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3)
003화. 아이소핑크에서 걸작 탄생 (1)
살벌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지연 대신, 김 대리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여~ 반가워요. 한예건 인턴. 나는 김준호 대리. 2주 체험인가? 말 편하게 해도 될까?”
“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우리 모형팀 팀장님이신 주효섭 과장님은 지금 미팅 있으셔서 잠깐 설계팀에 가셨고, 당분간 우리 이지연 사원 서포트 하면 돼. 지연 씨.”
“네. 대리님.”
“2주 동안 예건 씨 업무 적응 잘하게, 잘 좀 가르쳐 줘.”
“네. 알겠습니다.”
이지연이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모형실 내부와 예건의 자리를 안내했다.
“예건 씨는 대학 다닐 때 모형 좀 만들어 봤어요?”
“음~. 많이는 안 만들어 봤습니다.”
역시나.
‘기대한 내가 바보지.’
가끔 귀찮은 업무를 피하려고 첫날부터 이상한 컨셉을 짜고 오는 인턴들이 있다고 들었다.
옷 입은 태 하며, 어쩐지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아…. 이번 인턴은 포기해야 하나? 아냐! 언제까지고 깍두기만 썰 수는 없잖아.’
이지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이번에는 꼭 열선을 저 인턴에게 넘기겠다는 각오로 임하기로 결심했다.
“열선으로 아이소핑크 자르는 거는요?”
“오호~. 이렇게 생긴 기계는 처음인데요.”
인턴이 열선기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해진 이지연이 친절한 미소를 장착한 채, 예건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예건 씨가 전담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하는 거 잘 봐요. 이건 깍, 아니 주변부 건물들을 만들기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전원을 켜고 스위치를 돌려 적당한 온도로 맞추었다.
그러고는 기준대를 조작해 열선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놓고, 그 간격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스티로폼을 골라 통과시켰다.
너무 느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통과한 스티로폼은 절단면이 조금도 열선에 눌어붙지 않고, 깔끔하게 잘렸다.
“오오. 멋지군요.”
예건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이지연의 솜씨를 감탄했다.
늙은이 같은 말투가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이지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열선기를 처음 사용하면 단번에 저처럼 잘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익숙해지면 자유자재로 작업이 가능하죠. 원뿔, 터널 같은 것도 만들 수 있고.
물론 당장 그런 고급 기술까지 쓸 일은 잘 없지만. 예건 씨도 한번 해 보실래요?”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이지연은 자리를 비켜주고, 적당한 사이즈의 스티로폼을 건넸다.
잠시 긴장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쉰 한예건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는가 싶더니.
이지연이 알려준 대로 스티로폼을 열선과 기준대 사이로 단번에 통과시켰다.
절단면을 확인한 예건이 안타까운 한탄을 내뱉었다.
“아….”
아쉬워하는 예건의 표정에 지연이 다시 한번 친절한 미소로 무장한 채 그를 격려했다.
“처음이라 절단면이 깔끔하지는 못할 거예요.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몇 번 실수해도 참고 봐 줄 생각이었던 이지연은 그의 결과물을 건네받았다.
‘아…. 뭐지? 잘했는데?’
“잘했는데요?”
“이 정도면 합격인가요?”
“네! 좋아요. 몇 번 더 해 보죠.”
“네.”
이지연은 내친김에 기준대를 조절해서 스케일에 크기를 맞추는 것도 알려주었다.
“오오~. 스케일 자가 필수군요.”
“네. 모형마다 작업하는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그에 맞춰서 주변 건물 사이즈도 결정되는 거죠. CAD에서 평면은 뽑아서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높이만 스케일에 맞는지 체크하시면 돼요.”
건축공학과를 나왔다면 모형작업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왜 생초보를 가르치는 기분이지?
”건축공학과 다니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학교 다닐 때는 설계에 크게 관심이 없었거든요.”
“아….”
과거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지금 잘하면 되는 거지.
다행히 한예건은 빛의 속도로 지연의 가르침을 습득했고, 십여 분 만에 지연의 작업물과 비슷할 정도로 날 선 깍두기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연습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바로 실무로 들어가죠.”
