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59)
059화. 시그니처 (2)
리오의 혼잣말에 사무엘이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상상력도 좋다니까.”
“아니, 그렇잖아. 스케치 연구원인 네가 깜짝 놀랄 정도였잖아. 필체가 너무 똑같아서!”
“…….”
사무엘이 잠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안 나타나면 좋겠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스케치대로 만들 수도 있는 거 아냐?”
“아….”
그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리오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구나. 만약 그림의 주인이 카탈루냐 사람이 아니면.”
“무시하겠지. 뻔하잖냐. 윗사람들 고리타분한 거.”
이내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해변에 도착하고, 둘은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로 향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한 크기의 모래 그림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섬세한 표현에 시선을 빼앗긴 리오의 옷자락을 끌며, 사무엘이 말했다.
“사인 먼저 확인하자.”
“어? 그, 그래.”
아쉬운 얼굴로 사무엘을 따라 그림의 가장 바깥쪽으로 향하는 리오.
“아이고, 저런.”
사람들이 많이 몰렸기 때문인지, 사인은 이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걸 만든 사람이라도 찾는 수밖에.”
투둑.
리오의 콧잔등 위로 찬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 온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굵어졌다.
혹시 그림을 그린 사람을 본 적 없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사람들.
리오는 젖어 가는 그림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마지막 관람객이 되어버렸네.”
“그러게.”
점점 흐릿해지는 그림을 보며 리오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허무하다.”
“너무 의미부여는 하지 마. 어차피 알고 있었겠지.”
“응? 뭘?”
“이걸 그린 사람도. 이렇게 비 한 번, 바람 한 자락에 지워질 줄 알고 있었을 거라고.”
“그래. 그렇겠구나.”
굵어진 빗방울과 함께 모래 위 그림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직 수북이 쌓인 장미꽃만이 찰나의 영광을 남겨 놓았다.
리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흔적을 배경으로 이제는 무덤이 되어버린 장미꽃 더미를 촬영해 뉴스타에 올렸다.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더 기억되기를 바라며.
#바르셀로네타 #해변 #산 조르디의 날 #모래 위 그림 #흔적 #장미 #꽃무덤
띠링-
띠링-
– ?? 저거 뭔데?
└ 누군가 모래에 산 조르디 전설을 그려뒀었음
└ #바로셀로네타 #샌드아트 검색해 보셈
– 비 때문에… 결국 지워졌구나. 아쉽네.
– ㅠㅠ 오늘 보러 가려고 했는데
└ 나도 나도
휴대폰의 알람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댓글.
“또다시… 나타날까?”
“…글쎄.”
산 조르디의 날에 맞춰 홀연히 나타난 구원의 기사는 그 목적을 완벽히 완수하고,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조용히 사라졌다.
* * *
세라미카 로메로.
테이블에 올려진 10개의 타일 조각을 확인한 예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좋군요.”
“그럼, 테스트는 통과한 겁니까?”
조마조마하던 안토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그렇습니다. 한 달 내에 수량은 맞춰 주실 수 있는 거죠?”
“무조건 맞춰야죠.”
“통장 사본 메일로 보내 주시면, 계약금은 오늘 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착수금은 계약서 완성되는 대로 입금해 드리는 거로 하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한 건 접니다. 주말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맨날 하는 일인데요. 뭐.”
“이 샘플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품질 확인 차.”
“물론입니다. 충분히 만들어 뒀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안토니가 얼른 편지 봉투를 가져와 샘플을 담아 건넸다.
샘플을 가방에 넣은 예건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왜 갑자기 저희 제안을 승낙하신 겁니까?”
“아… 그거요?”
안토니가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실은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사정이요?”
“네.”
안토니가 잠시 망설였다.
괜히 말했다가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아, 곤란하신 거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안토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속이고 계약하는 게 오히려 나쁜 거죠.”
안토니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미스터 한이 제안한 조건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공방을 올해까지만 운영할 생각이거든요.”
“네? 아니, 왜요?”
안토니는 쓸쓸한 표정으로 공방을 돌아봤다.
“수공예 타일의 수요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습니다. 수익성 적은 소규모 공방을 오랜 기간 운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새로운 거래처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요.”
“아….”
“그렇다고 공방이 운영되는 동안은 물건을 대충 만들지는 않습니다. 요구하신 물량 납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안토니가 예건을 안심시키려 일부러 더 호기롭게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더 짠해 보였다.
“부탁하신 계약 관련 서류는 곧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마무리 잘 부탁드립니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젓는 그를 향해 웃어 주고는 가게를 나섰다.
만족스러운 타일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아쉬움도 깊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니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기술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대체재는 만들어진다.
그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건은 휴대폰을 꺼내 브루노에게 연락을 취했다.
“안녕하세요, 브루노 씨. 타일 업체는 결정했습니다. 메일로 업체 관련 내용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계약금은 오늘 중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내일은 사무실로 출근할 겁니다.”
예건은 그렇게 바르셀로나 일정을 일단락 짓고, 곧장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크리스티앙 바르셀로나 지사 문을 열고 안내 데스크로 향하는 한 남녀.
최대한 갖춰 입는다고 노력은 했으나, 싼 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예리한 눈의 안내 직원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둘을 훑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고 곤살레스 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약속은 하셨나요?”
약속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인가?
당황한 남자가 곁의 여자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여자가 눈치 좋게 얼른 남자의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마르크의 편지와 함께 들어 있던 명함이었다.
“여기, 명함 받은 게 있어요.”
명함을 확인한 데스크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라고 전해 드릴까요?”
“마리… 아니 마르크 페레아요.”
데스크 직원이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눌렀다.
