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61)
061화. 시그니처 (4)
둔탁한 형태의 석재 캐노피(현관 상부 벽에 매달아 비나 눈 등을 막을 수 있게 만든 덮개)와 난간이 사라진 자리.
현관과 발코니를 장식하는 철물들을 고정시킬 앙카들이 석재 벽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금속 작업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예건의 뒤로 브루노와 리노 레오 건축 소장이 다가섰다.
“외관의 탈바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군.”
“네. 금속 작업자들이 잘 따라와 주고 있어서 일정 안에 작업이 끝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리노 소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떤?”
“타일 작업 말입니다.”
“타일요?”
타일이라면, 지난주 1차 입고가 완료되었다.
제품의 품질도 이미 다 확인한 상황,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는데.
“낱개의 타일을 디자인대로 부착하는 게 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더라고요.”
“저런….”
잊고 있었다.
모자이크 숙련공이 아닌 사람이 디자인 형태에 따라 배치하고 부착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최근 건축 현장에 적용하는 타일들은 대부분 사각형 타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50ⅹ20㎜의 나뭇잎 모양의 이형 타일, 게다가 디자인이 제각각인 패턴을 한 사람이 작업한 것처럼 고르게 시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역시… 작업을 도와줄 조수가 한 명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전생에 자신을 대신해 타일 패턴디자인을 해 주던 게 바로 조안 로메로였다.
어쩌면 그의 후손인 안토니 로메로라면,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죠.”
“부탁드립니다.”
그의 대답에 안도하는 리노 소장.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검토 부탁드립니다.”
“네. 그러죠.”
예건은 곧바로 개인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는 창고로 돌아가 안토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현장 상황을 설명하고 방법이 없는지 물었으나, 안토니는 곤란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모자이크 타일로 패턴을 만드는 건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서요. 수를 놓는 것처럼 바탕에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배치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벽면에 그 많은 조각의 밑그림을 다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밑그림?”
안토니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뭔가 떠오를 것처럼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
“어떤 식으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겠군요.”
“저도 방법을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정확한 답변을 찾아내지 못한 예건은 팀원들이 근무하는 컨테이너 사무실로 가 물었다.
이런 때야말로 집단 지성이 필요한 것 아니겠나?
예건의 물음에 다들 벙찐 표정을 짓는 직원들.
그중 출판팀 김연희 대리가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타일에 구멍이라도 뚫려 있으면 천에 묶어서라도 패턴 형태로 붙일 수 있을 텐데.”
“엥? 그게 뭔 소리야?”
오경환 대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 대리가 대답했다.
“제가 비즈 공예를 취미로 하고 있거든요.”
“비즈 공예?”
“액세서리 같은 거 만드는 건데, 비즈 조각에 관통하는 구멍이 있어요. 그걸 천이나 서로 엮어서 형태를 만드는 거죠.”
김연희 대리가 얼른 자신의 가방에 걸린 장식품을 떼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동그랗게 펼쳐진 망사 리본 테두리에 크리스탈 조각이 붙어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아~ 이렇게 천에다가 비즈를 실로 엮는다고? 근데 타일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잖아.”
한참 그 장식품을 들여다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예건의 얼굴이 환해지며, 입가를 올렸다.
“가능할 거 같아요.”
“뭐? 진짜 타일에다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
“아뇨. 구멍을 뚫을 필요는 없어요.”
“그럼?”
“망사에 타일을 붙이면 돼요.”
“뭔 소리야? 그게. 알아듣게 설명 좀.”
하지만 오 대리의 채근이 끝나기도 전에 예건은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 저럴 때 보면 엄청 성격 급하다니까. 그런데 망사에 붙인 타일이 벽에 잘 붙어 있을까?”
김연희, 그리고 자리에 모여 있던 대부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기에.
* * *
예건은 곧장 파리의 자재 상가로 향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얼기설기 엮여 있는 그물 형태의 천이었다.
타일의 접착력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타일이 떨어지지 않는 구조.
