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돌풍 (4)
‘후후. 마치 과거 세상 물정 모르고 열정만 가득했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군.’
극한의 효율만을 따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영자라 불리는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 누구보다 열정이 가득했고, 노력하면 자신의 가능성을 다들 알아봐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쓰디쓴 패배를 수십 번 경험한 후에야 그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넘겼다.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방침을 세우니 모든 것이 쉬웠다.
그는 영민했고, 아직 젊었으니까.
돈은 부와 명예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
지금 그에겐 도시 하나를 재건할 수 있는 막강한 재력이 있고, 그의 말 한마디면 천조국의 법 규제까지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다.
대업을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미국인다운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겠나?
꼼수?
그딴 건 애들 놀이다.
지저분한 것들은 싹 밀어버리고, 광활한 대지에 새 건물을 지으면 그뿐.
그래서 직접 알려주려 한다.
눈앞의 젊은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재능이 출중한 한예건은 너무도 군침도는 먹이감이었다.
저 순백의 영혼을 태워 자신의 성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면 그보다 만족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라는 욕망이 들끓었다.
샘 회장의 귓가에 비열한 악마가 속삭였다.
‘저 재능을 온전히 독식할 수 있다면! 나의 거탑이 인류 최고의 건축이 될 것이다.’
* * *
인자한 표정의 샘 회장이 예건의 생각에 동조했다.
“슬럼가를 재생시키는 실험이라… 후후. 20번가가 활성화된다면 저로서도 무척이나 기쁠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 투자자들이 그리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라서요. 아마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겁니다.”
“1년이면 충분합니다.”
‘겨우 1년?’
의외의 대답에 샘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그거로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도록 노력해야죠. 투자자들의 성화에 회장님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완전히 미친 놈이군.’
한예건의 재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디자이너로서 가능성을 두고 한 말이었다.
헌데,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프랭크 게리도 어렵게 이뤄낸 일을 겨우 1년만에 성공하겠다는 게 아닌가?
망상도 저 정도면 중증이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군.’
어차피 이기는 싸움.
세상물정 모르는 핏덩이가 발악하며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는 것도 나름 재밌겠다 싶다.
두 사람은 약정서에 사인했다.
1년간 지역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없다면, 한예건이 가진 지분 모두를 동일한 금액으로 트리플 컴퍼니에 되파는 조건으로.
계약을 마치고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다음을 기약했다.
예건이 떠나고 회장의 부름에 자리로 돌아온 비서가 회장을 칭송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확실히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시니 순순히 지분을 내놓는군요.”
“후후. 당연한 일을. 계약서는 법무팀에 전달하게.”
“네, 회장님. 곧바로 플랜2 진행하라고 할까요?”
차명으로 매입한 부동산을 회사 몫으로 돌릴지 묻는 것이었다.
“아직. 좀 더 기다려.”
“네?”
비서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자, 회장은 비열한 웃음을 웃었다.
“바로 청소에 들어갈 필요 없다. 녀석이 좌절하는 걸 지켜본 후에 해도 충분해.”
깨끗한 것은 쉽게 더러워진다.
선의? 선한 영향력?
그건 있는 자들이 검은 속내를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포장지일 뿐.
“후후. 난 너무 관대해서 문제야. 이렇게 값진 가르침을 공짜로 퍼줬으니.”
“회장님 성품이 훌륭한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죠. 감히 출신도 모르는 동양인 주제에 회장님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는 것만도 놀랄 일이 아닙니까?”
“하하하. 자네, 아부가 날로 느는군.”
“어휴, 아부라뇨. 전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눈매가 싹 바뀐 샘 회장이 묵직한 톤으로 그에게 지시했다.
“다른 건 됐으니, 빨리 건축법부터 통과시키라고 지시해. 지긋지긋한 하이에나 같은 놈들! 일부러 늘어지게 일했다간, 자리보전도 힘들 거라고 경고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류를 받아 들고 몸을 깊숙이 숙인 비서가 재빠르게 돌아섰다.
홀로 남은 샘 회장이 느긋하게 찻잔을 들었다.
한눈에 LA시가지 풍경이 들어왔다.
“이제 미국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도 머지않았군. 하하하.”
호탕한 그의 웃음소리가 빈공간을 가득 메웠다.
* * *
LA 아트 페어를 돕기 위해 손수 미국까지 날아와 준 니콜에게 샘 회장과의 계약 내용을 전했다.
“한국전시관을 1년간 유지하기로 했다고요?”
“네, 크리스티앙에서 전시관 관리를 1년 더 맡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야 1년 더 연장되면 좋죠. 그런데 당신의 계획,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니콜의 생각에도 너무 무모한 거래인 것 같았다.
당장 느와르 영화를 찍어도 손색없을 동네를 1년 만에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겠다니.
“물론 저는 이곳 한국전시관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걸 일반 사람들이 알아봐 줄까요? 아직 미스터 한은….”
“인지도가 부족하죠.”
“그러니까요. 괜히 마음고생만 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네요. 지역을 활성화시킨다는 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도 보통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니콜에게 웨스트 20번가가 범죄의 온상이 된 이유가 트리플 컴퍼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설명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더 큰일이잖아요. 정말 트리플 컴퍼니가 범죄 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미스터 한의 지분을 뺏기 위해 어떤 치사한 수단을 쓸지도 모르는 일인데. 게다가 계약 기간이 1년이라면서요?”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무슨 방법인데요?”
니콜이 비밀이야기라도 듣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가까이했다.
잠시 후 예건의 대답을 듣고 까무러쳤다.
“그건, 절대 안 돼요!”
“왜 안됩니까?”
