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d of 21st Century Architecture RAW novel - Chapter (64)
064화. 황금의 아르누보 (3)
오경환의 걱정과 달리, 예건의 곁에 선 디디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한 디자이너의 지휘가 없었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발루아 프로젝트 멤버들의 항해사인 그의 건배사를 듣고 싶군요. 오늘의 다짐이 완성을 향한 부스터가 될 겁니다.”
처음에는 동양인, 게다가 나이마저 어린 한예건이 이 프로젝트의 총괄을 맡은 것에 불만을 가졌던 그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예건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에게서 받은 입면도로 실시 도면을 그리던 시기부터인 것 같다.
도면을 구체화하면 할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 깨달은 것이다.
예건은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단계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총괄관리자의 자리에 부합한 능력을 선보인 것이다.
그러니 모든 관리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한예건이 첫 건배사를 할 자격은 충분했다.
그의 뜻에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오~. 건배사!”
“좋다. 좋아!”
“건배사! 건배사!”
“건배사! 건배사!”
누군가의 선창을 시작으로 모두 박수를 치며 ‘건배사!’를 리드미컬하게 외쳤다.
디디에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예건을 이끌었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예건이 자신을 향해 열정적으로 환호하는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예건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 진정으로 행복한 얼굴이었다.
예건이 가장 먼저 자신에게 건배사를 제안해 준 디디에 팀장에게 감사를 전했다.
“디디에 팀장님, 감사합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잠잠해질 때쯤.
예건이 잔을 들었다.
“우리의 항해가 신대륙에 닿을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발루아는 전통과 닿아 있되, 지루하지 않고 새로울 겁니다.”
“암~ 그렇지.”
“맞아요. 맞아!”
예건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들.
“비판과 소음이 끊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새로운 건 낯선 법이거든요. 하지만 아마도 그 비평은.”
예건이 브루노를 쳐다보며 척, 손을 브루노에게 향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브루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의 방패, 브루노 건축사님이 대신 맞아줄 겁니다.”
“와하하하!”
“방패래, 방패.”
“든든하구만!”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린 브루노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자 잠자코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니, 우리는 마지막까지 우리가 해 왔던 대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 노력하자는 건, 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일 터.
지금처럼만 해 준다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이다.
예건은 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그런 마음을 담아, 이 잔도. 우리의 발루아 프로젝트도. 미련 없이 끝냅시다.”
“미련 없이 끝내자!”
선창을 따라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예건은 지금껏 자신을 잘 따라와 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잔 속의 와인을 남김없이 마셨다.
* * *
세월의 묵은 때를 벗겨낸 발루아의 인테리어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굽이치며 휘어지는 나선 계단.
3층까지 이어지는 높은 층고의 중앙에 자리 잡은 근사한 5단 샹들리에 조명.
화려하게 벽을 장식한 덩굴무늬 벽화들까지.
발루아의 인테리어는 20세기 지그프리드가 살았던 당시의 디자인과 자재를 철저히 고증해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예건이 가진 전생의 지식과 섬세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촬영을 위해 방문한 오경환 대리와 김연희 대리는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내부디자인에 홀린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매일 방문하다시피 했으나, 비닐 보양과 실내 가득한 먼지 때문에 제대로 된 마감을 본 것은 그들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와~ 미쳤다. 바닥 모자이크 타일이 진심 예술인데.”
“천장은 또 어떻고요? 저기, 저 샹들리에. 엄~청 비싸 보여요! 이제 보니 몰딩도 예술이네.”
누적된 먼지에 가려 그 빛을 잃었던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보석들은 중앙 창의 태양 빛을 반사해 오색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거미줄 가득하던 천장의 몰딩도 그 우아한 자태를 마음껏 드러냈다.
“이 건축물이 지그프리드라는 사람의 소유였다는 게 밝혀지지 않았으면, 이렇게 멋진 공간이 탄생하지 못했겠지?”
“아~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 돋네요.”
예건이 어떻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오경환과 김연희는 예건의 기록을 보아 알고 있었다.
예건은 지난 3개월 동안 부족한 부분의 설계 보완과 시공 관리를 하는 중에도 틈틈이 복원 공사 과정에 대해 집필했다.
매일 일기를 쓰며 그때그때 떠오른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적기도 했고,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점이나 차후 이를 보완할 방법도 적어 놓았다.
그리고 최근 그것을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설계도면과 공사 과정 중에 찍은 사진, 완공 사진을 곁들어 복원 과정을 글로 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가우디였다면 집필은커녕 설계 과정을 모두 숨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예술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고, 오히려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정보 공개를 권유하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먼저 이런 디자인을 고안했으니, 함부로 도용하지 말라는 의미다.
물론 그냥 말로 주장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으니, 이렇게 책으로 엮어내 공표하면 된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책이 100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건축학도들을 위한 디자인 지침서로 남아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앞으로 계속 책을 집필하겠다는 건 아니다.
예건은 가만히 앉아서 책을 쓰는 것보다,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상상했던 디자인이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 자체를 즐겼으니까.
발루아 복원에 관한 책은 출판팀의 검증이 있고 난 후에, 경매 오픈일에 맞춰 한국에서 출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정이 조금 바빠졌다.
크리스티앙 측에서 프랑스어로 함께 출간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해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판 제안을 하며 니콜이 말했다.