그런 형태의 그물천을 찾을 수 있다면, 공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미친 사람처럼 자재 상가를 돌아다니다, 결국 한 가게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았다.
콘크리트 벽면의 크랙을 방지하기 위해 스타코(소석회에 대리석 가루와 찰흙을 섞은 표면 마감에 사용하는 재료) 안에 보강하는 메쉬 보강재.
“이거면! 가능해.”
접착제를 사용해 조그마한 모자이크 타일을 메쉬에 부착하는 것도.
타일이 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부착면적을 넓히는 것도.
게다가 기존 벽의 보이지 않는 크랙도 방지해 건축물의 노후화도 막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선택.
예건은 넉넉한 양을 주문해 현장으로 보내고, 곧바로 니콜에게 연락했다.
“미술과 출신의 조수가 몇 명 필요한데, 혹시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 언제까지요?
“가능하면 빨리. 내일이라도요.”
– 내일. 흠… 알았어요.
다음날 오후.
현장에 도착한 니콜과 세 명의 젊은 미술학도, 소피, 시몬, 로맹.
네 사람은 허름한 나무 창고 옆에 새로 만들어진 천막으로 향했다.
사방은 뚫려 있고, 지붕만 있는 공간.
그 아래 넓은 테이블 다섯 개와 의자, 작은 모자이크 타일이 색색별로 들어 있는 박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망사 천이 놓여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오늘 급하게 만들었습니다.”
예건은 뉴페이스들에게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 작업 내용을 설명했다.
“작업 방식은 단순합니다. 여기, 300ⅹ300 사이즈로 잘라 둔 메쉬 위에 접착제를 바르고, 유리판으로 옮겨서 미리 만들어 둔 배치대로 타일을 붙이면 되거든요.”
예건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그물망 형태의 메쉬 위에 밑그림이라도 그려놓은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안과 똑같이 배치되는 타일 조각들.
얇고 긴 타일은 줄기가 되어 이리저리 휘어지고, 빈 공간을 잎사귀 타일이 회오리처럼 자리를 메운다.
그러면서도 색색의 타일을 이용해 색이 번지는 효과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은 건가?’
시연을 지켜보던 니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뒤이어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한 치의 오차도 없다니….”
“판화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 정말 대단한데요.”
“그런데, 저희가 이걸 할 수 있을까요? 너무 어려워 보이는데….”
학생들의 질문에 예건이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처음에는 간격을 맞추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익숙해질 때까지 유리판 아래 도안을 깔고 작업하시면 쉬워요.”
“아~ 그런 방법이!”
“한 가지 주의할 부분이 있는데, 여기 사방 외곽은 타일이 절반만 붙어 있죠?”
“네.”
“그 부분은 잘 떨어지지 않게 본드를 넉넉히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위치도 매우 중요해요. 타일 두 개가 맞물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도안과 오차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오~.”
예건은 정확한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1-2라 적힌 도안을 펼쳐 놓고 다시 타일을 붙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타일 접착이 완료된 견본.
먼저 만들어 두었던 1-1과 1-2가 나란히 맞대어졌다.
서로 다른 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줄눈의 간격.
“와~.”
“아! 저렇게 이어지는구나.”
완전히 마른 1-1 도안의 타일을 뒤집은 예건이 오른쪽 상단에 사인펜으로 글자를 적었다.
“작업이 완료되고 완전히 마르면 패턴 넘버를 오른쪽 상단 타일에 적고, 저기 빈 테이블에 분류해 놓으면 됩니다. 할 수 있죠?”
“네!”
작업 진행 과정을 다시 한 번 정확히 짚어 주고, 세 명의 타일 조수들이 무리 없이 작업에 착수하는 것을 확인한 예건.
속도는 자신이 직접 하는 것보다 현저히 떨어지기는 했으나, 숙달되면 훨씬 빨라질 것이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작업하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제게 문의 주세요.”
“네.”
