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6)
006화. 환영의 샘 (2)
한참 판넬 조각 자르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지나가다 신기한 듯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김 대리가 넌지시 물었다.
“예건 씨, 옷 안 답답해?”
“아? 이 양복 말입니까?”
“그래. 되게 불편해 보여서.”
지난 주말, 함께 옷을 사러 갔던 어머니도 하필이면 이렇게 격식 차린 옷을 골라야겠냐고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예건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컬러에 힘을 준 흰색 긴 팔 셔츠, 화려한 패턴이 돋보이는 클래식한 베스트, 재킷과 색을 맞춘 짙은 그레이 컬러의 실키한 양복바지.
그리고 스카프처럼 넓은 넥타이.
인턴으로 입사한 첫날은 대부분 비슷한 차림을 하고 왔길래 딱히 특이해 보이지 않았는데.
모형실 직원들을 둘러보니 다들 편안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제야 위화감을 느낀 예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형실에서는 고객을 만날 일은 없습니까?”
“고객?”
“건축주요.”
“아…. 하하하. 모형실에서 건축주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래도 건축주가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중요한 미팅 자리에 불려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나 있는 3년 동안 한 번도 없었어.”
김 대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예건은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평범하다 못해 편안한 차림새가 이해되는 바였다.
“그럼, 건축주는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예건의 물음에 김 대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설계실 이사 직급, 아무리 빨라도 차장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차장급이 되려면 몇 년이나 근무해야 합니까?”
“8년 정도일까?”
김 대리의 대답에 예건의 눈에 낭패감이 돌았다.
예건은 전생의 초보 건축가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검증 받지 못한 초보 건축가에게 그 누구도 일을 주려 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건축주를 만나기 위해 귀족처럼 옷을 갖춰 입고, 부자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에 열심히 다녔었다.
그 기간이 약 1년 정도였나?
사교 모임을 드나들며 친해진 상점주 한 명이 자신이 운영하던 작은 상가 리뉴얼을 맡겼다.
그렇게 가우디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꾸민 건물을 보고 나서야 돈 있는 건축주들이 의뢰해 오기 시작했다.
그가 전성기를 달리던 젊은 건축가 시절에는 최고 재력의 귀족들과 분위기 좋은 바에서 술을 마시고,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허약한 몸이 더는 독한 술을 견디지 못했을 때 즈음, 다행히 그의 실력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였으나, 가끔 그때의 향락을 즐거운 추억처럼 떠올리곤 했던 그였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충동적으로 귀티나는 의복을 고르기는 했지만,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예건은 자신의 차림새에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는데.
“많이 이상한가요?”
김 대리가 예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답했다.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뭐랄까…. 스타일이 너무 고전적인 거 같기도 하고.”
돌려서 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요.”
“뭐, 본인이 좋다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예건이 눈에 불을 뿜으며 단호하게 답했다.
김 대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예건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옷차림 따위보다 당분간 고객을 직접 대면할 일이 없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이래서야 언제 세계 최고 건축가가 되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낭패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예건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 대리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저렇게 마음 상할 줄은 몰랐는데, 그냥 잘 어울린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 * *
가우디의 조수 로렌소가 물었다.
“가우디 님, 조수를 한 명 더 들이는 게 어떨까요? 조각가들에게 도면을 전달하는 일정이 자꾸 늦어져서 업무 진척이 늦습니다.”
로렌소의 물음에 천장에 매달린 모래 자루를 보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구조를 검토하고 있던 가우디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조수를? 카탈루냐인 중에 적당한 자가 있던가?”
“실력 하나만은 제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비록 카탈루냐인은 아니지만….”
머뭇거리는 로렌소의 대답에 가우디는 단칼에 거절했다.
“일 없네.”
“하지만 가우디 님!”
“로렌소,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건축은 우리 카탈루냐인들의 숙원이자, 염원일세. 같은 민족이 아닌 이들이 어떻게 성가정성당의 건축 의의를 알 것이며, 어떤 마음으로 이 고된 작업에 임하겠나?
우리 일은 단순히 돈을 벌고자 하는 게 아니야. 카탈루냐인의 삶을 구원하기 위한 고난의 여정이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하지만 가우디 님. 이제 저도 나이가 있는 데다 건강도 예전만 못합니다. 언제까지 건축가님의 조수로 일할 수 있을지…. 지금 배우고 있는 어린 조수들은 가우디 님의 뜻을 잇기에 그들의 실력은 너무 부족하고요.”
“로렌소!”
가우디가 들고 있던 펜과 종이를 놓고 돌아섰다.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려던 가우디는 어느새 새하얗게 새어버린 로렌소의 머리칼을 안쓰럽게 느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저들이면 충분하네. 실력이 부족하면 쌓으면 될 일이지. 나 또한 저들과 같은 나이에 구엘 저택을 완성하지 않았나?”
“모두가 가우디 님처럼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 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렌소의 대답에는 분명 뼈가 있었으나, 가우디는 그의 말에 조소했다.
“영감은 신이 내리는 것이네. 난 그저 신의 뜻을 종이에 옮기는 것뿐이야.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걸 보지 못하는 것은 저들의 마음에 올바른 신앙이 아직 없기 때문일세.”
자신의 조수 로렌소의 늙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피부병이 점점 깊어져 안쓰러운 몰골이 된 로렌소는 이제 가우디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일 정도였다.
“로렌소, 나의 반려여.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네. 하지만.”