“벌써…. 실무입니까?”
감격한 표정의 예건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연이 으스댔다.
“원래 노하우 공개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닌데. 이게 다 예건 씨가 잘 따라와 준 덕분이에요.”
속으로 만세를 외친 건 지연이었으나, 본인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괜히 초를 칠 필요는 없잖아?
마침 모형팀 팀장 주효섭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예건과 지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오오. 오늘 새로온 인턴?”
“네. 안녕하십니까? 한예건입니다.”
예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묵례했다.
지연이 깍두기 만드는 걸 지겨워하기 시작한 걸 너무도 잘 아는 주 과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지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때? 잘하는 거 같아?”
“예건 씨요? 깍. 아니, 열선기는 이제 저만큼 잘 다루는 것 같아요.”
“오오~ 웬일이래? 지연 씨가 웬만해서 남 칭찬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주효섭 과장의 대꾸에 지연의 눈이 매섭게 주 과장을 째려봤다.
주 과장이 지연의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에 널브러진 아이소핑크 조각을 하나 들었다.
“이게 우리 예건 씨 작품?”
“네. 아이소핑크 절단면이 정말 깔끔하죠!”
지연은 예건이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양 호들갑을 떨었다.
주효섭 과장의 눈매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어? 진짜 잘 만들었는데.”
“진짜 잘한다니까요!”
둘의 호들갑에 김 대리도 신기한 듯 구경을 왔다.
“그게 하루 만에 잘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이야~ 진짜 칼 각이네.”
지연이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당당하게 콧대를 세웠다.
“흠흠. 그게 다 제가 잘 가르친 덕분이죠.”
“역시! 지연 씨는 가르치는 것도 특출나네. 이 정도면 주변 건물은 예건 씨가 전담하면 되겠는데.”
김 대리가 지연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연은 드디어 깍두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정말요? 아! 물론 예건 씨 혼자는 버거울 테니, 제가 잘 케어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하지, 지연 씨가 당분간 예건 씨 사수니까. 예건 씨 앞으로 잘 부탁해.”
“네.”
겨우 단순한 직육면체 모형 만든 일 가지고 이 정도로 호들갑 떨 일인가?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웃지 못하는 건 한예건 뿐이었다.
* * *
오후 작업이 한창인 모형실.
디자인 1팀 관공서 설계 담당 소장 이주홍 이사가 다급하게 주효섭 과장을 찾았다.
“주 과장,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한데. 이거 하나만 먼저 해 줘라.”
“뭔데 그러세요?”
“우리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공주 시청 조형물인데, 담당자가 어떤 게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고 형태만이라도 비슷하게 만들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러잖아.”
가로 세로의 대략적인 치수만 적혀 있는 사진 석 장.
“언제까지요?”
“그게, 내일 미팅이라….”
오늘 중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주 과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주홍 이사보다 훨씬 어린 나이지만, 미간을 찌푸리는 주효섭을 보면서 이주홍은 그냥 배실배실 웃어 보일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형팀은 설계팀에게 있어 필수적인 지원팀이었다.
공모전 팀을 포함해 건림건축의 설계팀만 총 10팀.
설계팀은 인원수가 많은 데 비해, 모형팀의 인원은 많지 않다.
급하면 설계팀 인원을 빼서 모형작업을 시켜야 하는데, 익숙지 않은 업무를 맡게 되면 당연히 소모되는 시간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상관없지만, 설계팀 또한 매번 여유가 없어 야근하는 상황이다.
주효섭 과장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직책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업무를 지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프로젝트를 하나둘 받아 주기 시작하면, 실제로 집중해야 하는 일에 타격이 갈 수밖에 없으니.
팀을 책임지는 주효섭 과장으로서도 아무 일이나 무턱대고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주홍 이사였다.
주효섭 과장은 다시 이주홍 이사가 건넨 사진을 살펴보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곡선이 많아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은 분명했고, 시간도 촉박하다.
직원들을 쓱 훑어보던 주효섭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 공모전 납품이라, 이번 주는 너무 바빠서 힘들 것 같습니다. 이사님. 죄송해요.”
