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49)
049화. 미친 존재감 (2)
“아이씨, 깜짝이야. 박 주임! 뭔데 그래?”
김 부장이 정 과장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박 주임.
김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정 과장님. 설계팀에서 착공 도면에 오류가 있다고, 시공 일정을 조금만 늦출 수 있냐고… 연락이 와서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그치듯 묻는 말에 박 주임이 눈을 질끈 감고 속사포로 대답했다.
“구조도면이 평면도랑 다르답니다.”
“뭐?!”
건림건축 설계팀의 납품 도면 관리 감독은 철저하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도면이 잘못되었을 거란 생각은 미처 못한 정 과장이 가재미 눈으로 김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재차 확인했다.
“그걸 이제 알려주면 어떡해? 뭐가 어떻게 바뀐 거라는데?”
“기둥 배열은 그대로고요, 사각기둥에서 원기둥으로 변경된 게 조금 있답니다. 매장 측에.”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 부장이 샤우팅을 내질렀다.
“어휴- 진짜! 사이즈가 바뀐 것도 아니고, 모양이 달라진 걸 파악 못 해?!”
“부, 부장님. 고정하세요.”
“으으으윽! 고~정? 고~정? 다음 주에 당장 기초 작업해야 하는데, 고정이 되겠니?”
정 과장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은 것을 보고, 박 주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종이 뭉텅이를 내밀었다.
“설계 팀에서 최대한 빨리 도면 수정해서 넘기겠다고… 구조 계산서 먼저 보냈습니다.”
벌써 수요일.
시공사에서 이 사실을 알면, 감리 측에서 검토가 늦어진 것을 빌미로 공사 일정이 늦어졌다고 트집을 잡을 게 뻔했다.
변경된 내용을 빨리 확인해서 시공사에 확인시키는 것이 먼저다.
김 부장이 들고 있던 도면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내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 뭐야?”
분명 깨끗해야 할 도면이 빨간 마크와 코멘트가 가득했다.
당황한 김 부장의 뇌리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이거 그 인턴!”
한예건, 그 녀석이 인수인계 자료라며 건네 주었던 그 도면이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면에 집중했다.
문제의 1층 구조 평면도에 평면도와 다른 기둥들이 분홍색 형광펜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변경된 기둥의 수량까지 파악되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도면에 끼워져 있는 별도의 A4용지에는 깨알 같이 적어둔 구조계산서와 함께, 기둥의 철근 굵기와 배근도까지 명확히 그려져 있었다.
김 부장은 구조계산서의 기둥일람표와 내용을 대조해 보았다. 이형 철근의 개수, 띠장 철근의 간격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뭐야? 이 녀석? 직접 구조 계산까지 했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일순간에 잦아들며 입가가 씰룩거렸다.
건축과 구조도면뿐만 아니라,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살펴 문제가 있는 부분을 표기하고 오류를 바로잡기까지 해 놓았다.
너무도 조용해진 분위기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정 과장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 부장이 보고 있는 도면으로 향했다.
“부장님, 도대체 언제?”
“아까 네가 말했던 한예건이란 녀석, 난 놈은 난 놈인가 보다.”
“네?”
“그 녀석한테 이 프로젝트 도면 출력해서 제본하라고 시켰는데, 어느새 이런 걸 만들어 뒀네. 덕분에 수고는 좀 덜겠네.”
김 부장이 한예건이 체크한 도면을 몽땅 정 과장에게 넘겼다.
“일단, 이 검토 도면이랑 구조계산서 대조해 확인하고, 지하 1층이랑 기둥 일람표 수정된 것부터 시공사에 전달해.”
“넵. 알겠습니다.”
“나 건설팀 윤 소장한테 갔다 온다.”
김 부장이 사태 수습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겨우 한숨을 돌린 정 과장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자리에 앉았다.
“아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암담했던 상황을 모면하게 해 준 한예건이란 사람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저녁.
카페 창가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는 한 사람.
맞은편으로 보이는 세련된 가구 매장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여사장은 막 뽑은 커피를 잔에 옮겨 직접 그의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열심이네. 이건 서비스!”
