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58)
058화. 시그니처 (1)
“아! 복지사님. 네. 정말요? 지금 바로 갈게요.”
마침 누군가 타고 온 택시가 보였다.
예건은 부리나케 달려가 택시를 잡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사회복지사는 자신이 확인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부양 가족에게 폭력 등의 피해를 입은 경우, 해당 가족에 대해 접근 금지 조치를 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더 좋은 건, 요양병원으로 가시는 건데…. 치매 저소득자를 위한 요양병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대기 인원이 많아서 말이죠. 당장 옮기기는 힘들어요.”
“비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그림, 찾았거든요.”
“뭐? 정말? 그게 있었어요?”
“네. 하하.”
예건이 곤란해 한다는 것을 안 사회복지사는 더는 구체적으로 물어오지 않았다.
“병원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곧장 입원할 수 있게 조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회복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아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약속했거든요.”
“뭘?”
“마르크 씨가 목숨처럼 지켰던 그림, 저도 지켜드리겠다고.”
“아….”
사회복지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그림인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그림일 거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월세가 밀렸다고 했죠? 짐도 옮겨야 하니까, 내야 할 금액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얘기를 청년이 왜 나한테 해요, 내가 할 말인데. 그럼, 잘 부탁드려요.”
“네.”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는 나머지 일 처리를 위해 돌아갔다.
남이나 다름없는 이웃도 저렇게 걱정해 주는데, 손자라는 놈이 돈 때문에 제 할아버지를 구타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예건은 어떻게든 그 손자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고야 말겠다 결심했다.
병실로 들어가니, 마르크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보였다.
“마르크 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 한. 괜찮아요. 괜찮아.”
예건이 그의 무릎 위에 그림을 올려주었다.
“그림을 찾았습니다.”
“아아~ 그림….”
마르크는 한동안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그림이 세상의 빛을 보기는 힘들겠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성이 앞으로 25년은 더 걸릴 것 같다고….”
“그렇군요.”
복잡한 마음으로 그림을 내려다본 마르크가 말했다.
“청년이 나 대신 보여줄 수 있겠소?”
“제가요?”
“하하. 그래. 아무래도 당신이 산 조르디가 내게 보낸 구원자인 것 같아서요.”
예건은 자신의 오랜 벗에게 가우디가 돌아왔노라고 전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오랜 짐을 지워버린 것은 전생의 자신이었으니.
“그림은 제가 책임지고, 잘 보관하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합니다.”
“대신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예건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눈이 흐릿해서 글을 읽을 수가 없군요.”
“제가 마르크 님의 보호자가 되겠다는 증서입니다.”
“네?”
법적 효력 여부 따위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안전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주는 것.
지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림의 가격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건 이 비루한 목숨을 살려 주신 거로 드린 겁니다.”
“아닙니다. 제가 해드린 것에 비하면 대가가 너무 큽니다. 어서요.”
예건은 펜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사인을 부탁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사인하는 마르크의 손이 떨렸다.
삐뚤삐뚤한 서명을 마치고, 마르크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예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죠.”
툭.
종이 위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때는 이런 종이가 아니라 손도장이었지만.”
고개를 든 마르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빠 없는 저에게 가우디 님께서 직접 보호자가 되어 주시겠노라, 약속하셨답니다.”
정말 행복한 얼굴이었다.
예건은 마르크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목구멍까지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브루노의 말대로, 크리스티앙이란 배경은 확실히 든든했다.
예건은 니콜의 도움을 얻어 산 파우 병원 부속 요양원의 특실을 구할 수 있었다.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마르크 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비용은 모두 마르크 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거니까요.”
“그림….”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마르크가 다시금 다짐을 받듯 물었다.
“정말… 약속은 지켜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안토니 가우디님의 유지에 따라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되는 날, 그림을 공개할 겁니다.”
“하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마르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리오 녀석이 찾아서 팔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나저나 이곳 정말 좋은 곳이군요.”
그의 병실 창 밖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왜 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을 추천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르크가 자신의 특별한 친구와의 추억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람이었을 거다.
“이 병원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한 관광지라던데, 이전에 한 번도 안 와 보셨습니까?”
“하하. 네. 입에 풀칠하기에도 벅차서 말입니다.”
“그러셨군요.”
‘말해 줄 걸 그랬나? 피카소의 그림이라고.’
그랬다면, 이 고생을 하며 살지 않았을 텐데.
바보같이 미련한 오랜 친구를 보며, 예건이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그림을 보셔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 그림은 매우 특별합니다.”
“특별하다고요?”
“네. 피카소가 젊었던 시절의 그림이거든요.”
“아… 알고 계셨습니까?”
진짜 미련 곰탱이었잖아!
그걸 알면서도 여태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예건은 속으로 기함을 했다.
“껄껄껄. 설마 제가 모르고 그 그림을 지켰겠습니까?”
“아니, 왜?”
“이해가 안 가시는 모양이군요.”
“네! 당연하죠. 공개만 하면, 엄청난 부귀영화가 따르는데.”
“부귀영화라….”
후련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마르크.
“그거 아십니까? 가우디 건축가님이 엄청난 부자셨던 거?”
“뭐, 듣기는 했습니다.”
“저도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전 재산을 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짓는 데 쓰셨다고 하더군요.”
