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환상을 그리다 (2)
모레노는 리오와 함께 예건의 작업실을 나서며 물었다.
“리오, 이 일에 대해서 혹시 사무엘이 알고 있나?”
리오가 모레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뇨. 한 대표가 다른 사람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해서요.”
“그래, 다행이군.”
“왜요? 사무엘에게 무슨 문제라도…?”
이미 한 편이 되기로 마음 먹은 이상 리오에게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사무엘이 라미로스 회장의 정보원인 모양이야.”
“…….”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의 배신은 생각보다 뼈아픈 법이다.
리오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자네는 더 이상 한예건과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머지 자료들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네.”
두 사람은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고, 긴급 임원회의를 열었다.
회의장에 모인 임원들은 회의의 목적이 한예건이 공개한 영광의 파사드 환상과 관련된 것이라 추측했는지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하지만 모레노 소장의 설명을 들은 임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서류 뭉치를 확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정말 이걸 탑에서 발견했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무래도 초대 연구소장님께서 숨겨 두신 물건 같습니다.”
“오오! 맞습니다. 이건 루카스 모레노 님의 서명이 확실합니다. 포장된 종이의 변색 정도만 보더라도 70년은 족히 된 것 같군요.”
이곳에 모인 임원들 모두 가우디 연구소에서 평생을 근무한 전문가들이었다.
기록물의 상태만 보더라도 연식과 내용물에 대한 기록을 줄줄 읊을 수 있는 능력자들.
하지만 초대 연구소장의 서명이 적힌 이 종이 뭉치의 정체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요? 일지 같은 걸 숨겨두셨을 리는 없고.”
“제 생각에는….”
모레노가 말을 시작하자 임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제가 막 연구소장이 되었던 해, 아버님이 저를 불러 놓고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면, 탄생의 파사드를 다시 돌아보라고요. 그 말씀을 쫓아 탄생의 파사드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이런 걸 발견한 겁니다.”
“그렇다면 설마… 가우디 건축가님이 남기신?”
예상 밖의 발언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추측으로 괜한 오해를 키우는 것보다 내용물을 먼저 확인하는 게 우선이겠죠. 앞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건축을 함에 있어 중대한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는 순간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께서 이 순간의 증인이 되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모레노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장갑을 낀 리오가 봉인을 해체했다.
그 과정은 매우 정교하고 느리게 진행됐다.
혹여나 그 조심스러운 행동에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여 자리한 사람들이 호흡마저도 신경 썼을 정도.
이내 봉인이 뜯어지고 포장지를 펼쳤다.
차곡차곡 접혀 있는 내용물이 보인다.
굳이 펼치지 않아도 임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도면이다!’
가장 위 첫 번째 종이를 펼쳤을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면 오른쪽 하단에 선명하게 적혀 있는 시그니처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기에.
“어, 어째서 가, 가우디의 도면이?”
그날 저녁.
저녁 뉴스에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 * *
[불에 타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도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현재 가우디 연구소 측에서는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전하며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라고….]라미로스 회장은 뉴스를 끝까지 확인하지도 않고 TV를 꺼버렸다.
그의 입가엔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꼴 좋게 됐군.”
“대중의 인기를 끌어 한 몫 챙기려는 작자의 결말이야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걱정을 더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라미로스의 곁에 있던 페르난데스 시장이 아부성 멘트로 그의 흥을 부추겼다.
“그럼,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는 재개하라고 할까요? 요즘 그 일 때문에 가톨릭 단체 쪽에서 얼마나 항의 전화가 많이 오는지…. 제가 좀 난처합니다.”
“그렇게 하게. 시장이 난처한 상황이라는데, 내가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아이고~ 회장님. 감사합니다.”
“호마르는 언제쯤 도착한다 하던가?”
“바로 요 앞이랍니다. 아! 저기 오네요. 어?”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그의 곁에 한예건이 동행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그, 그래. 호마르 대표. 자네도 잘 지냈지? 그런데, 곁에 계시는 분은…?”
“이분은 루시아 미술관의 설계자인 한예건 대표입니다.”
“설마… 자네가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네. 한예건 씨는 현재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성 건축가입니다. 특별히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분이라 두 분께 소개해 드리면 좋을 것 같아 데리고 왔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예건이라고 합니다.”
페르난데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라미로스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라미로스 회장은 마치 그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듯 인사했다.
“루시아 미술관에 대한 호평은 나도 많이 들었소. 유명인을 이리 뵙게 되니, 영광이군.”
“카탈루냐 민족의 진정한 리더가 라미로스 회장님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미로스 회장은 예건의 아부성 인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다들 앉지.”
식사와 함께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후식이 나오며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라미로스 회장은 귀족적인 품격이 몸에 베어 있는 예건의 기품 있는 동작에 친근함을 느끼며 물었다.
“보통 동양인들과 같이 자리할 때면 식사 예절을 잘 몰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데, 자넨 아주 제대로 배웠군.”
“좋은 스승에게 배웠거든요.”
“오~ 그런가? 혹시 영국에서 유학했나?”
“아뇨. 이곳 바르셀로나의 한 신사분께 배웠습니다. 구엘이라는 성을 쓰시는 분이었죠.”
“음?”
과거 구엘 백작가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라미로스 가문.
구엘 가문은 세상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멸했다. 물론 그 배경엔 라미로스 가문의 견제 또한 한몫 했으나, 그걸 젊은 한예건이 알 리 없다 생각한 라미로스 회장은 웃는 낯으로 진실을 왜곡했다.
“허허. 내 아버지 대에 사업 실패로 몰락한 구엘 백작의 후손에게 배운 모양이군.”
