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28)
028화. 통 큰 투자 (4)
예건이 김수훈 대표와의 일대일 대면을 마치고 몇 시간 후.
대회의실 앞 공고란에 한예건의 정직원 인사발령과 관련된 소식이 공표되었다.
설계 3팀의 공모전 수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을 인정, 공중화장실 공모전의 당선 여부에 상관없이 한예건을 정직원으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공고를 확인한 영광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사석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오태수 인턴이었다.
“설계 3팀 공모전이라면, 영광 씨가 하던 거 아니었어요?”
“글쎄요.”
“아니, 전에 인턴 모임에서 팀장님이 영광 씨한테 디자인 맡겼다고 자랑했던 거 기억 나는데.”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영광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오태수가 영광을 붙잡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우리도 미리 조심할 거 아닙니까?”
“조심하다뇨?”
태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영광에 귀에 속삭였다.
“한예건, 그 사람 자리에 있는 화장실 배치도. 그거 혼자 그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못 들었어요?”
“뭐라고요?”
“아니면 왜 디자인하는 과정을 아무도 못 봤겠어요? 3팀 공모전 건도 영광 씨가 거의 완성했던 디자인을 예건 씨가 마무리만 해 놓고 혼자 한 것처럼 꾸민 거 아니냐는 말이 있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대꾸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건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든 어차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굳이 나서서 해명해 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저라면 경쟁자 뒷조사나 할 시간에 제출할 디자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더 신경 쓸 것 같네요.”
영광이 멀어지자 오태수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노코멘트? 그래, 언제까지 모른척하고 있을 수 있는지 보자고.”
발 없는 소문은 삽시간에 인턴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여기저기서 예건을 힐끔대며 수근거리는 목소리까지 더해졌다.
* * *
종일 새 A1 용지 한 장을 펼쳐 놓고,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던 예건이 6시가 되자마자 자리를 정비하고 일어섰다.
그런 예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던 영광이 물었다.
“벌써 퇴근입니까?”
“네.”
“이미 정직원 확정되어서 그런지, 여유 있으시네요.”
“여유라….”
예건이 자신의 판넬을 바라보다 물었다.
“저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가 좋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왜죠?”
“설레니까요. 백지는 참으로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죠. 저는 백지를 보며 최선의 디자인을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건이 할말을 다 했다는 듯 돌아서자, 영광이 날 선 목소리로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수근거리는 줄 압니까?”
“뭐라고 하든지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이 사람들이 다 볼 때 디자인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런 거라고 하더군요.”
“하….”
“차라리. 증명해 보이는 쪽이 낫지 않습니까? 모두가 예건 씨 능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다른 소리 못하게.”
예건이 빙글 몸을 돌려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입니다.”
예건의 단호한 말에 동요한 영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멀어지는 예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광은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가 예건의 대각선 뒷자리를 선택했던 이유는 예건의 작업 과정을 훔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주 동안 예건이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판넬을 주시하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주제가 어려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인턴 동기들을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그의 말에서 영광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한예건은 많은 시간을 쏟아붓지 않고도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제출까지 이제 남은 기간은 3일.
괜한 감정에 휘둘려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영광은 다짐했다.
절대로 예건에게 뒤지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고.
* * *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평소보다 이른 귀가를 한 예건.
가족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둘러앉았다.
소파 테이블 위에는 예건이 그렸던 도면이 올려져 있었고, 아버지의 표정은 평소보다 진지했다.
예건은 무슨 이야기를 꺼내시려나 궁금해하며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차를 조용히 음미했다.
“네 엄마와 상의를 좀 해봤는데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명호가 예건이 처음 그렸던 화려한 파사드 디자인을 펼치며 말했다.
“상가를 사서 이 디자인 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차를 마시려다 말고,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예건.
“임시로 빌린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다행히 사장님께서 싸게 판매하신다고 하더구나.”
“얼마나요?”
“원래는 10억이었는데, 7억 정도로.”
“그럼, 내 외부 공사비까지 합하면 사업 총 예산을 11억 정도로 늘려야겠네요?”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나오는 물음에 한명호가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예건은 자신이 확인했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울 인근에 대형 장식 철물을 만든 경험이 있는 업체를 몇 군데 찾아냈어요. 공장에서 직접 현장 검수도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현장 설치 인부까지 공장에서 조달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아마 간판과 외장 디자인은 8천만 원 안에서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흐흠. 그래?”
가장 우려했던 철물 장식에 대한 비용과 퀄리티는 예건이 직접 현장에서 통솔하기로 결정했다.
“사업자는 신고하면 일주일 내로 나온다고 하니까, 어머님께서 신청하시면 될 건데. 개인으로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법인으로 하는 게 좋을지 고민되네요.”
