신 대로, 저희가 맡기로 했습니다. 이번 일.”
“허허. 이런, 제가 한발 늦었네요.”
정기택 상무가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공간이 크지 않으니, 한 곳당 4인씩 배분하여 개인 작품 제출로 할 생각입니다. 경쟁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피해가겠죠.”
인턴들이 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기택 상무도 이미 알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니, 아니 설마 그 반대일까?
단독 계획안 제출을 미리 확정 짓고 일부러 소문을 퍼트린 것이 아닌가 의심마저 되었다.
김수훈 대표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
정보력과 추진력.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김수훈 대표였다.
어쩌면 사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서울시와 짜고 5개소를 미리 빼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곤란하다.
이번 테스트 난이도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체 심사가 아니니 준비 기간을 늘려야겠군요. 오늘 바로 공표하겠습니다.”
“역시. 정기택 상무님의 일 처리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김수훈은 짧은 말 한마디로 귀찮은 일을 몽땅 정기택 상무에게 떠넘겼다.
‘하아. 매번 알고 당하는 게 더 화가 난다니까.’
속마음이야 어떻든 정기택 상무는 겉으로 환하게 웃으며 대응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이미 정기택 상무의 머릿속에는 인턴들의 작업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20명 넘는 인원이 작업할 자리를 마련하려면, 한동안 대회의장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며 관리팀에 전달할 업무 내용을 정리했다.
* * *
마지막 테스트가 공중화장실 공모전이라는 소식이 온 회사에 퍼진 것은 주간 회의가 끝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긴급히 근처 카페에서 모인 예건과 스터디 회원들.
다들 이만저만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다.
“2주 만에 공모전이라니. 그것도 화장실을?”
“하아.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네요.”
무리 중 가장 격분한 것은 동윤이었다.
“갑자기 공모전이라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진정해요.”
“이게 진정할 일이냐고요? 인턴십 기간에 공모전을 하겠다는 건 인턴들의 실력을 검증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직원 자리를 볼모로 아이디어를 훔치려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아무도 동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동윤 씨. 말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2주간 인턴십 과정 대체에 당선작 상금도 지급하는 조건이에요.”
공고에는 계획안이 당선된 작품은 500만 원의 포상이 주어진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니 아이디어를 훔친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공모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실무를 경험하러 온 거지, 공모전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건 설계를 잘하는 사람에게만 주는 특혜가 아닙니까?”
동윤이 예건을 고까운 눈으로 슬쩍 쳐다봤다.
동윤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인턴십의 취지는 취업 전 다양한 실무 경험을 하고 원하는 분야를 확정 지을 수 있다는 데 있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테스트로 공중화장실 공모전이 결정된 상황에서 참여를 거부하면 그 불이익은 오로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윤은 결심한 듯 주먹을 쥐며 말했다.
“저는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겠어요. 남은 기간 실무 경험이나 더 하는 게 낫지.”
동료들이 말릴 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동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정다은.
그는 곁에서 얌전히 커피만 홀짝이고 있는 예건에게 물었다.
“예건 씨는 불만 없어요?”
“저요?”
“네. 공모전 외에 다른 성적은 중요하지 않은 게 되어버렸잖아요.”
“아….”
예건이 별 생각 없이 눈만 깜빡거리자, 영광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예건 씨가 불만 있겠어요? 공모전이면 제일 유리한 건 본인인데.”
“영광 씨는 어쩔 거예요?”
혹시라도 예건이 무안해할까 걱정하며 눈치를 살핀 다은이 관심을 돌리려 서영광에게 물었다.
“저라면 예건 씨와 경쟁하는 건 피하겠습니다.”
“그거 좋은데요. 우리 모두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선택해요. 그럼 서로 의견을 구할 수도 있잖아요.”
유하나가 영광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개인 작품으로 제출하라고 말은 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예건 씨, 전에 부탁했던 대로 설계에 대해 스터디 모임에 협조하기로 한 건 유효하죠?”
경쟁 상황에서 공평한 처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학교 과제나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학생들끼리 작품 설명을 하고 비평을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설계에 자신 있는 이들은 그런 비평조차 듣기 싫어하지만, 정직원 자리를 앞둔 마당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제 의견을 귀담아듣겠다는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예건이 흔쾌히 대답하자, 하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인턴들을 한 자리에 몰아넣는 것부터가 어쩌면 협력을 전제로 하고 계획된 일일 거예요. 설계가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보이는 이타심이 평가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고요.”
“와… 그럴 수도 있겠네요! 팀원으로 들어왔을 때 기존의 팀과 융화가 잘 되는 것이 직장인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정다은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굴을 밝히며 수긍했다.
“네. 맞아요. 힘들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이라니. 조금 놀랍네요. 동윤 씨처럼 마지막 테스트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겠는데요.”
