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22)
022화. 음악을 닮은 건축 (3)
다들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바쁜 와중.
컨셉 보고를 위해 설계실에 갔던 다은은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어흑.”
그대로 퍼져 테이블에 엎드린 그녀를 옆에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건.
“뭐가 잘 안 돼요?”
예건의 물음에 다은이 눈을 흘겼다.
“이게 다 예건 씨 때문이에요!”
“네?”
예건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따지듯이 대답하는 다은.
“예건 씨가 현장 다녀오면 보일 거라 해서 다녀온 것뿐인데, 저희 프로젝트 참여하는 인턴 중에서 저만 현장 다녀왔던 거 있죠?”
“음?”
그게 저렇게 화낼 일인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다은이 부연했다.
“팀장님이 현장 보고 오는 게 기본자세라고 하시면서 제가 준비한 컨셉을 보고 어찌나 칭찬하시는지. 정말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요.”
예건은 칭찬을 듣는 게 왜 부끄러운 일인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칭찬 들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팀장님이 너무 기대를 많이 하신단 말이에요. 몰라요! 이게 다 예건 씨 때문이에요. 저 정말 어떡해요?”
별문제도 아닌 거로 화를 낸다 생각한 예건은 고개를 돌려 모른 척했다.
그러자 다은은 웃는 얼굴로 자신의 보고서를 챙겨 들고, 예건 옆에 달라붙었다.
“많이 바쁘세요?”
“네.”
“그럴 줄 알았어요.”
금세 시무룩해진 다은.
너무 쌀쌀맞게 말한 게 미안했는지, 괜히 기지개를 펴며 스트레칭을 하는 예건.
“아~ 피곤한데, 잠시 쉬었다 할까요?”
“진짜요? 예건 씨,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하죠? 제가 얼른 가서 사 올게요.”
이미 예건의 기호를 파악한 다은은 부리나케 카페로 향해 음료를 사다 대령했다.
다은의 긴장한 표정에 피식 웃는 예건.
“부탁이 뭔데요?”
“헤헤. 제 작품 컨셉 좀 봐 주세요.”
“줘 봐요.”
예건이 손바닥을 내밀자, 다은이 황송한 얼굴로 얼른 보고서를 올렸다.
예건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린이 공원에 대한 사이트 설명.
동화 속 집을 이미지화한 사례들을 한차례 설명하고, 이어지는 공간의 주제.
그녀가 선택한 컨셉은 백설공주 동화에 나온 난쟁이의 집이었다.
길을 잃고 숲속을 헤매던 백설공주와 왕자가 숲속 안식처인 난쟁이의 집을 발견하고 잠시 쉬기 위해 들른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로처럼 꾸며진 낮은 울타리를 지나면 작은 오두막이 나타난다.
벽을 장식하는 소품들과 난쟁이 부조가 아이들에게도 조그맣게 보일 정도.
화장실을 이용하고 난 후 재미있게 머물며 동화속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테마 공간까지 마련해 놓은 배려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예건이 말했던 대로 이야기를 담은 화장실이 거기 있었다.
“잘했는데요?”
“정말요?”
예건의 칭찬에 반색하는 다은.
“네. 컨셉이 너무 좋네요. 동화 속 한 장면을 옮겨놓은 작은 쉼터…. 화장실을 단순히 기능적 장소가 아닌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장소로 만든 것이 좋아 보여요.”
“와~. 진짜요?”
“음…. 하나 더 추가하자면.”
연필을 들고 배치도에 쓱쓱 무언가를 그려 나가는 예건.
“여기, 화장실 입구가 보이는 위치에 화장실을 혼자서 이용할 수 있는 아이를 데려온 부모님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며 체험하는 재미 공간은 장시간 머물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관리가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부모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게 되니까 걱정할 것 같고.”
“오~. 그렇겠네요. 메모메모!”
다은은 기쁜 얼굴로 얼른 필기했다.
“안 그래도 팀장님께서 컨셉은 훌륭하니까, 사용자의 편의성이 고려된 기능적 공간 배치를 해 보라고 하셨거든요. 덕분에 도움이 됐어요.”
다은이 예건의 테이블 위를 힐끔 확인하고는 물었다.
“음…. 그런데 예건 씨는.”
그가 펼쳐 놓은 종이 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동그라미만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컨셉이 파동이에요?”