“사정을 들어보니 단순한 사업 실패로 몰락한 건 아닌 것 같던데요. 누군가의 외압으로 구엘 공원을 시에 헐값에 매도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관광 수익만으로 충분히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솔직히 전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르셀로나의 관광업이 풍요로워진 것은 가우디를 발굴했던 구엘 백작의 공이 적지 않은데, 왜 구엘 저택에 대한 지원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사그라다 파밀리아나 다른 건축물과 달리 유독 구엘 저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 은밀히 사정을 알아보았던 예건이었다.
바르셀로나 중심가에 자리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다고는 하나, 예산의 한도가 없이 지었던 만큼 철물 장식과 내부 디자인까지 허투루 만들어진 곳이 없었다.
이후 저택 관리자를 통해 시청의 지원 없이 관광객 수익만으로 건축물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예건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고, 추후 라미로스 회장과 시장의 결탁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렴풋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은근히 돌려 말하자, 페르난데스 시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뿐 예건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라미로스의 눈에 들려 노력하는 한예건의 태도가 거슬렸던 시장이었다.
시장은 라미로스 회장의 경각심을 일깨우려 기어코 영광의 파사드를 들먹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예건이 바란 바였다.
“아 참!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요. 한 대표가 영광의 파사드를 환영으로 봤다던 그 사람이죠? 오늘 낮에 파사드 전체를 공개했다고 들었는데, 이거 어쩝니까? 가우디 연구소에서 가우디의 것으로 예상되는 미공개 도면을 확보했다고 하던데….”
시장이 말을 흐리자, 호마르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 뉴스는 저희도 오는 길에 봤습니다.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한 대표가 완성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환상을 보고 입면을 그렸다고 했을 때, 그걸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정말 안타까웠거든요.
그런데 만약 가우디의 도면에서 영광의 파사드가 발견되고, 그게 한 대표가 보았던 환상과 유사점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기적이라….”
라미로스 회장이 옅은 미소를 띤 채 읊조렸다.
“꽤나 흥미로운 말이군요. 영광의 파사드 환상을 보았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실은… 그 일로 회장님을 뵙기를 청한 겁니다. 대중의 인기나 끌 목적으로 그런 일을 벌리기엔 이미 제가 너무 바빠서요.”
예건이 반달 눈을 하고 시장을 향해 웃어 보이자, 페르난데스는 뜨끔한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예건은 라미로스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제 말이 사실로 입증되면, 라미로스 회장님께서 제 후견인이 되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자가 되도록 지원해 주시겠습니까?”
“후견인이라…. 뒷방 노인네에게 너무 큰 걸 원하는군요.”
“바르셀로나 시장을 아무 때나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노인은 회장님 말고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그 말을 들은 페르난데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회장님! 이런 몰지각한 인물의 말은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호마르! 회장님의 심기를 더는 어지럽히지 말게.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데리고 썩 돌아가!”
시장의 호통에 호마르가 어쩔 줄 몰라했으나, 그가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예건의 발언이 더 빨랐다.
“만약 가우디 연구소에서 발견한 가우디의 영광의 파사드 도면과 제가 그린 환상이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게 밝혀진다면, 더는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깨끗하게 물러서겠습니다.”
라미로스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만만하군요.”
전생의 초안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게 지금의 도면이다.
자신 없을 수가 없지.
이제 그의 허락만 남았다.
예건은 참을성 있게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 목표를 이루었다.
“좋소. 만약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적극 돕도록 하겠소.”
한예건과 호마르가 떠나고 초조해진 페르난데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회장의 성급한 결정을 탓했다.
“회장님, 녀석의 말이 사실이면 그땐 어쩌시려고요.”
“자네는 아직도 신이 있다는 걸 믿나?”
“네? 아니, 그게 무슨….”
“신의 기적은 힘없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믿는 걸세. 우리 가문은 단 한 번도 요행을 바란 적이 없지. 그 이유가 뭔지 아나?”
“그, 글쎄요.”
권력은 정보에서 비롯된다.
라미로스 가문의 선조들은 만년 2인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보력을 최대로 끌어 올렸다. 덕분에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그의 재단이 방송사와 신문사 등 언론을 장악하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미로스의 쳐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방해가 되기 전에 제거하면 돼. 그게 기적을 만드는 신이라도.”
* * *
가우디 도면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가우디 연구소는 첫번째 타워의 관광객 출입을 차단하고 특별 발굴팀을 만들어 숨겨진 도면 발굴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5/8 도면 뭉치가 발견되었을 때,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연구원들은 탄성을 질렀다.
“영광의 파사드다!”
스케치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영광의 파사드가 가우디의 시그니처까지 완벽하게 박힌 채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레노는 급히 발굴팀으로 향했다.
“이, 이건!”
한예건의 영광의 파사드와 판박이처럼 똑같은 입면의 구성에 모레노는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도면. 당장 스캔 작업 진행하고, 완료되면 곧바로 금고에 보관하게.”
“네!”
그의 지시를 들은 연구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모레노가 황급히 발굴팀 사무실을 빠져 나가자, 팀원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는 이가 있었다.
* * *
어두운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
발소리는 발굴팀 사무실 앞에서 멈췄다.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검은 복장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내부 구조를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게 테이블 사이를 이동해 금고로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복제된 열쇠를 꺼내 거대한 금고의 자물쇠를 연 그는 플래쉬를 켜고 금고 내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5/8 도면 원본과 연구원들이 복제해 둔 사본을 모두 가방에 집어 넣은 사내는 금고를 원래대로 잠그고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사무실 구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사무엘이 어디론가 연락했다.
“도면 회수에 성공했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