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55)
055화. 어떤 인연 (1)
자유낙하 하던 타일이 딱딱한 돌바닥에 떨어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어휴~ 저 비싼걸!”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마음에 안 드시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돌발적인 가우디의 행동에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타일공들.
조안 로메로도 그들 중 하나였다.
“놀랄 것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작업 방식이니까.”
가우디가 조각 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들어 올려 작업반장에게 주었다.
“이 정도 크기면 되겠군요. 나처럼 무식하게 떨어뜨려서 조각내실 건 아니죠?”
“하하하. 네. 방식은 고민해 보겠습니다.”
“좋네요. 일단 작업이 손에 익을 때까지 백색 타일만 들어가는 기둥 하단부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네. 샘플 작업 끝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작업반장이 허리를 숙이자, 가우디는 유유히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작업자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만들어 놓은 타일을 굳이 깨서 힘들게 붙여야 하나?”
“그러게 말이야. 타일로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니고.”
그 순간, 조안 로메로는 마치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완성되면… 스테인드글라스 같겠구나!”
성화로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 그 화려함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쩌면 못다 이룬 화가의 꿈을 이룰 기회가 아닐까?
조안은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살라 작업에 임했고, 그런 그의 노력은 그를 단번에 타일 작업자 중 에이스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의 능력이 가우디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조안이라고 했나?”
“네. 조안 로메로입니다.”
“자네가 배치한 타일 조각, 꽤 인상적이더군.”
“감사합니다.”
조안은 신이 났다.
즐거워서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건축 천재라 불리는 가우디가 자신을 알아봐 주었으니.
“자네는 내일부터 타일 작업은 하지 말게.”
“네?”
일을 잘 한다며 칭찬까지 해 놓고 타일 작업에서 빠지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이란 말인가.
당황한 조안의 표정을 읽었는지, 가우디가 허허 웃으며 부연했다.
“작업은 작업자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따로 할 일이 있네.”
“따로 할 일이라면…?”
가우디가 새롭게 제안한 일은 바로 타일 조각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작업자들의 미적 감각이 다들 달라 모두 똑같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 그러니 자네가 앞으로 나를 도와 저들이 작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게 어떻겠나?”
“그 말씀은?”
“내 조수가 되어 주게, 조안 로메로.”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왜? 싫은가?”
“아,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저 같은 게 감히 가우디 건축가님의 조수가 된다는 게 그저, 그저 너무 좋아서.”
가우디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자네 같은 전문가들이 없으면, 이 큰 사업을 어떻게 나 혼자 진행하겠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우디 님!”
천재라 칭송받는 그가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 그저 기뻤다.
“최선을 다 해 주게. 우리 함께 카탈루냐에 길이 남을 최고의 건축물을 만드는 거야.”
“네. 네! 건축가님!”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뿌예졌다.
그 순간 가우디의 모습이 마치 성당의 벽화를 장식하는 성자와 겹쳐 보였다.
이 순간, 가우디는 자신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진탕 속을 구르고 있는 자신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려준 존재.
* * *
길었던 하루를 끝내고 숙소로 들어온 예건은 오늘 두 눈에 담았던 풍경들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여전히 익숙하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거리, 건축, 사람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전에 확인하지 못했던 자신의 작품들이 여전히 건재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월의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지만.
예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접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느닷없이 벨이 울린다.
번호를 보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다시 번호를 확인하니, 스페인 국번으로 시작되는 번호다.
어쩌면 오늘 방문했던 타일 공방관계자가 연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Hola.(여보세요.)”
– 미스터 한, 맞습니까?
“네. 누구신가요?”
– 아, 오늘 낮에 방문하셨던 세라미카 로메로의 안토니입니다.
“오~ 안토니 씨.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 내일 오전에 매장에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 의뢰 주신 타일 제작 건으로 상의하고 싶은데요.
“물론이죠. 가능합니다.”
–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네.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예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많이 다급한 목소리였다.
“내일 가 보면 알겠지.”
* * *
“으으~ 죽겠다. 삭신이 다 쑤시네.”
차에서 내린 니콜이 기지개를 켜며 죽는소리를 했다.
“굳이 따라오실 필요 없다니까요.”
마뜩잖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얼른 따라붙으며 미소를 짓는 니콜.
“오늘은 업무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으로. 헤헤.”
그렇다.
오늘은 토요일.
그녀는 황금 같은 주말을 반납하고 끈질기게 나를 쫓고 있는 것이었다.
“고객 유치 방식이 대단히 고전적이시네요.”
“하하하. 고전만큼 확실한 것도 없죠. 그래서 피카소는 언제 찾으러 가실 거예요?”
“글쎄요. 그림을 찾는 것보다 일이 먼저니까?”
“뭐라고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니콜이 얼른 주변을 살피며 말을 낮췄다.
“하아~ 참.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네요. 어떻게 피카소가 뒷전일 수가 있지?”
“딱히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니까요.”