“엥? 파동요?”
“동그라미만 그려져 있어서.”
“아하~. 하하하하.”
며칠 전부터 화장실이 배치될 대지를 포함한 거대한 A2 사이즈 배치도에 점을 찍고 군데군데 원만 그리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던 다은이 속에 있던 질문을 꺼냈다.
“화장실 디자인 언제 해요?”
“지금 하고 있는 걸요.”
다은이 배치도를 가리키며 난감한듯 물었다.
“저게 화장실이라고요?”
다은의 물음에 예건은 그저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 아침.
예건은 향긋한 된장찌개 냄새를 맡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냄새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예건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홀린 듯 거실로 나갔다.
“아들? 벌써 일어났어?”
“된장찌개 냄새가 너무 맛있게 나서요.”
“호호호. 그래?”
“그런데 어디 가세요?”
평소와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오늘따라 유독 기분 좋은 콧소리로 말했다.
“아빠랑 데이트 가기로 했거든.”
“이 아침에요?”
“호호호. 데이트하기에 좋은 시간 아니니?”
주말 아침부터 어디를 가시나 궁금했지만, 어머니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시니 그걸로 충분했다.
“씻고 와서 앉아. 상 차려줄게.”
“네~.”
씻고 나오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와 조금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머니.
아버지가 예건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더니,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얼굴이 환해졌다.
“어! 예건아. 혹시 너 오늘 오전에 잠시 시간 되니?”
“저요? 아마도요?”
“잘 됐구나. 잘 됐어.”
아버지는 어머니의 분위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예건에게 부탁했다.
“예건아, 네 엄마 모시고 용산에 좀 다녀와야겠다.”
“용산이요?”
오늘은 주말이고 공모전 기간이라 늦게 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아까 어머니가 아버지와 데이트라고 하셨던 말이 기억나 고개를 갸웃했다.
“실은 오늘 오전에 용산에 가구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현장에 일이 터져서…. 하하하.”
어색한 웃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아버지가 자동차 키를 예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네가 차 운전해서 엄마랑 데이트 좀 하고 와라.”
“어….”
곁눈질로 엄마 표정을 살피니, 잘못하면 아침밥도 굶게 생겼다.
뱃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을 들은 예건은 입맛을 다시며 얼른 대답했다.
“그럴게요. 다녀오세요.”
예건의 시원한 대답에 아버지는 물론이요, 어머니의 또한 화색이 되었다.
아들과 함께 쇼핑할 생각에 들뜬 모양인지,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 * *
식사를 마치고 용산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
‘설마 옷 사러 가시는 건 아니겠지?’
옷만 사러 가면 종일 매장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불안했던 예건은 엄마에게 쇼핑의 목적을 물었다.
“그런데 용산에는 왜 가시는 거예요?”
“음…. 실은, 아빠가 가게를 하나 차려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서. 너도 이제 다 컸고 하니까, 엄마 전공도 살릴 겸 작은 가구매장을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아들은 어떻게 생각해?”
“오~. 그거 좋은데요.”
순간 예건의 머릿속에 촤라락 펼쳐지는 전생의 정보들.
철 가공부터 시작해서 목재, 석재, 타일 가공까지.
온갖 공방들을 찾아다니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던 전생의 노력이 예건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다.
“네 생각에도 괜찮을 거 같아?”
“어머니 전공이 가구디자인이었잖아요.”
“호호호. 그랬지. 기억하고 있었구나.”
“전공을 살릴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서희는 아들이 자신의 전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그저 기뻤다.
“예전에 엄마가 디자인한 가구가 잡지에 소개된 적도 있었어.”
“오~. 역시. 제가 디자인을 잘하는 이유가 엄마 덕분이었네요.”
“호호호. 그럼 그럼.”
서희는 오랜만의 아들과의 외출이 너무도 행복했다.
매일 책상에 파묻혀 공부하는 아들의 뒷모습만 안쓰럽게 보았었는데.
곁에서 올려다보는 아들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같이 봐 드릴게요. 저도 가구는 좀 알거든요.”
“좋지. 우리 아들이 같이 봐 준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좋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창고형 앤티크 가구 매장이었다.
“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네요.”
“잘 찾아보면, 가끔 숨겨진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어.”
“정말요?”