가우디가 슬픈 눈으로 로렌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결국 완성될 걸세. 몇 세기가 지난다 하더라도. 그건 카탈루냐의 의지이고 역사이니.
그러니 나를 믿게. 자네에게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네. 우리의 젊은 조수들도 곧 신의 뜻을 이해할 거고. 이 일은 우리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역사는 이어져야 하는 것일세.”
가우디는 전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렌소도 하는 수 없이 말을 아꼈다.
가우디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으니.
‘불쌍한 가우디. 신에게 스스로를 바친 미친 건축가여.’
로렌소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삭였다.
‘당신의 그 고집을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 거외다.’
* * *
‘제길!’
왜 하필 이 먼 타국 한국인으로 태어난 거냐?
스페인인, 아니 유럽 출신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비벼보는 건데.
답답해진 마음을 달래려 옥상으로 올라온 예건은 고집불통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그때 로렌소의 말을 듣고, 외지인을 들였더라면…. 가우디의 뜻을 이은 천재적인 동양인을 들이는데 저들도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거늘.’
하지만 어찌하리.
가우디의 뜻을 이은 성가정성당의 조수들은 아직도 카탈루냐인을 건축가로 들이는 전통을 깨지 않았고, 이제 겨우 사회 초년생에 동양인인 자신이 아무리 발악을 한다고 해도 저들은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가우디의 환생이라 공표하고, 저들에게 접근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가톨릭이 어떤 종교인가?
철저한 정신 무장으로 수백 년 동안 신의 뜻을 지켜온 종교가 아니던가?
저들은 환생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전생의 가우디임을 밝힌다 해도, 오히려 사탄이라며 배척당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남은 방법은 가우디를 뛰어넘는 천재 건축가로 성공하여 저들에게 가우디의 뒤를 이어 최고의 건축물을 완성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접근하는 방법뿐.
‘나의 환생이 그저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 비록 지금은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이지만, 언젠가 분명 기회가 올 거야. 기회가 올 때 잡을 수 있는 실력을 먼저 길러야 해.’
실력은 곧 능력이다.
노력하는 자의 실력은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생의 숱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한낱 인턴일 뿐이지만,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면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면 되는 거야.”
다시 사는 인생.
전생부터 쌓아온 건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현재라고 통하지 않을 리 없다.
과거의 자신도 다른 이들과 차별화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카탈루냐의 자연과 전통적 건축 양식을 파고들었던 것이 아닌가?
예건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한낮에도 꽉 막힌 강남대로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저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명만 내 가치를 알아봐 주면 되는 거야.”
물론 그 대상이 구엘처럼 엄청난 부자여야 되겠지만.
영혼의 단짝을 만나는 그날까지, 예건은 절대로 지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 * *
“하하. 가우디라.”
왜 하필 가우디란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떠맡은 박노훈 이사는 결국 연초부터 끊어왔던 담배를 들고 흡연공간으로 향했다.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는 환영의 샘.
거기다 천재 건축가라고 불리는 거장 가우디까지.
머릿속을 부유하는 기호들과 이미지들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
뿌연 안개 숲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담배 연기구나.
흡연공간인 테라스를 자신보다 먼저 차지한 이가 있었다.
“어? 주효섭 과장?”
“아? 박 이사님. 담배 끊으신 것 아니었어요?”
“하아-. 끊었지. 끊었는데…. 오늘은 정말 안 피고는 못 참겠다.”
“에? 6개월이나 참으신 거 아니에요?”
“그래. 6개월 만이네.”
포장도 뜯지 않은 담뱃갑을 내려다보며 박노훈은 고민에 휩싸였다.
지난 6개월, 금연을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해 왔던가.
치유의 건축을 하겠다는 사람이 정작 창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육체를 더럽히는 행위를 하려 한다는 생각을 하니, 이 모순적인 순간이 블랙 코미디처럼 우스웠다.
찌익.
포장지를 벗기고 담배를 꺼내려는 찰나.
주효섭이 위엄 가득한 얼굴로 그의 손을 저지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죠.”
“담배 피우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매일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왜 갑자기 피고 싶은 건데요? 이유나 말씀해 보세요.”
주 과장이 절반 정도 피던 담배를 짓이겨 꺼트리고 박 이사의 새 담뱃갑을 뺏어 들었다.
“이유가 합당하면 드릴게요.”
“하아-.”
박노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형은 어때?”
“완성된 거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걸요.”
“후후, 짜식. 설레발은.”
박 이사의 걱정이 현재 공모전 프로젝트 때문이라는 것을 빠르게 캐치한 효섭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어지는 박 이사의 말을 경청했다.
혼자 끙끙 앓던 고민을 털어놓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환영의 샘 계획도 미진한데, 갑자기 가우디를 어디서 데려오냐? 이러다 둘 다 놓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설계 작업은 이미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고 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더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 고자 노력하는 박노훈 이사를 보고 있자니, 주 과장은 부러움과 동시에 심통이 났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
그건 자신에게 없는 능력이었으니.
“이사님, 제가 왜 다들 기피하는 모형실로 왔는지 아세요?”
“뜬금없긴. 너 예전부터 모형 만드는 거 좋아했잖아. 그래서 간 거 아니었어?”
“하하하. 좋아하죠. 좋아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응? 그게 다가 아냐?”
주효섭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지더니, 악몽이라도 떠올리는 것처럼 파리하게 굳어갔다.
“제가 설계실에서 근무할 때요. 과장이 된 후에 처음으로 단독 프로젝트를 맡았었거든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