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환상을 그리다 (1)
드디어 오랜 숙제가 끝이 났다.
종이에서 펜을 떼고 테이블 위에 살포시 내려놓은 예건은 어느덧 창가에 빛이 내려앉은 것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
지난 3년.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마주하고 전생을 떠올린 이후.
밥을 먹을 때도.
업무를 마치고 매일 걷는 산책길에도.
꿈결에서마저.
건축물의 형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건은 업무 중 틈틈이 영광의 파사드와 첨탑 디자인 초안을 보완했다.
이제는 되었다 싶어 종이에 옮기고 나면, 또다른 물음표가 그를 괴롭혔다.
‘이걸 보고 그대로 시공이 가능한가?’
시공 참여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도면이 디테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괴롭혔다.
자문하는 순간, 답은 이미 내 속에 있다.
결국 완벽하다 확신할 때까지 수정하고 또 보완했다.
최근 한 달간은 이 작업에 더욱 몰입했다.
전생에 못다 이룬 한풀이를 하듯.
이제 더는 고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도면 단계에서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그리 판단한 예건은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수신자는 그와 연락하기를 바랐던 각국의 기자들.
[금일 정오, 제가 완성한 영광의 파사드 입면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홈페이지 주소 링크)]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광의 파사드가 공개된 후 대응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그날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한 숙면을 취했다.
* * *
예배당 기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퐁트브로 수도원.
팀원들과 업무 일정을 나누는 중에 도 PD에게 메일이 도착했다.
“어? 한 대표가 보낸 메일이네. 잠시만.”
약 1달 전 바르셀로나로 간 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스페인에서 엄청난 이슈 메이커였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한예건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도 PD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
반가움과 설렘으로 곧장 메일을 열어본 도 PD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 미쳤다. …대박!”
도 PD와 오랜 기간 일했기에 그가 그렇게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본 팀원들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곧바로 그의 곁에 달라붙었다.
“이거…. 설마?”
“한 대표가 언급했던 영광의 파사드 환상? 그거 맞죠?”
“…그런 것 같네.”
스크롤을 내려 보니, 홈페이지 메인 이미지로 올라온 사진 아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영광의 파사드 환상>’이라는 소제목이 스페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탄생의 파사드가 동굴 속 종유석을 닮은 흘러내리는 듯한 대리석의 표현과 고사리와 덩굴식물, 나뭇잎 같은 것들이 빼곡히 조각된 것 같은 질감으로 생동감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면.
영광의 파사드는 몽글몽글한 구름과 별, 하늘 가득 흩날리는 이름 모를 꽃비를 배경으로 사방으로 빛이 뻗어 나가는 보좌.
그 주변을 도열한 악기 든 천사들이 당장이라도 돌을 깨고 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탄생의 파사드와 견주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빈틈없는 웅장한 디자인에 입이 쩍 벌어지는 촬영팀 멤버들.
“천사 포즈랑 생김새 다 다른 거 실화야?”
“와! 구름 배경 디테일은 또 어떻고? 미쳤네, 미쳤어.”
“이거 완전 가우디 연구소에 도전장 내민 거 아니야? 감히 니들이 날 평가해? 그 정도는 아무나 그릴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보여주지! 뭐 이런.”
카메라감독이 연극 톤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작가가 눈을 반짝이며 좋아라 했다.
“와~ 진짜요? 패기 쩐다.”
“흠…. 고작 자존심 싸움이나 걸 사람은 아닌데.”
“에이~ 넌 그렇게 붙어 다녀 놓고도 모르냐? 원래 선비 같은 사람들이 자존심 스크래치는 절대로 못 참는다니까.”
“아니. 내 말은 허투루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분명 다른 생각이….”
도 PD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가가 인터넷에서 뭔가를 찾아 그들에게 보여줬다.
“어? 이것 좀 보세요. 벌써 프랑스 검색 사이트 메인에 한예건 대표가 올린 영광의 파사드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어요.”
“뭐? 벌써?”
작가는 내용보다 독자들을 반응을 먼저 살폈다.
“와! 기사 올라온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좋아요 수가 벌써 300개가 넘었는데요. 댓글도 100개가 넘고요.”
“뭐? 진짜?”
댓글 내용에는 영광의 파사드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했다.
– 와~ 홀리 그 자체!
– 한예건이 가우디의 환상을 봤다는 게 정말 사실이었어. 이게 사그라다 파밀리아지! 당장 설계자 안 바꾸고 뭐하냐?
– 퍼펙트! 제발 이렇게 완성해 줘~~~
– 천국을 인터넷 기사에서 보게 될 줄이야
– ??? : 죄송합니다. 도무지 이렇게 만들 자신이 없어요.
└ 이게 정답!
└ 못 하겠으면 그냥 한예건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님?
└ ??? : 그러기엔 자존심이….
“이거 2차전 갈 것 같아?”
카감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당연하지.”
“그럼, 뭘 망설여. 화력 사라지기 전에 당장 가야지!”
카감이 여분의 카메라를 그에게 건넸다.
“어딜?”
“바르셀로나로!”
* * *
[영광의 파사드 환상>이 공개된 직후, 스페인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 유럽이 들썩거렸다.한예건과의 인터뷰를 위해 온 언론이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으나, 아무도 그와 연락이 닿지 못했다.
영광의 파사드 공개 시각 이후로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우디 연구소로 화살이 돌아갔다.