마르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며 그림을 선물하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압니다. 하지만….”
마르크의 눈가가 발갛게 젖어 들었다.
“적어도 그분께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났을 때 자신 있게 앞에 서고 싶었어요.”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비록… 손자 교육은 망쳤지만, 그림만은… 그림만은 온전히…. 흑.”
마르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손자분도 마르크 님의 뜻을 깨우칠 겁니다.”
“흑흑. 그럴까요?”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예건은 마르크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기필코. 기필코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어 주겠노라 결심하며.
* * *
“아이~ 시팔! 집도 이사 가고, 이놈의 영감탱이는 어디로 튄 거야?”
“왜? 돈줄 도망갔어?”
실오라기 같은 속옷에 가운만 대충 걸친 여자가 껌을 쫙쫙 씹으며 마리오를 안았다.
“가우디 그림은?”
“몰라, 영감탱이가 도대체 어디 숨긴 건지.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뭐? 그럼 우리 계획은?”
마리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계획? 이 상황에 한가롭게 여행이나 가자는 말이 나와?”
“그럼 어떡해? 나 수영복도 벌써 다 사 놨단 말이야.”
여자가 짜증 나는 듯 마리오를 확 밀치며 떨어졌다.
찌잉-
현관문 벨 소리가 울리고, 여자가 가운을 여미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현관문에 대고 말했다.
“누구세요?”
“택배 왔습니다.”
“택배요? 올 게 없는데?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리다 문을 연 여자는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어디 보자…. 보내는 사람이 마르크? 이거 너한테 왔는데?”
“뭐?”
뺏듯이 택배를 가져간 마리오가 다급하게 포장을 풀어헤쳤다.
상자 안에는 A3용지 크기 정도의 납작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포장이 꽤 낡은 게, 적어도 50년은 넘게 보관되었던 것 같았다.
꿀꺽.
마리오가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침실로 들어가려던 여자가 얼른 마리오의 옆에 붙어 앉았다.
“설마, 이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서 풀어 봐. 어서~.”
마리오가 떨리는 손으로 포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림을 집어 들자, 작은 메모지 하나가 톡 떨어졌다.
[마리오, 아무래도 이 할애비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마지막으로 네가 그렇게 원했던 가우디의 그림을 보낸다. 앞으로 너의 길에 행복만 가득하기를 바라며.사랑하는 마리오에게, 너의 할아버지가.]
“끼야악!”
“미.쳤.다! 정말.”
마리오와 여자친구는 아파트가 떠나가라 기쁨의 환호를 내질렀다.
* * *
가우디 연구실.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내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장소를 물색하던 리오는 한 피드에서 멈췄다.
해변에 장미꽃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뭔데 이래?”
다음 이미지로 넘기려는데, 뒤에서 그의 어깨를 짚고 누군가 물었다.
“장미꽃 사려고?”
“어? 아니, 데이트 장소 찾는 중이었어.”
“근데 이건 뭐야? 바르셀로네타 해변? 왜 해변에 장미꽃을 버렸어?”
“글쎄. 나도 모르겠네. 새로운 유행인가?”
리오가 무심하게 화면을 넘겼다.
그도 궁금한 터였다.
다음 이미지에는 누군가 모래 위에 그려 놓은 그림이 있었다.
거대한 용이 사람들을 향해 독을 내뿜는 그림이었다.
“아~ 산 조르디의 한 장면을 그린 건가? 음? 근데 그냥 평면이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는 유명한 모래 조각가가 한 명 있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유명한 건 아니고, 워낙 해변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작가였기에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
그는 3차원 형태의 입체적인 모래 조각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보고 있는 사진처럼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리오가 사진을 넘겼다.
양을 바치는 사람들, 마차를 타고 두려움에 떠는 공주, 갑자기 나타난 백마 탄 왕자.
“와! 디테일이 장난 아니네. 이걸 모래에 그렸다고? 왠지 아깝다.”
“그러게. 도대체 누굴까?”
궁금증이 점점 커지던 두 사람은 마지막 악룡을 끌고 가는 기사의 사진을 보고 동시에 외쳤다.
“맞지?”
“이거 가우디?”
리오가 얼른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의 귀퉁이.
거기에 가우디의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몇 달 전 모금함에 놓여 있었던 스케치북.
그곳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시그니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날씨가 흐려졌다.
비구름이라도 몰려오는 걸까?
차를 타고 가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괜히 조급해졌다.
“아직 있을까?”
사무엘이 물었다.
“글쎄…. 뉴스타에 비슷한 사진 찾아보니까, 며칠 전에 올라온 것도 있는데.”
“으으으~ 또 놓치는 건 아니겠지?”
“그림 그리는 걸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본 사람이라도 찾아야지.”
두 사람이 이렇게 조급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모금함에서 스케치북이 발견된 이후.
가우디 연구소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림 실력도 대단하지만,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은 존재하지도 않는 영광의 문을 그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주변의 모든 CCTV 기록을 뒤지며 스케치북의 주인을 찾았지만, 하루에도 수만 명의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스케치의 주인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모금함 쪽 CCTV만 고장 나지 않았어도. 벌써 찾았을 텐데.”
“그러게. 이상하지? 왜 딱 그날만 정보가 없는 걸까?”
갑자기 리오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진짜 가우디 님의 영혼이 그려 놓고 가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