‘유럽 데뷔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유명세를 떨치는 데 도움이 된다니, 예건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최대한 공사를 앞당겼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고생했을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 크리스티앙에서 촬영 스탭들을 보강해 주었다.
그것도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조명 감독으로.
갑작스러운 상황 변경에 오경환 대리가 부담을 느끼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오경환 대리는 자신이 언제 제대로 된 조명팀과 작업해 볼 기회가 있겠냐며, 엄청 좋아했다.
“오늘 햇볕도 좋고, 창가 쪽 사진 촬영하면 겁나 예쁘게 나오겠네.”
“조명 팀도 준비 다 됐대요.”
“그래? 그럼 예술 찍으러 가볼까! 엣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오경환의 뒷모습이 마치 풍차와 싸우러 가는 돈키호테를 닮았다.
* * *
비장한 얼굴로 브루노가 말했다.
“결국, 이날이 오는군.”
힐끔 브루노의 표정을 확인한 예건이 피식 웃었다.
“신나 보이시네요.”
“신나기는! 걱정이 태산인데. 내가 방패 역할을 할지, 자네 얼굴에 금칠하는 역할을 맡게 될지, 저 보양 비닐 속 결과물로 결정될 거 아닌가. 그야말로 조마조마 하다고!”
전혀 조마조마해 보이지 않지만.
뭐,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해 두자.
그때 브루노 곁에 서 있던 디디에 팀장이 거들었다.
“사실입니다. 브루노 건축사님께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셨는지 몰라요. 디디에! 설마 내일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영상 촬영자는 섭외됐나? 청소 작업자들이 늦지는 않겠지?”
디디에 팀장이 브루노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브루노가 발끈했다.
“흐,흠. 디디에 팀장! 내가 언제 그랬다고….”
“브루노 건축사님 덕분에 날씨가 맑은 거였군요. 감사합니다.”
예건이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하자, 브루노가 무안한 듯 코를 긁적였다.
내부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더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외관이었다.
예건이 디자인한 잎과 꽃 타일이 붙은 정면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나, 입체적이고도 화려한 구조미가 돋보이는 장식 철물들이 시선을 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보양지 하나 벗기는데 수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아마도 새로움에 대한 갈증과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거다.
발코니와 캐노피의 형태라면 입면도나 상세도만 보아도 알 수 있을 테지만, 건축물은 3차원 공간에서 보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건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설렘을 저들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터.
이 프로젝트에 대한 저들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들…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구나.’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문뜩 잊고 있었던 첫 완공의 설렘이 떠올랐다.
동시에 자신만큼이나 함께 완성한 결과물을 아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기억났다.
‘내가 그간 허리에 쥐가 나게 일한 걸 생각하면 이 근처에 오기 싫을 정도로 아주 지긋지긋해!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을 보니, 그 고생이 마냥 헛짓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어휴, 두 번 다시 못 할 짓이긴 하죠. 그런데 아빠가 저 건물 지었다고 말하면, 우리 아들이 저를 엄청 대단하게 보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아들 없는 가우디 님은 절~대 모르실 거예요.’
비록 완공된 건축물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지만.
멋진 건축물을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졌던 멋진 사람들.
그런 이들이 위험천만한 위기 속에서도 그의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먼저 나서 주었다.
묵묵히 그림자를 자처했던, 하지만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건물을 대변해 줬던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들은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그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막상 돌이켜 보니,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었다.
‘기억해 두자.’
예건은 자신의 기억 속에 똑바로 새겨 두기로 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다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만은 모두를 기억하겠노라 결심한 것이다.
예건의 표정이 굳어지자, 그가 긴장했다고 생각한 브루노가 물었다.
“긴장되나?”
“전혀요.”
긴장.
그건 결과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이들이나 하는 것 아니었나?
예건은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직접 금속 장식물의 제작 과정과 결과물을 진두지휘했고, 결과물이 흡족했기에 설치까지 이어진 것이니.
이윽고 리노 소장의 지시와 함께 보양 비닐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건의 요청대로 보양 비닐은 1층 출입구의 캐노피를 시작으로 2층, 3층 순서로 벗겨질 것이다.
그 과정을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정면에서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캐노피의 벽 쪽의 고정대부터 파란색 비닐 보양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검은 바디가 외부로 조금씩 드러나자, 몇몇이 깜짝 놀라 수근거렸다.
이윽고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빛으로 마감된 화려한 캐노피가 형상을 드러냈다.
“오오! 역시 멋지군!”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진 얇은 살대는 단순한 직선 형태의 디자인이 아니었다.
중앙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형태가 측면으로 갈수록 더 많이 휘어지도록 만들어졌다.
검은색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다.
애매랄드 빛을 아주 살짝 가미한 검은색.
캐노피 끝단은 심플한 검은색만 칠해진 것에 반해, 벽 쪽으로 향할수록 크랙이 간 것처럼 황금색 라인이 두꺼워진다.
멀리서는 색상의 변화를 볼 수 없고, 캐노피 아래와 측면에 서야 비로소 디자인이 눈에 드러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장식했다.
브루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건물이 전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에 선 브루노의 눈에는 디테일이 곧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황금의 아르누보라고 하지 않았나? 캐노피에는 황금색이 전혀 없는데?”
예건은 씩 웃으며 그저 보양 철거 과정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2층의 발코니 난간이 개방되고, 브루노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아!”
주먹을 꽉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오