다행히 모레노는 언론이 출입구를 막기 전에 연구소를 빠져나와 곧바로 한예건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한 달 새, 부쩍 늙은 것 같다.
“마침 티타임을 하려던 참인데, 딱 맞게 오셨네요.”
핵폭탄을 던져 놓고도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예건을 모레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어이 일을 벌이셨더군요.”
쪼르륵.
예건은 빈 찻잔에 옥수수 차를 따르며 덤덤하게 답했다.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제 방식대로 라미로스 회장에게 대응하겠다고. 앉으십시오.”
지난 만남에서 헤어지기 전, 예건은 모레노에게 제안했다.
만약 라미로스 회장 측에서 외압을 행사하려 든다면, 곧바로 언론에 자신의 설계 참여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오직 가우디의 뜻을 좇아 설계하겠다는 뜻을 확실히 전하라고.
‘그럼 곤란해지는 건 당신이 아닙니까?’
그의 물음에 예건이 답했었다.
스스로 길을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결과가 이번 핵폭탄급 언론 플레이로 이어진 것이다.
“영광의 파사드 입면도는 마음에 들던가요? 저번에 기부했던 스케치보다 디테일에 좀 더 신경을 썼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당장이라도 공사에 반영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미 스스로 언론에 고지하지 않았던가?
한예건이 아무리 좋은 디자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가우디의 환상임을 밝힐 수 없으면 한낱 그림일 뿐이라고.
“입면 상세와 구조가 복잡한 부분의 상세도 작성도 이미 끝났습니다. 곧바로 시공을 시작해도 문제없을 정도로요.”
“언론을 움직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한 대표도 잘 알 텐데요.”
“압니다. 그래서 내기를 하나 하려고요.”
“내기요?”
뜬금없는 말에 모레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모레노 소장님이 직접 심판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리오, 들어오세요.”
예건의 부름과 함께 리오가 가방 하나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를 발견한 모레노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리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그 대답은 예건이 했다.
“리오 연구원은 저와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조사라니요?”
“먼저, 이걸 보시죠.”
리오가 봉인된 종이 뭉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자신의 아버지, 루카스 모레노 친필 사인을 알아본 소장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초대 연구소장의 친필이 아닌가? 이걸 대체 어디서 찾은 건가?”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첫 번째 탑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리오가 발견된 장소를 말하자, 예건이 모레노에게 물었다.
“벤하민 모레노 소장님은 초대 연구소장님의 자재분이라 들었습니다. 혹시 이 안에 든 게 뭔지 아십니까? 뭔가 들으신 것이 있다거나.”
“글쎄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확실한 건 열어봐야 알겠지만, 제 생각엔 가우디가 숨겨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초안이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영광의 파사드를 포함해서 말이죠.”
“뭐라고요?”
놀란 얼굴이 된 모레노가 따지듯 물었다.
“전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게 남아 있었다면, 자료가 불길에 소실됐을 때 공개하지 않았던 겁니까?”
“글쎄요. 완벽한 도면이 아니라서 세상에 공개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일지도 모르죠.”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괴짜였던 가우디라면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레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예건이 덧붙였다.
“저희가 찾은 건 총 8개의 묶음 중 2번째 자료입니다. 다른 초안 묶음의 위치도 대략 파악해 둔 상태고요.”
포장지에 적혀 있는 숫자를 가리키자 모레노가 나직이 탄식을 흘렸다.
“이게 진짜 가우디의 설계도 초안이라면….”
그 파급력은 엄청날 거다.
지금 작업 중인 영광의 파사드 설계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럼, 당신이 설계한 영광의 파사드를 먼저 공개한 이유가…?”
“검증받기 위함입니다. 제가 그린 입면이 가우디의 초안과 유사하다면, 제 말이 입증되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 아닙니까? 만약 이 자료가 가우디의 도면이라 해도 당신이 그린 입면과 다르다면,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입면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대중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제가 환상을 보았다는 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이었다고 말이죠?”
모레노는 침묵하는 것으로 긍정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지요.”
예건의 말에 모레노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이었으니까.
‘내가 가우디 연구소의 막내 수습 조수로 있었을 때,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로렌소 님께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었어. 높이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완성한 계단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거든.
혼자 비관하며 공사 현장 한 켠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현장에 나가셔서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하고 돌아오시던 건축가님이 나를 발견하시고 다가오셨어. 엄청 혼나겠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건축가님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지.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뒷수습은 자기가 할 테니까, 일을 두려워하지는 말라고 말야.
그때 비로소 알았지. 내가 계산 하나를 실수하면 정작 곤란해지는 건 건축가님이구나. 그래서 결심했지.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그 당시 그분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덩치는 내가 한참 컸는데 말이다. 하하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우디 연구소 소장의 자리에 앉았을 때. 모레노는 항상 그 말을 되뇌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한예건이 그 말을 한 순간 왜 그의 얼굴에 아버지가 겹쳐 보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어차피 모레노가 여기 오겠다 마음먹은 순간부터 한예건의 편에 서겠다 마음먹은 차였다.
예건이 완성한 영광의 파사드를 본 순간.
기존의 디자인은 백지처럼 없던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모레노는 아버지의 환영을 지우고 예건에게 물었다.
“제가 뭘 도우면 되겠습니까?”
예건은 미소로 화답했다.
“가우디의 초안을 세상에 공개하고 나머지 도면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제 도면이 가우디의 뜻이 맞는지 직접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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