작업지시를 마치고 창고로 들어선 예건은 니콜을 향해 고마움을 전했다.
“다들 곧잘 따라 하는군요. 다행히 타일 작업 일정에 맞출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예건이 시연하는 것과 학생들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니콜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밑그림도 없이 타일 패턴 작업이 가능해요?”
“하하하. 건축가들의 눈에만 보이는 자가 있죠.”
피식.
예건의 실없는 농담에 니콜이 작게 웃었다.
“좀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뭐가요?”
“바르셀로나 여행이요.”
“아….”
니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설마 벌써 그림을 찾은 거예요?”
“…….”
예건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놓아둔 곳으로 향했다.
따뜻한 옥수수 차 두 잔을 내린 예건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드세요.”
“내가 옥수수 차나 마시려고 여기 온 줄 알아요?”
툴툴거리면서도 니콜은 잔을 들었다.
고소한 풍미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고소한 옥수수 차의 향기.
이곳에 있을 때면 세상과 단절된 여유가 느껴졌다.
니콜은 성미가 급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예건과 함께 있을 때면 조마조마했다.
익숙한 장소에서 만난 낯선 아름다운 동양인.
포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그와의 첫 만남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에 끌리는 감각적인 본능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저 남자를 붙들어야 한다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예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은 찾았어요.”
“저, 정말요?”
“하지만 지금은 공개할 수 없어요.”
“아니, 왜?”
고요하던 심상에 폭풍 같은 감정이 들끓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그림을 인도하신 분과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줘요.”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바르셀로나 수석감정사가 봤다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그린 그림. 그거 당신이 그린 건가요?”
“네.”
“그럼, 이것도?”
니콜은 휴대폰의 한 사진을 내밀었다.
가우디의 시그니처가 있는 모래 위의 그림.
산 조르디의 전설, 한 장면이 찍혀 있었다.
예건의 얼굴에 낭패감이 돌았다.
“설마 맞아요?”
“아….”
모래 위 그림이기에 곧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사진으로 박제될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여간 비밀 유지가 쉽지 않은 시대다.
다음부터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림만 그렸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사인이에요.”
“사인이 왜?”
니콜은 가우디 연구소 측에서 모래에 그림을 그린 인물을 찾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예요. 그런 전설적 인물의 사인을 도용했다는 그 자체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도용?
예건은 기가 찼으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우디는 이미 75년 전에 명이 다 해 죽은 인물.
자신이 가우디 연구소의 관계자였더라도 이를 큰 범죄로 여겼을 것이다.
예건이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이 부연했다.
“뭐, 다행히 모래 그림은 사라졌으니, 그쪽에서도 더는 이슈를 키우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선물로 보낸 그림도 돈을 주고 거래한 게 아니니 상관없을 테고.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아요.”
“그러죠.”
니콜이 돌아가고 홀로 남은 예건은 남은 옥수수 차를 마시며 마음을 정돈했다.
더는 전생의 시그니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예건이 가우디의 시그니처를 사용한 건 단 세 번.
사그라다 파밀리아 영광의 문의 스케치 위, 지금은 마르크의 병실을 장식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그린 캔버스 위, 그리고 모래 위에 그렸던 산 조르디의 전설 그림.
모두 바르셀로나에서였다.
누군가 우연이라도 진짜 가우디인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마음속 깊숙이 담고 있었던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오랜 벗이며 여전히 가우디를 기억하고 있던 마르크 마저도 환생한 가우디인 예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건은 물끄러미 벽에 걸린 거울을 주시했다.
거기에는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검은 머리 동양인이 심각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자신이 가우디임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켜 더운 입김을 내뿜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 달라진 건 없어. 내가 전생의 가우디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면 되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보다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긴 나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풍성한 잎새 사이로 가려지지 않은 빛이 창가로 들어왔다.
조급해지지 말자.
실력을 증명하다 보면, 기회는 언젠가 올 거다.
“아무리 굵은 나무라도 태양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예건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한 줌의 빛을 잡으려는 듯 손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