부드러운 주황빛 카페 조명이 반사된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감사합니다.”
“예건 씨 매장, 가구 전시만 해 놓고 팔지는 않는다면서?”
“아… 그게 좀, 그럴 일이 생겨서요.”
“그럴 일?”
“크리스티앙 경매에 출품하기로 했거든요.”
여사장이 호기심이 동했는지, 냉큼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오오~ 크리스티앙! 거기 예술품 경매하는 데 아니야? 거기서 취급할 정도면 가지고 있던 물건이 보통 물건이 아닌 모양이네.”
“네. 그렇더라고요. 덕분에 팔 물건이 없어졌어요.”
“아~ 그래서 직접 디자인하려고?”
“네.”
쉬는 날이면 골동품들을 수리하느라 바빴고, 최근에는 JJ 엔터 설계에 집중하느라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오늘 본격적으로 가구디자인을 시작한 것이다.
가구점을 보며 디자인을 하면 좀 더 좋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해 맞은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음… 어떤 디자인일지 궁금하네~. 나도 좀 봐도 돼?”
“네.”
예건은 스케치북을 여사장에게 넘기고, 커피를 마셨다.
역시나 질 좋은 원두를 사용했는지, 풍미가 좋다.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라 메종드 아르누보를 보고 있는데, 여사장이 놀란 듯 물었다.
“어머! 이거 패브릭 의자네. 맞지?”
“아? 네.”
“이거, 이거. 만들어 주면 안 돼?”
“이걸요?”
“그래. 우리 카페 나무 의자만 있잖아. 딱딱해서 불편하다고 컴플레인이 얼마나 많은지. 딱히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게 딱이네.”
여사장이 고른 건 너무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도 폭신하게 디자인한 암체어였다.
등받이와 좌판, 팔걸이 부분까지 패브릭으로 감싸져 있어 소파처럼 편하게 착석할 수 있는 형태.
매장에 손님맞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디자인인데, 너무 밋밋하지 않나 싶어 샘플 제작을 보류하고 있었다.
심플한 컬러로 도장 마감된 카페 내부를 둘러 본 예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랑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안목이 좋으신데요.”
“호호호. 내가 좀 그런 편이지. 그래서 얼마면 될까?”
“다 교체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한 6개 정도 놓으면 될 것 같은데, 제작비가 개당 80만 원 정도니까, 480만 원?”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여사장이 딜을 시도했다.
“으~~ 450만 원에 어떻게 안 될까?”
“30만 원은 커피 서비스로 대신하시죠.”
“좋아!”
“어디 가서 그 가격에 사셨다고 하시면 절대 안 돼요. 실제 판매할 때는 그 2배 가격에는 팔 거거든요.”
“정말? 와! 그럼 나 횡재한 거네.”
여사장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주문제작이라, 결제는 선불로 부탁드려요.”
“그럼~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물건은 언제 받을 수 있어?”
“다음 주에 샘플부터 보여 드릴게요. 직접 앉아 보시고, 보완하실 부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오~ 완전 맞춤이네. 기대되는데.”
여사장이 카운터로 돌아가고, 예건은 자신의 디자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대적인 심플함을 첨가한 미려한디자인.
급진적인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오히려 이런 퓨전 스타일의 디자인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된다 생각하니, 어렴풋하던 형태가 순식간에 구체적인 형상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나뭇결이 아름답고 내구성이 뛰어난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곡선의 바디.
못질 없이 짜맞춤으로 가공된 다리와 팔걸이, 고급스러운 최고급 원단으로 마감된 좌판과 등받이.
그리고 등받이 후면에는 예건 만의 시그니처인 자연의 조각을 새길 생각이다.
전생의 디자인과는 결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기법으로.
무얼 만들지 결정되자,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일단 가구 공장부터 찾아봐야겠다.’
* * *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주말, 평소라면 손님으로 바빴을 가구 거리가 유독 한산하게 느껴졌다.
“하아- 오늘도 허탕인가?”