동윤의 이름이 거론되자, 다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타인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럼 예건 씨, 혹시 어느 프로젝트 택하실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제껏 잠자코 있던 예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어떤 프로젝트든 상관없어요. 먼저들 고르세요.”
순간 다은은 예건의 얼굴에서 자만이 아닌 자신감을 읽었다.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공모전 경쟁이라는 것에 겁을 먹고 엄청난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던 다은이었다.
그런데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예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상하게, 이번 테스트. 부담스럽지 않아.’
그가 자신의 작품에 의견을 첨언해 주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매사에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였지만, 설계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설계 프로젝트를 앞두고 맛있는 만찬을 앞둔 것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오늘 하루 고민해 보고 내일 공유하기로 하죠. 어때요?”
“그러죠.”
유하나가 시원하게 상황을 정리했고,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혼자 진행하는 첫 프로젝트.’
전생의 가우디에게 새로운 일감은 항상 축복이었다.
더군다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난 후의 첫 단독 프로젝트.
프로젝트 리스트를 확인하는 예건의 눈에는 설레임이 가득했다.
5개의 장소와 다른 컨셉의 주제.
[1번. 미술관 옆, 예술적인 조형미를 품은 화장실] [2번. 어린이 공원 속, 동화 속의 집을 닮은 화장실] [3번. 음악당 후원, 음악을 닮은 화장실] [4번. 운동장 외부, 다이내믹 스타일의 화장실] [5번. 패션 거리, 하이패션 화장실]장소와 어울리는 컨셉의 조화.
일 욕심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예건이었기에, 이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규모 또한 딱 구엘 공원 입구에 만들어 놓은 관리소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정도였으니, 다섯 개를 2주 만에 디자인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어떤 프로젝트를 고를지 궁금하네.”
스터디 멤버들 모두 예건이 프로젝트를 먼저 고르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는 듯했으나, 실상은 저들에게 선택을 떠넘긴 셈이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고.
뭘 해도 1등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테스트 때문에 공모전팀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쉽기는 하네.”
김수훈 대표가 담당하는 공모전팀.
그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은 그런 아쉬움 쯤은 단숨에 불식시켰다.
“어차피 정직원 되면 한 번은 만날 일이 생기겠지.”
* * *
“와~. 어마어마하네.”
4m 가까이 되는 층고를 자랑하는 대강당 내부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놓인 18개의 거대한 실습용 테이블.
테이블 위에는 개인별 컴퓨터가 세팅되어 있고, 공간 한편에는 매스 모형을 만들기 위한 자재들과 프린터도 비치되어 있었다.
마치 오늘만 기다린 것처럼 단단히 정비된 공간이었다.
“어? 예건 씨. 일찍 왔네요. 이쪽으로 와요.”
다은은 자신이 자리 잡은 곳의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자리는 아무 곳이나 선택해도 되나요?”
“네. 그렇다네요. 희희.”
그새 조금 편해져서 그런가, 조금 특이한 소리로 웃는다.
“프로젝트는 선택하셨어요?”
“어…. 그게.”
“어? 두 분 일찍 오셨군요.”
유하나가 다가와 예건의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모두 잘 해 봐요.”
하나가 등장하자 다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하나 씨. 그런데 동윤 씨는…?”
“공모전은 참여 안 하겠다고 얘기했나 보더라고요. 그냥 원래 계획대로 인턴십 마무리하고 학교로 돌아간대요.”
“아… 결국.”
회사에서도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나둘 빈자리가 채워지고, 다은의 뒷자리에 영광이 자리한 것으로 대충 우리 모임은 자리를 잡았다.
다른 테이블들도 끼리끼리 뭉친 모양이었다.
“예건 씨는 결정했어요? 몇 번 할 거예요?”
하나가 궁금한 듯 묻자, 다은도 아까 답을 못 들었다는 것이 생각나 귀를 쫑긋하고 예건을 쳐다봤다.
“음악당으로 선택했습니다.”
“오~. 음악당!”
“예건 씨의 디자인이라니, 왠지 너무 기대돼요. 저도 하고 싶었는데 음악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표현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다은이 부러운 눈길로 호들갑을 떨자, 유하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왜 음악당을 선택하신 거예요?”
예건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한지, 유하나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현장에 갔더니, 답이 거기 있더라고요.”
“와~. 역시!”
다은은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호호호. 저희는 예건 씨만 믿고 가면 되겠네요.”
하나까지 다은의 반응에 합세하며 기대감을 드러내자, 예건은 익숙한 찬사에 속으로는 흐뭇해 하면서도 애써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겸손이 가장 큰 미덕이니.
튀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영광만이 화기애애한 그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숨을 삼킬 뿐이었다.
어느새 꽉 찬 자리.
단상으로 올라간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이목을 끌었다.
“주목해 주십시오!”
마지막 경연이 시작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