“아…. 그래, 무리라는 건 아는데.”
주효섭 이사가 다급한 눈으로 멀리 아이소핑크로 깍두기를 자르고 있는 예건을 가리켰다.
“그럼, 그냥 사이즈라도 확인할 수 있게 아이소핑크로 사이즈 대로만 잘라줘. 그럼 우리 직원 시켜서 손보라고 할게.”
얼마나 다급했던지, 이주홍 이사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정말 그거면 되는 거죠?”
“그래.”
“스케일은요?”
“백분의 일.”
“하아-. 알겠어요.”
주 과장은 차마 이주홍 이사의 부탁을 더는 거스르지 못하고 예건을 불러 종이를 건넸다.
“예건 씨, 이거 1/100 사이즈로 사각형으로 따 와.”
“이걸요? 그냥 직육면체로요?”
예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급하다고 하시니까, 바로 해 드려.”
“네.”
이주홍 이사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썰미로 작업을 맡은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했다.
[인턴. 한예건.]‘아무리 그래도 오늘 입사한 인턴한테.’
어떻게든 직원을 시켜 손보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주홍 이사의 속은 타들어 갔다.
“아니, 주 과장. 내가 대충해 달라고는 했지만, 저 친구 오늘 온 인턴이잖아. 열선이나 제대로 써 봤겠어?”
주 과장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전에 테스트 했는데, 깍두기는 곧잘 만들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주 과장. 조금만 더 신경 써 달라고. 내가 저녁에 맥주 살게. 기분이다! 모형팀 전부 치킨도 쏜다. 그러니까….”
“진짜죠?”
주효섭 과장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럼 이사님 법카 주세요.”
“하하하.”
현실을 깨닫고 웃음으로 무마하려던 이주홍 이사가 한숨을 푹 쉬고는 지갑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들었다.
덥석 카드를 잡은 주효섭 과장.
이주홍 이사가 법인카드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자, 주 과장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직육면체로 잘라 드려요?”
그제야 손에서 힘을 빼는 이 이사.
주효섭이 웃는 얼굴로 법카를 들고는 예건에게 추가 지시를 했다.
“예건 씨,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봐. 조금 시간 걸려도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어렵다고 할 만도 한데 예건이 덥석 대답하자, 주효섭 과장은 빙긋 웃고 자리에 앉았다.
“아아. 주 과장!”
“제가 옆에서 봤는데, 예건 씨 열선기 잘 다뤄요. 한 번 맡겨 보시죠.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직접 만들어 드릴게요.”
마음에 안 들면 직접 만들어 준다는데,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주홍 이사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초조한 얼굴을 했다.
법카마저 뺏긴 마당에 제대로 만드는 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던 이 이사는 자리를 옮겨 아예 예건의 옆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인턴이 잘 해 봐야 얼마나 잘한다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테이블에는 가장 난이도가 쉬운 직육면체 형태의 조형물 사진이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 저거 만드는 것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바로 주효섭 과장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예건은 옆에 누가 있던 말던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프린트에 적힌 사이즈대로 아이소핑크 조각을 잘라냈다.
‘흠. 진짜 깍두기 하나는 잘 써네.’
면이 깔끔한 게 열선에 눌린 자국 하나 없었다.
예건은 전체적인 형태를 머릿속에 구상하는 것처럼 잠시간 사진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잘 잘라진 아이소핑크 조각을 갑자기 군데군데 파내기 시작했다.
이주홍 이사는 너무도 과감한 예건의 행동에 뭐라 토를 달지도 못하고 그저 입만 달싹거렸다.
도무지 예건의 작업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지켜보기로 한 거다.
이내 열선을 이용해 조각에 무늬를 새기기 시작한 예건.
그 순간 이주홍 이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예건의 손놀림을 지켜만 볼 뿐.
예건이 열선으로 조각을 완성했을 때, 이주홍 이사는 경악한 듯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손에는 사진을 꼭 닮은 조형물이 들려 있었다.
‘저, 저게 가능한 거야?’
[아이소핑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