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33)
033화. 세상에서 가장 큰 조각품 (3)
클라이맥스.
극이나 소설의 스토리 전개에서 긴장감이 최조고에 이른 단계.
음악에서는 절정에 이르는 순간을 이르는 말이지만, 식물학계에서는 식물이 생태적 조건에 가장 적합한 식물군을 이루는 최적의 안정적 상태를 뜻한다.
과연 발표자가 그 뜻을 알고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클래식 최고 절정의 순간과 식생의 최적 상태를 함께 떠올리게 만드는, 꽤 적절한 언어유희였다.
‘제법이군.’
조경 전문가인 고도대학 이덕진 교수는 젊은 발표자를 주시했다.
입장할 때 나눠주었던 식순을 확인해 발표자가 건림건축의 디자이너라는 것을 확인한 이 교수.
학생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후원 계획을 디자인한 주체가 건림건축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 줄곧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음악당 후원 디자인을 수주하기 위해 위원장을 맡은 건가? 김수훈 대표답지 않군.’
그가 아는 김수훈은 돈을 좇는 이가 아니었다.
발표는 제법 잘하지만, 저런 풋내기를 건림건축의 디자이너로 내세운 의도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종일관 복잡한 심경으로 브리핑을 평가하듯 보았던 이덕진 교수는 배치도에 그려진 다양한 수종의 나무 배치 방식을 보고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건축회사에서 할 수 있는 조경디자인 수준이 아니야. 제법 유능한 조경 협력사의 도움을 받은 모양인데….
그러면서 건림건축만 제안사로 내세우다니. 이러니 조경회사들이 살아남을 수가 있나, 쯧.’
음악당의 후원디자인은 응당 그 주체가 조경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쉬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국의 현대 도시사업에서 조경디자이너들은 건축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업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건축 설계사무실의 협력사 정도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건축 기술의 고도화로 각 분야가 전문화된 시대.
과거는 그 경계가 없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문 분야가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좋은 디자인이라 해도, 건축이 조경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공원디자인의 주체는 건축가가 아니라, 조경디자이너여야 한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이 악습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다.’
이번 기회에 오랜 악습을 제대로 뿌리 뽑아야겠다고 생각한 이덕진 교수는 흔들리는 마음을 더 굳게 붙잡았다.
* * *
반면, 클라이맥스라는 단어는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예건의 발표를 지켜보고 있던 김수훈의 가슴속에도 뜨거운 울컥거림이 일었다.
‘뭘까? 이 감정은?’
예건이 건림건축에 정직원으로 입사하고, 발표를 준비한 기간은 겨우 2주 남짓.
매일 아침저녁으로 설계기획실을 찾아가며 후원의 작업과정을 살폈고, 어제는 최종 브리핑을 주관했다.
디자인은 완벽했다.
브리핑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가 남아 있었다.
자신은 조경 전문가가 아니다.
디자인이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실무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되면, 조경 전문가를 고용해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예건이 ‘클라이맥스’라는 단어를 선정한 이유를 설명했을 때, 거리낌이 있었다.
‘클라이맥스는 식생의 가장 최적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후원의 디자인은 음악적, 생태적으로 최고의 순간을 간직하는 것을 목표로 디자인했습니다.’
‘식생의 안정적인 상태를 뜻한다…. 의도는 좋지만, 괜찮겠나? 조경 전문가들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걱정되는군.’
‘걱정하지 마세요. 조경 전문가라 할지라도 이 배치도를 보고 흠을 잡지는 못할 겁니다.”
예건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으나, 김수훈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라고 할지라도 식생과 조경 분야까지 섭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조경디자이너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다.
디자인에 집중한 나머지 미리 협력업체를 섭외하여 검증받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컸다.
차마 걱정을 떨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 예건의 자신감에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김수훈은 예건이 발표하는 내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경 전문가들의 눈치를 살폈다.
스크린에 배치도가 펼쳐진 후 여전히 평온한 전문가들의 표정을 확인했을 때, 김 대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완벽하지는 못할지라도, 보완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김수훈은 살피던 전문가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예건의 남은 브리핑에 집중했다.
진짜 중요한 내용은 지금부터다.
예건의 설계는 심미적으로 너무도 완벽했다.
후원의 디자인은 볼 때마다 새롭고, 신비로웠다.
디자인이 완성될수록 김수훈 대표의 마음속에는 의문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나에게 음악당 후원의 디자인 의뢰가 들어왔다면, 이 정도 수준의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물론 가능할 거다.
단, 엄청난 시간과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는다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건은 후원의 배치도를 단 2주 만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브리핑 준비를 위해 다시 2주라는 시간을 소요했다.
1만 평 규모의 후원, 공중화장실 디자인까지 높은 수준으로 완성한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다.
그리고 2차원 배치도가 3차원에서 구현되는 것을 보고, 정기택 상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릇이 너무 작아.’
넘쳐나는 저 재능을 담기에 자신의 그릇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예건의 발표를 지켜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은 예건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예건의 디자인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큰 자극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설계 내용임에도 오늘 예건의 발표는 또 다른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물 흐르듯 청중을 자신의 상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발표를 들으며 김수훈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클라이맥스는 음악과 이야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율과 감동은 지금, 이 순간 회의장에도 번지고 있었다.