“그, 그야. 이렇게 범죄가 만연한 곳에 그런 값비싼 작품을 전시해 놨다가 무슨 화를 당할 줄 알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이곳을 장악한 범죄자들은 샘 회장과 연관되어 있다고요. 만약 작품이 회장의 재산이라 인식하게 만들면 아무도 쉽게 건들지는 못할 겁니다.”
“그에게 작품을 정말 팔려고요?”
“글쎄요. 그건 어디까지나 마지막 계책이에요.”
예건은 건축물의 지분을 지킬 방법으로 이미 세 가지를 고려해 뒀다.
그중 하나만 성공해도 충분히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보험은 하나 있는 게 좋으니까.
미리 대중에 공개하는 거다.
샘 회장의 태도가 여유로운 걸 보면, 이미 필요한 건축물은 모두 매입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한예건이 보유한 건물 지분이 변수가 된 것일 터.
무엇보다 한국전시관을 유명 관광지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관광객들이 모이면 미국 경찰도 어쩔 수 없이 이 지역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테니까.
거기에 정치인들의 관심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미국 체류 일정 마지막 날 한국관에서 열린 기자 회견.
예건은 기자들에게 한국전시관의 존치 기간이 1년 연장되었음을 밝혔고, 한국전시관은 1년간 상설미술관으로 운영될 것이라 전했다.
“내년 1월에 피카소의 그림이 이곳 한국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요?”
한 기자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중 한 작품은 이곳에서 최초로 공개될 겁니다.”
“오!”
“최초공개?”
“피카소의 그림을 두 점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보군.”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그렇게 공개에 뜸을 들이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흠….”
예건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천재적인 두 예술가의 합작품… 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겠군요.”
그의 대답에 아까보다 더 큰 동요가 일었다.
기자 회견이 끝나고 이 말은 대중에 크게 회자되었다.
두 천재 중 하나가 피카소라는 건 확실한데, 다른 하나는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
혹자는 피카소 살아 있던 당시 쌍벽을 이루었을 앙리 마티스와 연관된 것이라 추측했고, 어떤 이는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뮤즈가 있는 게 아니냐며 흥분했다.
소식을 들은 대중도 흥미를 느끼긴 마찬가지.
건축과 예술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이는 자리마다 그 주제로 꽃을 피웠다.
“그나저나 1년 뒤에는 건축물이 사라진다니, 어쩐지 안타깝네.”
“그러게. 건축에 굉장히 공을 들인 것 같던데.”
“로비에 전시된 설치미술 봤어?”
“코리안 웨이브라는 작품 말이지? 사진으로 봐도 정말 장관이던데.”
“그것도 그 건물 만든 건축가가 디자인한 거라고 하더라고. 진짜 재능이 대단한 것 같아.”
“흠… 이번 겨울 휴가 때는 LA나 다녀올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같이 가자!”
이 인터뷰를 발단으로 한국전시관은 더욱 유명세를 탔고.
미국 전역에서 그의 건축을 보러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커다란 이슈가 터졌다.
한예건이 프리츠커상 수상자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츠커상 위원회는 국제 공인 건축사자격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춰 놓았다.
매년 40개국에서 500명 이상의 후보가 오른다 하니 한예건이 후보가 되었다고 해서 전혀 대단한 것은 아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식으로 던질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프리츠커상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인정받는 것은 노벨상과 수상자 선정 과정이 비슷한 데다, 그 상을 받은 건축가들의 면면이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후보자격을 득하기는 쉬우나 그 평가는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특정 건축물의 작품성이 아닌 인류와 건축 환경에 일관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했는가 하는 건축가의 건축세계 전반을 평가하는 자리.
이제 막 건축가에 입문한 한예건이 비빌 자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한예건을 추천한 이가 누구냐는 것인데.
추천인으로 거론된 세 사람이 범상치 않다.
건축을 예술의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되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 건축계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빛의 건축가, ‘제라르 가뱅’, 거기에 더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카고 건축재단(CAF)의 회장 ‘머릴 쿠퍼’의 이름이 거론된 것.
그중 인연이 있는 두 명의 건축가는 제외하고라도.
시카고 건축재단이 어떤 곳이던가?
1981년 시카고는 큰 재앙에 휩싸였다.
대화재가 붉은 혓바닥을 훑고 지나간 후, 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시카고 재건을 위해 수많은 기업가와 시카고 건축가들이 힘을 모았고.
이후 시카고는 체계적인 도시 재정비 사업을 기반으로 현대 건축가들의 초현대식 건축물의 경연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뜻있는 건축가들과 기업, 시민들은 자원봉사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시카고 건축재단을 만들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의 보존 및 인간의 정취가 묻어나는 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CAF의 회장이 1년 뒤면 사라질 가설 건축물에 주목한 것이다.
그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샘 리치 회장의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트리플 컴퍼니에 점점 불리한 형국으로 치달았다.
* * *
오랜만에 루시아 공주의 부름을 받고 카사 루시아에 방문한 예건.
그녀의 곁에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비서도 함께였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루시아 공주님?”
“그냥 편하게 불러요. 당신은 내게 친구나 다름없으니까.”
루시아 공주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열쇠를 건넸다.
“카사 루시아 열쇠에요. 이제 당신에게 넘길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죠. 한 대표 덕분에 엄청난 수익을 보고 있으니까.”
“제가 한 거라고는 그저 투자 정보를 드린 것밖에 없는걸요.”
예건의 겸손한 태도에 루시아 공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최근 들어… 미스터 한이 말한 대로, 트리플 컴퍼니에서 차명으로 샀던 건물들을 회사 명의로 급하게 변경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주변 땅값이 갑자기 폭등해서 계획했던 저가 매입은 어려울 거고, 아마 세금깨나 나올 거예요.”
예건이 슬며시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자업자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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