“사업이 확장될 것을 고려하면, 법인으로 하는 게 좋겠지.”
“그렇군요. 공사기간이 최소 한달은 걸릴 테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네요. 신고 과정은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천천히 하나씩 해 보면 되겠지.”
서희는 아들의 똑부러지는 모습에 든든했다.
“그런데 아직 인턴십 남았지 않니? 졸업도 해야 하는데, 괜히 엄마일 돕는다고 학교 수업에 방해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나.”
“건림건축 채용은 오늘 확정 됐어요.”
예건의 말에 부모님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니?”
“졸업을 하고 취업하는 거겠지?”
아버지의 물음에 예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사를 따려면 대학졸업은 필수니까요.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졸업 학점 인정 받는 방법도 있다고 하니까 저도 알아보려고요. 졸업까지 이수해야 하는 학점도 그리 많지 않아요. 회사에서 채용 일정도 제게 맞춰 주신다고 하셨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예건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투자 비용을 너무 갑작스럽게 늘리신 것 아니에요? 사업이 잘 되면 다행이지만, 잘 안 될 수도 있잖아요.”
명호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그러더라. 이런 도면을 가지고도 투자할 생각을 안 하면 그 사람은 건축 전문가가 아니라고. 망하면 평생 직장 생활 하면 되지 뭐. 그리고 사업은 망해도 부동산은 남잖냐.”
사업은 망해도 부동산은 남는다.
그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아마 예건일 것이다.
구엘이 꿈꾸던 구엘 타운하우스 사업은 망했지만, 가우디가 디자인하고 시공을 관리했던 구엘 공원의 명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했으니까.
‘멍청한 구엘의 자식놈. 그때 거길 안 팔았으면 지금쯤 대대손손 입장권만 받고도 충분히 먹고 살았을 텐데.’
구엘 백작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래도 한때는 바르셀로나를 움켜 쥐고 있는 거부였으니,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겠지?
궁금증을 꾹꾹 눌러 넣은 예건이 씩 웃으며 아버지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남의 최고 명소가 될 수 있도록, 예술적인 공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전생에 새로운 디자인을 맡을 때마다 건축주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 * *
인턴 공모전 제출 당일 아침.
대부분의 인턴들은 거의 작업을 마치고, 판넬을 최종 점검하는 중이었다.
유하나가 서영광의 자리로 다가오더니 영광의 판넬을 유심히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표현력은 영광 씨를 따를 수가 없네요. 홍인대 미술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굉장해요.”
하나의 칭찬에 영광은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나 씨도 잘하셨던데요. 미술관에 어울리는 추상적인 외관이 굉장히 돋보였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대답하며 작게 미소 짓는 하나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심사위원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미술관 쪽이 대진운이 너무 안 좋았어요. 차정석 씨가 같은 프로젝트죠?”
유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정보가 너무 없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예건 씨랑 프로젝트를 바꿨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자신 있었던 그녀였기에, 미술관에 어울리는 조형적 건축 외관에만 집중해 형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녀의 설계를 본 예건이 공중화장실은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기에 장애인들에게 접근 장벽 없는 공간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지만, 공모전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형태의 아름다움이라며 예건의 조언을 무시했다.
결국, 담당 팀장에게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디자인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듣고 난 후에야 예건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설계안을 수정하고 보완했으나, 공들였던 외관디자인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하나의 설계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유하나는 예건의 테이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직 예건의 테이블에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 같은 A1 백지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예건 씨는 좋겠네요. 공모전 결과물을 제출하지 않아도 채용은 확정이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하나의 얼굴에 수심이 짙게 내렸다.
* * *
예건은 출근 후 30분 동안 자신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판넬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런 그를 주목하는 의문 가득한 시선들.
질시, 동정, 순수한 궁금증.
도대체 반나절 만에 저 넓은 백지를 무슨 수로 채우냐는 걱정 어린 눈길도 적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들이 마구 뒤섞인 끈적한 시선들이 예건의 오른팔이 움직이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이 시간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배려였다.
자신의 디자인을 보고 좌절한 이들이 작품 제출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최소한의 시간만을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하나, 이 경쟁에서 저들과 예건은 출발선부터 달랐다.
이제 막 건축이라는 분야에 첫발을 떼기 시작한 어린 새싹들을 처참하게 뭉갤 수는 없지 않는가.
다만 자신의 디자인 과정을 지켜보며 하나라도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자신이 살았던 장소와는 수천㎞ 떨어진 지구의 반대편.
게다가 백 년 가까이 흘러버린 시간.
그러나 전생 못지 않게, 이번 생도 찬란할 거다.
평생을 갈고닦은 노력을 한눈에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이들이 주위에 있으니.
이제 프로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것.
스르륵.
예건은 펜을 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