한국의 공간디자인을 이끌어갈 천재의 탄생을 예고하며 스며들 듯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있었다.
* * *
발표의 막바지.
예건은 청중들을 훑어보고는 후원디자인의 핵심 컨셉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음악당의 후원은 방문객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공감각적 체험을 통해 감성적 사고를 확장하는 장소가 될 겁니다.
인간과 음악의 교류를 이끄는 단순한 물질적인 통로 공간을 넘어 작곡가, 연주자와 교감하고,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는 장소로써, 음악의 의미를 되새기고 음악에서 얻은 전율과 감동을 치유로 치환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디자인했습니다.”
깊이 있는 고찰이 그대로 공간에 반영되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청중들이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가들의 태도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발표자가 어리다고 얕보던 이들도, 학생 작품이냐며 깔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준비가 잘 된 프레젠테이션.
컨셉도, 디자인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는 것을 저들도 인정한 것이다.
예건은 주어진 시간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음악당 후원의 계획을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회의장 앞 로비에 후원의 축소 모형을 비치해 두었습니다. 최종 논의에 앞서 잠시 휴식하시면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집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브리핑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회의장 내 조명이 켜지고 예건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디자인을 반영한 최종안이 궁금해진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모형을 찾았다.
사실적으로 표현된 모형과 나란히 놓인 배치도는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디테일이 상당하군요.”
“공원의 조형미도 장난이 아니에요.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게 계획된 데다, 공원의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음악당 건축물에 대한 조망도 고려된 것 같습니다.”
“이대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서울에 명품 공원이 탄생하겠군요. 명소라는 말이 아깝지 않겠어요.”
대부분 전문가가 감탄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를 못 미덥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었다.
마침 모형을 설명하러 나온 예건을 발견한 이덕진 교수가 물었다.
“선택된 수종의 배치 방식이 굉장히 인상적이군요. 후원 주변을 대형목 위주로 배치해 도심에서 흘러나오는 시각적, 청각적 방해 요소들을 차단한 것은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접목하고, 서울의 환경에 적합한 수종이 식재된 것도 매우 바람직하군요. 제법 괜찮은 컨셉으로 시작한 마스터플랜에 수준 높은 조경디자인까지 곁들어지니, 완성도가 더욱 돋보이는군요. 혹시 조경디자인 업체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덕진 교수의 질문은 교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전체적인 마스터플랜보다 상세한 조경디자인이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에 한 질문이었다.
그 의도를 대번에 파악한 예건이 이덕진 교수의 목에 걸린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의젓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도대학 조경학과 이덕진 교수님이시군요. 이 디자인은 시작부터 끝까지 제가 주도하여 디자인했습니다.”
“뭐라고요?”
예건의 대답에 이덕진 교수가 경악했다.
“그 말은 조경과 관련해 조언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덕진 교수는 예건의 말에 당황해 다시 한번 배치도를 확인했다.
노래하는 합창단처럼 후원을 둘러싼 조경수들은 단순히 보기 좋게 배치한 것이 아니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연출할 수 있도록 낙엽송과 상록수를 적절히 배분하여 식재하였으며, 식재의 종류별 상생 관계를 고려한 거리 확보, 공원 조성 이후에도 친환경적 생태 환경이 유지될 수 있도록 배려한 복잡한 설계였다.
외형만 고려하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얻을 수 있는 조경디자인이 아니라 철저히 실무, 관리적 입장까지 고려된 구성이라는 뜻이다.
이덕진은 도무지 예건의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단순한 요행으로 이런 배치가 나왔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수목 선정부터 배치까지 현장의 다양한 환경 조건을 고려하여 디자인한 것이니까요.”
“식생의 차후 관리까지 고려해서 이런 디자인을 했다는 겁니까? 그건 십수 년의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잘 보존된 공원 디자인의 완성 도면을 보고 베낀 게 아니고서야…. 이런 디자인이 나올 수가 없어요. 저는 이 디자인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요.”
이덕진 교수의 단정적인 말에 예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다른 사람의 디자인을 베꼈다고? 하! 진짜 어이가 없군.’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덕진 교수의 발언을 듣고 동요해 웅성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스터플랜은 괜찮아요. 괜한 분란 만들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 계획안이니, 시간을 들여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는 것보다 지금 제대로 밝히고, 디자인을 수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조경 전문가인 이덕진 교수의 말에 다른 전문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기획 단계일 뿐, 구체화하지 않은 디자인에서 기존의 자료를 가져다 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실시 설계 과정에서 디자인이 현장에 맞게 변경되는 것 또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예건은 전혀 굽힘이 없었다.
“저는 제 디자인을 변경할 생각 없습니다. 또한, 그 누구의 디자인도 베끼지 않았습니다. 정 믿기지 않으신다면, 교수님께서 직접 찾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뭐라고?”
예건의 말을 들은 이덕진이 눈을 부릅떴다.
“만약 교수님께서 제 것과 똑같은 배치 도면을 찾으시면 제가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겠습니다.”
당당한 예건의 태도에 이덕진 교수가 되려 당황해 김수훈 대표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의 표정에는 수치심 한 점 없었다.
‘뭐야? 설마 저 말을 믿는 건가?’
도저히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이덕진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기필코 자네의 기망을 증명해 보이겠네. 거짓이 밝혀지면, 자네 말대로 이 프로젝트는 포기해야 할 거야.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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