잠시 통화를 끝낸 직원은 두 사람을 화려한 미팅룸으로 안내했다.
직원이 나가고 안절부절못하며 심호흡을 하던 마리오가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진짜겠지?”
“네 할아버지한테 들었다며? 가우디가 직접 준 그림이라고.”
“그렇긴 한데… 이 그림. 아무리 생각해도 60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너무 깨끗하잖아.”
“계속 봉인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가?
마리오는 여자친구의 말에 쉽게 동의했다.
“크리스티앙 담당자 명함까지 함께 보냈을 정도면 진짜 아닐까?”
“하긴…. 영감이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둘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크리스티앙 경매장에 대해 대충 조사를 마쳤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조만간 1880년에 그려진 폴 세잔의 그림이 크리스티앙의 경매장에 오를 거라고 세간이 떠들썩했다.
최소 낙찰 예상액 3천만 달러(약 400억 원).
가우디가 화가는 아니지만,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진품임이 확실하다면, 아무리 못해도 100만 달러는 벌 수 있지 않을까?
그거면 한동안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지.
마리오의 머릿속에 몰타의 해변 풍경이 그려졌다.
선베드에 누워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상상을 하니,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다.
기분이 좋아져 히죽거리고 있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지위가 꽤 높아 보이는 남성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수석감정사 우고 곤잘레스입니다.”
“아… 네.”
우고가 손을 내밀기에 악수를 청하는 줄 알고 얼른 일어서서 손을 내미는 마리오.
“그림 먼저 보여주시죠.”
“아! 하하. 네.”
머쓱해진 마리오가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그림을 건넸다.
‘되게 까칠하네.’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진품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
마리오는 최대한 성격을 죽이고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낡은 겉 포장을 확인한 상대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졌다.
포장을 조심스럽게 펼친 후, 잠잠하던 그의 눈길이 바빠졌다.
‘진짜… 인 건가?’
표정만으로는 상대의 의중을 확신할 수 없었던 마리오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진짜 맞죠?”
“가우디의 그림, 이걸 어떻게 구하신 거죠?”
“가우디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줬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께 직접 받았고요.”
“그래요? 확실합니까?”
“당연히 확실하죠! 그래서 진품이 맞는 겁니까?”
“확실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군요.”
그의 대답에 마리오가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꺄! 그럼 우리 이제 부자 되는 거야?”
마리오와 여자친구가 서로 부둥켜안으며 좋아하는 동안 우고 곤잘레스는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 둘이 회의실로 들어와 둘의 주변에 다가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마리오가 여자친구를 감싸며 우고를 향해 항의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그건 내가 물을 질문인데. 위조는 범죄행위라는 거 모르나?”
“위조라니? 그건 분명히 할아버지가 가우디에게 받은 그림이라니까!”
우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사기를 치려면 뭘 좀 알고 쳐야지. 캔버스 제작 날짜가 떡하니 1997년으로 찍힌 게 안 보이나?”
“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마리오의 얼굴에 낭패감이 돌았다.
“이 사람들 경찰에 넘기세요.”
“넵!”
“꺄악! 마리오. 어떻게 좀 해 봐!”
“이거 안 놔? 당신들 큰 잘못 하는 거야!”
마리오가 험악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았으나, 보안요원들의 막강한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우고의 눈길이 다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전경을 담은 캔버스로 향했다.
“그림도. 사인도… 진짜 같네. 복제 솜씨가 장난 아닌데.”
당연히 가우디의 그림일 리 없었다.
앞서 마리오에게 말했듯 캔버스는 1997년 제작된 것이고, 가우디는 스케치를 위해 주로 사용한 건 종이와 만년필이다.
우고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마담 르네, 말씀하신 대로 조치했습니다. 마리오라는 사람은 최소 징역 6개월은 살게 될 겁니다.”
– 그래요. 수고했어요.
“그림은 어떻게 할까요?”
– 경찰 조사 끝나면, 회수해서 보관하고 있어요.
우고는 의아했다.
“파기하지 않고요?”
– 주인에게 돌려줘야죠.
“…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예건 스스로 위조한 가우디의 그림은 우여곡절 끝에 마르크에게 돌아가 그의 침실 벽을 장식하게 되었다.
* * *
화창한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5월의 어느 날.
프랑스 유명 일간지 르 몽드에 기사 하나가 파란을 일으켰다.
아르누보라는 이름을 파리 대중에 널리 알린 컬렉터이자, 수많은 예술가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지그프리드 빙의 컬렉션 500여 점이 그가 마지막 머물렀던 별장, 샤또 메종 발루아에서 전시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중 300여 점은 크리스티앙 특별 경매에 출품될 예정이라는 것도.
기사에서 언급한 작품의 작가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그 이름을 알린 예술가들이었다.
게다가 지그프리드 빙의 개인 의뢰품이자 세상에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미공개 작품까지 있다는 정보가 예술 애호가들의 구미를 더욱 당겼다.
자연히 발루아 특별 경매에 관한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그 소식은 현장 관리에 여념이 없는 예건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니콜이 특별 경매 관련된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매주 일정한 시간에 발루아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니콜의 잦은 방문을 의아하게 생각한 브루노가 예건에게 물었다.
“원래 니콜 바르도 수석감정사가 직접 현장에 들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왜 이렇게 자주 들르는 거래?”
“특별 경매 때문에요.”
“뭐, 그거라면 매일 현장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있잖은가? 공정표도 같이 보내는 거로 알고 있는데.”
“현장 상황이 궁금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그럼?”
“저한테 보고하러 오는 겁니다.”
“보고?”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곧 그와 관련된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기도 했고.
“이번 발루아 특별 경매, 작품 출품자가 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