광주 가구 거리에서 원목 가구 매장을 운영하는 최필수 사장은 휑한 거리를 바라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북유럽 스타일의 조립식 가구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중국에서 만든 값싼 가구들이 인터넷으로 유통되며 한국에서 생산하는 가구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연초부터 신혼가구를 구입하러 오는 신혼부부들의 발길이 뜸해지더니, 이제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구경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문제작 가구를 주로 납품하던 최 사장의 가구 공장은 품질이 좋아 한때는 주말 저녁까지 반납하며 일을 해야 할 정도였으나.
점점 새로운 일거리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기를 벌써 3개월.
이런 상황이 계속 유지된다면, 매장뿐만 아니라 가구 공장을 운영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억지로라도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저가형 가구를 직접 제작해 파는 것도 고려했으나, 가구 퀄리티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고 눈높이를 강제로 낮추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공장을 접어야 하는 걸까?”
40년간 일해 오던 일터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속이 탔다.
매장을 나와 뒤편 공장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최 사장.
공장 앞에 웬 젊은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슈?”
“가구 공장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아무도 안 계시네요.”
“이 공장 사장? 난데. 무슨 일이슈?”
“아, 안녕하세요. 아르누보 갤러리 한예건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가 멋들어진 명함을 건넸다.
“아하~ 가구 디자이너구만. 들어오슈.”
간혹 소규모 가구점에서 제작 주문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대부분 품이 많이 가는 디자인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평소라면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가릴 형편이 되지 않았다.
최 사장은 곧바로 공장에 딸린 사무실로 향했다.
“어… 사장님. 혹시 공장을 먼저 둘러봐도 될까요?”
“공장을?”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했을 나이로 보이는 외모.
실무 경험은 전무해 보이는데 공장을 보겠다고 하니 의아했지만, 상대가 원하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머신이 많네요.”
“40년을 가구만 만들었으니, 웬만한 기계는 다 있을 거요. 대충 봤으면 들어갑시다.”
공장 구석구석을 눈여겨본 청년은 흡족한 모양인지, 고분고분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중앙의 탁자 앞에서 잠시 멈칫한 청년이 물었다.
“이 탁자도 여기 공장에서 만드신 건가요?”
“그렇지. 판매하려고 샘플로 만든 건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아서. 허허허.”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은 벨벳처럼 부드러웠고, 테이블 모서리며 다리 부분의 조각까지 꽤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었다.
“혹시 영국 황실 가구에서 영감을 받으신 건가요?”
“하하하. 역시 디자이너라 그런가? 한눈에 알아보는군.”
“흠… 세공 품질은 나쁘지 않은데, 디자인이 조금 애매해서 잘 팔리지 않았을 거예요. 특히나 이렇게 화려한 금장 무늬는 한국의 현대적인 건축물과 잘 어울리지 않거든요.”
최 사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은 이런 고품질의 물건도 만들 수 있다 과시하기 위해 만든 가구였기 때문이다.
한예건은 최필수 사장에게 자신이 가져온 도면을 건넸다.
디자인이 섬세하기로는 자신이 만든 테이블 못지않았고, 현대적인 세련미와 고급스러움까지 더해졌다.
흔하지 않은 디자인에 최 사장의 눈이 조금 커졌다.
“디자인에 신경 쓴 태가 많이 나는군. 제작이 쉽지는 않겠는데.”
“쉬운 디자인이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몇 개나 만들 생각이슈?”
“우선 한 개요. 패브릭은 제가 제공해 드릴 겁니다.”
“흠….”
최 사장이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자, 한예건이 먼저 제안했다.
“샘플 한 개의 제작비는 200만 원 드리죠.”
겨우 의자 샘플 제작에 200만 원이나?
시작부터 제작 단가를 깎으려는 일반적인 업체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최 사장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졌다.
“대신 제가 만족할 때까지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조건이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최 사장은 가구 품질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더 얹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뭐, 그런 조건이라면, 한번 해 보겠소.”
예건은 흡족한 얼굴로 계약서를 내밀었고, 내용을 확인한 최 사장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한예건이 돌아가고, 최 사장은 도면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도면을 파고들수록 가구의 형태가 보이고, 오랜만에 의욕이 샘솟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재밌어 보이는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