“그럼. 가구의 가치를 잘 모르고, 디자인만 보고 구입한 사람들이 싼값에 판 골동품 중에 유명 디자이너 가구가 섞여 있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오~.”
“물론 가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봐도 잘 몰라. 대부분 중국에서 넘어온 가짜 골동품이니까.”
“가짜 골동품요?”
“호호호, 놀랐니? 벌써 걱정할 필요 없어.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거니까.”
서희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과연,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가게 중 대부분이 중국에서 서양의 앤티크 가구를 베껴 만든 값싼 가구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제법 괜찮은 클래식 가구점도 드문 드문 섞여 있었으나, 그런 곳은 제값을 다 줘야 살 수 있었다.
창고형 매장이라서 가구들을 싸게 매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서희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금액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비싸네.”
서희가 가구를 둘러보며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골동품 파는 곳으로 가 봐야 하나?”
결국, 큰 기대감 없이 발길이 이끄는 대로 둘러 보고 있는데, 창고형 매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은 매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건이 어머니의 소매를 슬며시 끌었다.
“저기 한 번 들러 볼까요?”
“저기? 그래.”
가구점에 들어서자, 가구 위 먼지를 닦아내고 있던 중년 사장이 두 사람을 반겼다.
“편하게 구경하세요.”
“감사합니다.”
가구를 둘러보던 서희의 눈빛이 서서히 진지해졌다.
‘여기 물건들, 전부 진짜 같아.’
놀란 눈으로 예건을 바라보자, 예건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가격도 착해야 할 텐데.’
다행히도 매장 주인이 각각의 가구 위에 가격표를 올려 두어서 곧바로 가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적당한 가격에 저절로 서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잘 관리된 오래된 가구들은 고미술품과도 같은 값어치를 지닌다.
오래될수록, 관리가 잘 되어 있을수록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당연지사.
단순히 가구 한두 점을 사러 온 것이 아니기에, 서희는 더욱 눈을 좁히며 섬세히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 둘의 살피는 모습이 일반 손님과 다르다고 생각되었는지, 잠시 뒤 사장이 다가와 설명했다.
“여기 있는 제품들은 대부분 프랑스나 영국에서 직수입한 진품입니다. 물건은 확실합니다.”
“그렇군요.”
마트나 백화점 물건이나 사 봤지 거래를 위한 흥정을 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서희는 혹시라도 속마음을 들켜 바가지를 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말을 아꼈다.
그때, 예건이 티테이블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장님, 혹시 이 가구는 어떤 디자이너 가구인지 알 수 있나요?”
순간 당황한 가게 주인.
가구 디자이너까지 물어보며 물건을 구입하려던 손님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프랑스에서 한국에 들여오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요. 제작 연도 정도는 대략 짐작할 수 있어도, 그것까지는….”
“흠… 그렇군요. 그럼 제작 시기는 알고 계세요?”
“판매자에게 들은 말로는 대략 1,900년대 정도에 생산된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예건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장소를 옮기며 이곳저곳을 둘러본 예건이 서희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응?”
예건의 부름에 어색하게 대답한 서희.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카페에서 잠시 쉬어요.”
“어? 어. 그래 그러자.”
예건은 가게 사장님께 부탁해 명함을 하나 챙겨 나왔다.
서희는 자신이 너무 들떠서 오랜만에 쉬는 아들을 귀찮게 한 것은 아닌지 괜히 걱정되었다.
“아들, 미안. 엄마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었지?”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앤티크 가구 매장을 차릴 생각이세요?”
“아무래도 최신 트랜드 가구는 이미 큰 매장이 많이 있으니까.”
“하긴. 조그맣게 차리실 거면, 확실한 컨셉이 있는 게 좋긴 하죠.”
이왕이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시대의 가구를 취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900년대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를 취급하는 건 어떨까요?”
“아르누보? 우리가 그 시대 물건을 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컨셉이 좋다고 해도, 판매할 상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아까 마지막에 갔던 매장 있잖아요. 거기서 제가 디자이너 물어봤던 티 테이블 기억하세요?”
“어? 어.”
씩 웃은 예건이 낮은 목소리로 부연했다.
“그거,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앙리 반 데 벨데가 만든 가구 같아요.”
[아르누보 스타일의 가구>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Jean-Pierre Dalbéra]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