니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잘 그렸든 못 그렸든, 그 그림을 그린 게 피카소라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이름값이 얼마나 대단한지 예건 씨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러니까 더 찾기 싫어지는데요.”
“예에엑?”
고작 그림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일까지 내팽개치고 찾아야 할 정도라는 말인가!
냉랭해진 예건을 표정을 보고 더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니콜이 입을 꾹 닫았다.
끼익-.
낡은 나무문을 열자, 삐거덕 소리가 들렸다.
“Hola.”
예건을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가 얼른 다가와 문을 잡으며 둘을 반겼다.
“어제는 밤늦게 연락 드려 죄송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제 앉았던 테이블에 똑같이 자리한 두 사람.
하지만 안토니는 어제와 완전히 다른 태도로 둘을 대했다.
“계약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일단 세라믹 타일 샘플을 10종 만들고, 그 디자인이 만족스러우면 계약금을 드릴 예정입니다.”
예건이 준비해 온 계약서를 내밀었다.
“저희가 타일 구매용으로 마련한 예산은 총 2만5천 유로(3천 5백만 원)입니다. 그중 20%는 계약금으로, 작업 착수 시에 50%, 납품 완료 후 30%를 지급할 예정이고요.”
“그렇군요.”
예건이 통화로 느꼈던 초조함이 지금도 느껴졌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하지만 예건은 궁금증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았다.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이 타일은 저희 외에 다른 곳에 절대로 파실 수 없습니다. 그게 계약의 기본 조건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샘플만 통과하면 계약금의 20%를 먼저 지급하신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뭔가 고민하던 안토니가 결심한 듯 주먹을 굳게 쥐었다.
“월요일에 방문해 주시죠. 그때까지 샘플을 만들어 두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지요.”
공방을 나와 차로 가는 동안 예건이 아무런 말이 없자, 니콜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요?”
“글쎄요.”
“설마…. 먹튀 그런 건 아니겠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하긴 사기 치기 딱 좋게 생기기는 했죠. 급한 건 우리니까.”
사기라….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배후가 크리스티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황하는 쪽은 공방 쪽일 터.
크리스티앙이 계약금만 먹고 튄 사기꾼을 가만히 두지는 않을 테니까.
‘사기는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초면에 개인적인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이거 참 난감하네.
“그런데 이제 뭐 할 거예요?”
니콜이 은근한 표정으로 예건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 액정의 이름을 잠시 노려보던 니콜.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상대는 그녀가 받을 때까지 기다릴 모양인지 끈질기게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만요.”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전화를 받은 니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이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니콜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원성취하셨네요.”
“네? 그게 무슨….”
“저 곧바로 프랑스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예건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본 니콜이 분한 얼굴로 다짐을 강요했다.
“피카소 그림 찾고는 무조건 나한테 제일 먼저 와야 해요.”
“찾거든 생각해 볼게요.”
“으~ 내가 이래서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한 건데.”
결국, 니콜은 예건을 시내에 내려주고는 곧장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으휴, 주말도 없는 내 신세.”
그래 봐야 예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겠지만.
“중요한 거 아니기만 해 봐라.”
니콜은 자신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곱씹으며 아쉬움에 바르셀로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눈이 시리도록 맑은 날이었다.
* * *
드디어 혼자가 된 예건은 이제는 구엘 공원으로 더 유명해진 구엘 전원주택단지로 향했다.
이곳은 가우디의 역작이 탄생한 장소이면서도, 아픈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 만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하셨던 아버지.
이제 겨우 제대로 아들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놓았을 때 비어 버린 자리의 허전함은 너무도 컸다.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기둥 하나가 무너져 위태롭게 형상만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 같던 가우디에게 먼저 손길을 내민 작은 손 하나.
그게 바로 이웃집 꼬마, 마르크 페레아였다.
저멀리 구엘공원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건은 불안한 눈길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꼬마가 살던 허름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구엘 공원이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이 드나들자, 그 주변의 낡은 집들을 모두 정비한 모양이다.
“100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지.”
그래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니.
어쩌면 무너진 폐건물들의 잔재와 함께 피카소의 그림도 파괴되었을지 모르겠다.
보존 가치와 가치 없음은 그 경계가 어디일까?
결국,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누군가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작가의 작품을 찾아 헤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사라진 추억을 찾아 헤맨다.
결국, 이것도 자신이 환생했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감 중 하나일 뿐.
그렇다고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신을 욕할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감사해야만 한다.
과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에.
파괴는 탄생을 위한 시작이니.
그가 전생에 그토록 많은 타일을 깨부쉈던 것도 어쩌면 지금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한 걸음이었으리라.
가치 없다 여겨져 파괴된 낡은 건축물과 현재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피카소의 작품이 함께 소실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먹먹하던 가슴이 되레 후련해졌다.
“이거 보게. 내가 뭐라 그랬나. 어차피 그림은 오래 못 간다니까.”
예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